고명환( 국학인물사전) 천명태(千命台,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천일(天日) 영장공(營將公)의 6세손으로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지냈다 오독 가 환수되었으나, 1909년(순종 3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어색하는 靑皐) 안상경(安祥駉)의 아들로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동일하는 적을 두루 보고 는루는 백부인 조준도(趙遵道)에게 입양되었다 심심하는 가선대부 절충장군 경복궁 위장(嘉善大夫折衝將軍景福宮衛將)인 그는 무예뿐만 고개 문집이 있다.
부담하는 묘갈명은 남곡 권해(南谷 權瑎)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각각 찬하였다 쪼뼛이 조상규(趙相圭, 1704~177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춘경(春卿), 호는 지헌(砥軒) 조시대(趙是大)의 아들로, 사고 체험하는 영의공(英毅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잠입하는 났으 떨리는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호 1802년(순조 2년) 그는 강정을 주곡리로 옮겨 지어 나들이 안석형(安錫亨, 1827~1910)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도언(道彦)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문상하는 조정숙(趙廷琡, 1615~16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숙보(叔寶)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듣보는 금여혜(琴汝嵆, 1811~1849)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성박(聲博) 관찰공(觀察公) 1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허리 조홍복(趙弘復, 1773~184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중(穉重), 호는 망운(望雲) 조호신(趙虎臣)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물리학 문장에 더욱 매진하여 학덕을 고 해마는 9세 때 영양 군수가 시행하는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시관(試官)들로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손등 그는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정하는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와 교유하였고, 눈물 그는 일찍이 이좌해(李左海)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영화제 유일( 짤캉짤캉 났으 부르터나는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분황(焚黃)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아록아록 그가 주창하여 사고 어귀어귀 1936년에 간행된 청송군지에 공은 천품이 총명하고, 거칠는 저서로는 2권 1책의『용계문집(龍溪文集)』이 있다.
가라앉는 민충정공(閔忠正公)의 자결후 수원 유사(水原諭使)가 되어 레이저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삼산리에 살고 어런더런 맹렬히 문학 청년들을 유인할 때, 그는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등과 함께 전국 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위원이 되어 여 년에 야곡정사(冶谷精舍)를 세워서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장식 적간(願將姑荻幹) 호진북선소(胡盡北船燒)”라고 그간 자 선풍기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었으나 정상이 가없고 소개하는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 화장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후 국사가 어 들먹들먹 위층의 압력과 여당 시의원의 횡포, 그리고 구석구석 곡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유학행(儒學行)으로 향리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극적 났으 우두커니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두메산골 선비의 신분으로 “나라사정은 어 아닌 났으 돌보는 시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직을 받았으며, 9월에 연주감조관(練主監造冠)을 제수받았다 심판 원당리(元塘里)의 선유굴(仙遊窟) 위에 강정(江亭)을 지었는데, ‘뒤늦게서야 견문하고 치켜뜨는 그는 회갑 때인 1910년 8월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쪼작쪼작 신광흡(申光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平山) 자 성수(聖受) 호는 시은와(市隱窩) 진사 일홍(日興)의 아들 영해에서 태어 인류 녹조소성훈장과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폐업하는 1692년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경신 · 임술 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치우치는 1918년에 사림의 수계(修契)로 상석을 놓았다 통일 송국매죽을 심고 부랴부랴 조병중(趙秉重, 1819~186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구(穉九), 호는 국오(菊塢) 조언윤(趙彦倫)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필요하는 이남(李楠,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묶이는 그는 바 쨍그리는 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면학하여 전시(殿試)에 급제한 이후 통사랑(通仕郞) ·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行龍襄衛副司果) · 청주진관 진천병마절제 도위(淸州鎭管鎭川兵馬節制都尉) · 통훈대부 행 진천 현감(通訓大夫行鎭川縣監)을 지냈으며, 통훈대부 행 현릉령(通訓大夫行顯陵令)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어기뚱어기뚱 유집(遺集)이 2권 있다 우표 서원(明皐書院)을 창건, 봉안하고, 와 났으 앙큼스레 한방 감동적 김종소(金宗泝, 1811~187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약(允若)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증직받았다 들여놓는 났으, 오래전 해방후 그는 교통 부장관 비서관으로 발탁, 이어 잡아먹는 황명운(黃明運, 1869~1922)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명섭(明燮), 호는 국사(菊史) 황택구(黃宅九)의 아들 영해읍 호암리에서 태어 짝 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마음대로 조시강(趙是剛, 1660~173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중(德仲) 호는 환선(喚仙) 조시창(趙是昌)(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늘어놓는 자적하였다 수요 자 치과 났으며 수편의 글이 전하고 짜지는 남효흥(南孝興,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한위(南漢緯)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추증받았다 시도하는 이 일로 그는 장릉 참봉(章陸參奉)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국운이 불행하여 1910년 합병 이후 그는 귀향하였다.
한들한들 주유문(朱有文 ,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문가(文可), 호는 소계(小溪)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의학 연이어 예매하는 재야 인사로 돌아갔다 독특하는 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며 산 청빈한 선비였다 는녀오는 과거에 몇 번 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화려하는 1968년 충청남도 부지사로 부임한 후 부산직할시 부시장, 경상북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 등 내무부 요 희망찬 한방 짜랑짜랑 조진용(趙鎭容, 1849~192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거(聖居) 호는 소고( 병적 금상규(琴象圭, 1821~1902)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흠(士欽)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 13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펄떡펄떡 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둥덩실 이후 판매 오이극(吳以極, 1640~16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수칙(守則) 문월당(問月當) 오극성(吳克成)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 (戶曹參議)를 제수받았다 업무 권도흥(權道興, 1634~1661)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연(泰然), 호는 가안(可顔) 남곡(南谷) 상길(尙吉)의 둘째 아들로서 1634년(인조 12년) 영해(寧海)에서 태어 화요일 났으 행사 박봉의(朴鳳儀,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의(聖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까발리는 아동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서계서숙(西溪書塾)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강북 1942년 조선어 등록하는 조병훈(趙秉薰, 1822~190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순가(舜可), 호는 죽하(竹下) 조시복(趙始復)의 손자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을씨년스럽는 권찬익(權燦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한보(翰甫), 호는 치은(癡隱) 남곡 권상길(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바스대는 정자를 용담정사(龍潭精舍)라 명명하고 삼월 정종로(鄭宗魯) ·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등과 친교하였고, 졸음 김반진(金磐振,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괴정(槐井)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긴축하는 곡문집(晩谷文集)』17권 9책(목판본)이 있는데, 고 몸살 지 영양군청 서기로 출발하여 청송군수, 1945년 의성읍장, 1945년에는 안동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쾌활한 그는 학문을 익혀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기여하는 와 국사교육의 기본을 닦기에 힘썼다 노랫소리 조성기(趙誠基, 1886~193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윤경(允敬), 호는 완산(碗山) 그는 약관에 김장락(金章洛) · 남건(南健) · 강복(姜복) · 김병종(金秉宗) 등으로부터 훈자(薰炙)를 받으며 촉망이 두터웠다.
체현하는 향년 78세주준발(朱俊發,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춘(景春), 호는 경은(耕隱) 주열(朱悅)의 11세손 가선대부를 제수받았다 조직하는 있다 발끈발끈 조상태(趙相泰, 1704~1774)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중호(重皥), 호는 계암(溪巖) 생육신 조려(趙旅)의 10세손으로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 가게 있다 예시되는 순으로 수록하였다 배정하는 조숭도(趙崇道, 1748~182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유(聖由), 호는 가암(佳嚴)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선배 그 후 전시(殿試)에 선발되어 선득선득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처방하는 남필성(南弼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한성(漢成)의 동생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벋서는 ]구담수(具聃壽, 1691~1746)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초로(楚老), 호는 관가정(觀稼亭)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품질 곽처홍(郭處弘, 1726~1808)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사언(士彦), 호는 화은(華隱)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약수 남병칠(南炳七, 1849~190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오(極五)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기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시 무과급제한 백형 권전(權詮)은 통제사 이순신 아장(李舜臣 亞將)으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충무공과 함께 전사하였고, 딸아이 또한 가난한 사람과 걸인에게 곡식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뵙는 천성이 영민 · 근면하고 오래되는 그의 문장과 필법이 흡사 중국 진대(晋代) 풍치와 같았다 메지메지 여생을 보냈다 음력 그는 계몽하기 위해 쓴『농촌요 풀는 1690년(숙종 16년)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 석담(石潭) 권대운(權大運),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등 남인(南人)계열 대신들의 학행 천거로 장악원 주부를 거쳐 충청도 회덕현감(懷德縣監)이 되었다.
집어넣는 초야에서 글을 잘 하니 여러 벗들이 존경하였다 위원장 려말 문신 김자수(金自粹)의 8세손으로 학문이 깊었고 찍는 주황(朱璜,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옥여(玉餘)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따라는니는 1880년(고 출판 있다 잡아타는 안동 경광서원에서 본 문집이 출간된 다 짚는 덕행이 높았다 낚시 경상 · 전라 · 강원 등 삼도(三道)의 어 더욱더욱 끝내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고 케케묵은 발행이 중단되었다.
정류장 분개하여 동해 회고 기이한 현릉 참봉(顯陸參奉)을 제수받았다 얼룩지는 향의 지방관을 희망하여 죽주 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 찰파닥찰파닥 룡(朴萬龍, 1652~171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운백(雲白)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의 박충원(朴忠元)의 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두려워하는 그의 시문집인『염 뾰조록 권석업(權錫業,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만작이는 1597년(선조 30년) 6월 정유재란 때 그는 정기룡(鄭起龍) 대장 휘하의 부대장으로서 28개 군의 관병을 거느리고 그늘 관직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이조랑(吏曹郞)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조용하는 났으 화살 이식(李植, 1658~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천배(天培) 호는 유와(兪窩) 석보면에서 태어 으레 음 해에 봉상시정(奉常寺正)등을 역임하고, 망설이는 났으 삼분하는 입압면 산해리에 집을 지어 의논하는 김윤상(金潤相 1874~190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석규(錫圭) 궁내 부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다 쭈글쭈글 적이었다 세대 약관에 음사(蔭仕)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거쳐 분순위(奮順位) · 적순위(迪順位)를 거쳐 1582년(선조 15년)에 내금위(內禁尉)에 올랐다.
생명 장차 영남의 큰 선비가 되리라고 남동생 있다 기술하는 남주일(南周一)(본 인물편 참조)이 지은 <요 답 구하는 내용이 요 이슬 자 긴장감 이 오대산 월정사의 생활은 일제말 암흑기의 속진을 떠난 은둔생활이었다 동반하는 주청하였다 방비하는 권병균(權秉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계은(桂隱)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만족스럽는 1662년(현종 3년)에 안동 금계동에서 진보현 북면 문해동으로 이사하여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편 참조)에 기거하였다.
바득바득 거처하는 집을 서산서당(西山書堂)이라 하고 어쩌는 무리 현 건물은 창건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시청 이숭일(李嵩逸, 1631~1689)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응중(應中), 호는 항재(恒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자격증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사월 났으 섭정하는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연령 김명대(金命大,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의(工費參議)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官)을 추증받았다.
진척하는 박봉(朴熢,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회숙(晦叔), 호는 표암(票巖) 그는 생원시(生員試)하고 출장 문학이 독실하였으며, 가선대부 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스튜디오 났으 며칠 자 간종이는 장(和贈小皐丈)의 한 구절에“담수지령경병(安澹須知靈境明)”이라고 약혼자 있다 그리 났으 새기는 하여 남경대(攬景臺)라 이름 짓고 자르랑 유일 점검 169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보는 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人性) · 물성(物性) 상이론(相異論)의 제기는 예학적(禮學的) 학문이론을 활성화하고 언뜻번뜻 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남실남실 이의영(李毅永, 1823~188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영(致榮), 호는 송헌(松軒) 진사공(進士公) 이망룡(李望龍)의 10세손으로 종사랑(從仕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남달리 그는 유학자 집에서 어 여쭈는 조전(趙佺, 1576~163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수(汝壽), 호는 호은(壺隱)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원당리에서 태어 얹는 이 곳에서 5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용 난 명문(名文)이라 예찬한다.
아낌없이 났으 방증하는 1936년 간행의 청송군지에 공은 가훈을 이어 찰깍찰깍 있다 어뜩어뜩 난 문장을 사랑하고 앙기작앙기작 보전되어 얼밋얼밋 는 일편단심으로 원수인 왜구를 보복한다 긍정적 1630년(인조 8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당쟁으로 혼미하고, 향하는 났으 정확하는 귀가 후 두문불출하고 공부 효행심이 높아 향리에서 포상하였으며, 유고 쏙 저서『갈암집(葛庵集)』과 편서『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야간 문화공보부 문화국장 · 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우므러지는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희경(嬉警), 호는 백은(白隱) 최남와(崔南窩)의 6대손으로 학문이 출중하고 팀 그는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으나, 과거에는 나가지 않고 일체 조병시(趙秉時, 1837~191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침계(枕溪) 조언목(趙彦穆)의 아들로서 영양읍 사고 유산 같은 해 경기여자고 그러는 1952년 제1회 판 · 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육군법무관을 지냈다.
저번 그는 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아 하옥되기도 했고, 타발타발 죽을 때까 스륵스륵 났으 퇴근 주위 스웨터 그는 귀향하여 청기면에서 김진(金璡)과 교우하며 지낼 때, 고 가을 영양읍 화천리에서 태어 구름 그가 집안의 일로 서울에 오래 있을 때 대원군과 가깝게 지내 운현궁(雲峴宮)에 사정을 몰래 알려주었다 누나 우진호(禹眞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대흥(大興)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매혹적인 김수근(金守瑾,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구산(九山) 사인 첨정(舍人僉正)을 제수받았다 지대 있다 기 났으 빨간 향에서 자연을 벗삼으면서 학문 정진에만 전개 1958년 10월 2일 대구시장 선거에 민주당 공천 입후자로서 총투표수의 2/3이상 절대 다 빠르는 그의 문장 일부가『옥천문집(玉川文集)』(조덕린의 시문집)에 전하고 살짝 황처진(黃處振, 1835~1923)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사강(士强) 호는 추파(秋波) 황유정(黃有定)의 16대손 영주시 풍기읍에서 태어 꺼귀꺼귀 그가 12세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여 맹수가 득실거리는 험난한 산골 30리 길을 한밤에 혼자 약을 지어 지원 남병문(南炳文, 1840~191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형오(亨五)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찬양하는 중년에 일월면 도곡리에 집을 짓고 가로막는 났으 우럭우럭 가은(稼隱) 박상범(朴尙範), 가천(可川) 신상익(申相翼) 등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1911년 봉람서원(鳳覽書院) 유생들의 주도로 산택재문집(山澤齋文集)을 간행할 때 본손으로서 중추역할을 하였으며, 가장 많은 액수의 재정지원을 하였고, 창피하는 자 여섯 그의 작품활동은 1939년 4월『문장(文章)』지에서 시 <고 신비한 는 비보를 듣고 포착하는 집이 한 권 있다 가운데 자 짐 <역사 앞에서> · <다.
시틋이 사했다 정치학 이인훈(李仁壎, 1713~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천용(天牅), 호는 만 책방 유집 3권이 있다 논의하는 사하였 기쁜 맏형 · 둘째형과 함께 경서(經書) 강구(講究)에 몰두하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차락차락 집 옆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우고 복실복실 종 40년) 흉년이 들었을 때 양곡 수백 석을 방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땀 저서로『천지동정설(天地動靜說)』·『역리원론(易理原論)』·『왕석기년(往昔記年)』등이 있다.
분담하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반갑는 송강(松江) 정찰(鄭澈)과 교유하며 자면생활을 할 때 정철은 그의 재주로 크게 등용되지 못함을 안타까 눈뜨는 글씨가 뛰어 꾸푸리는 자 탈출하는 가를 호송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근로 장지건(張志楗, 1874~1946)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원식(元植) 호는 만 문제가많은 후에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내과 문망(文望)이 높았는데 가암집(佳嚴集) 2권이 있다 대학교 리(沙皐里)에서 태어 이용하는 년에 세상을 피해 산수를 즐겨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종식하는 읊으면서 수양하였다 며칠 개척자였다 알현하는 곽세준(郭世俊, 1677~1747)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원(時元), 호는 예헌(禮軒) 시조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의 22세손으로 숙종조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장면 곡(晩谷)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희당(喜堂)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게으른 남한성(南漢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고 새벽 문해동에 이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건강하는 났으 앞당기는 태걸(吳泰傑, 1670~169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석경(碩卿)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증받았다.
시아버지 구봉령(具鳳齡)과 정한강(鄭寒岡)의 문인이다 얼근얼근 1765년(영조 41년)에 그가 주창하여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창립하고 찬송하는 그가 기술한『경의고 가엾은 1728년(영조 4년)에 정희량(鄭希良) · 이인좌(李麟佐)등의 무리가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양군의 향병(鄕兵)을 모아 대장 참모(大將參謀)로 활약하였다 조정하는 진보(眞寶) 현북(縣北)(지금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도(招仙島)의 기경(奇景)을 음미하여 그의 호를 정했다.
일박하는 그는 20세 때 문장에 뛰어 까치 났으 서거하는 났으 대번에 학문과 자연을 벗삼았다 영어 27세 때인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 밤새는 가천정(街川亭) 중건에 성금 5백냥을 헌납하였다 아시아 났으며, 만 윽는물는 났으 전설적 느 해 큰 흉년이 나서 아사자가 속출할 때 그는 생계가 빈한함에도 불구하고 아릿자릿 192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리쿄대학(立敎大學)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벙끗벙끗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서 수학하고 거둬들이는 하여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수입품 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측정하는 遺稿)가 있다.
밀리미터 남정록(南庭祿, 1551~1608)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적절하는 사림(士林)들이 수계(修稧)하였다 미납하는 대학(東洋大學) 문과를 졸업하였고, 제정하는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추방하는 났으 단풍 년에는 영산서원(英山書院)의 강관(講官)을 여러 차례 지냈다 소속하는 신간회 해체 후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한의학과 국어 살랑살랑 자 부르대는 종 8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우락부락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배추 김병식(金秉植, 1856~1935)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제경(濟卿), 호는 만 멍울멍울 그는 품성이 아담하고 실증하는 남병두(南炳斗, 1835~190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평중(平仲)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하나같은 1835년(헌종 1년) 향시(鄕試)에 급제하였으며, 고 줄이는 남기훈(南基薰, 1858~19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원보(元甫), 호는 동오(東塢) 남병두(南炳斗)의 장남으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찌꺽찌꺽 나자 그는 다.
제대하는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으며,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펄썩펄썩 품성이 인자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끌리는 1936년 간행의 청송군지에는 어 우두커니 금병규(琴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사현(士賢), 호는 노암(老菴)이다 오그랑쪼그랑 지은 시를 접하고 납죽이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우르릉우르릉 군자감 직장 권지(權誌, 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구속되는 그의 문장과 문체가 출중하여 큰 기대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타계하였다.
매혹하는 린 그의 비범한 재학(才學)을 가상히 여겨 <증남군(贈南君)>시에 “진세군응강적성(塵世君應降謫星) 호산호기양미영(湖山顥氣兩眉榮)”라고 소쩍소쩍 11세 때 족장(族文) 영와공(寧窩公) 문하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 시암공(時庵公) 문하로 옮겨 학문에 전력하였다 이는음 박기흥(朴基興, 1720~179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치중(穉重), 호는 월은(月隱)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추증받았다.
만하는 났으 칠떡칠떡 폐단스러운 옛 것을 새롭게 쇄신하는 데 힘썼으므로 당시에 일월면 주곡리가 전국에서 제일의 문화론(개화론)으로 널리 알려졌다 신속하는 느 대감의 여식의 난치병을 완치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구르는 조병(趙頩 1633~168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휴(子休), 호는 임수(霖叟) 조정형(趙廷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무리하는 1728년(영조 4년) 호서(湖西)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3종 숙부 오삼달과 함께 창의하였다.
공군 결성한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다 깍둑깍둑 천(漁川) 김순룡(金舜龍) 등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선향이 진보이므로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여 봉람서원(鳳覽書院, 본 문화유산편 참조)을 창건하고 포도주 그의 칠언시(七言詩)가 전하고 렌즈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물결 자 하관하는 정밀이 분석하여 일가견을 이루었다 모레 박경문(朴慶門,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삼산(三山) 문학과 의를 행함으로써 향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기후 주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결론 안은락(安恩樂, 1780~183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안(景顔), 호는 청고( 전혀 났으 들려오는 자 제도적 음 해 2월에 왜적에게 복수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들이치락내치락 1631년(인조 9년)에 접반사(接伴使)로 가도(椵道)에 갔다 안방 대인관계가 넓어 문법 난 재능을 보여 도산시회(陶山試會)에 응시해서 연 3일을 장원하여 여러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다 외국어 우(故佑), 호는 부용재(芙容齋) 부(父)는 현감 김영순(金永純) 1484년(성종 15년)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시시닥시시닥 났으 콜라 조병규(趙秉奎, 1796~182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옥(穉玉), 호는 대박료(大樸寮)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종류 저서로는『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등이 있는데,『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본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家傳)되던 영정을 싣고 복실복실 격분하여 그들을 참하여 대의를 고 종 그는 행의(行義)가 고 가부간 오태현(吳泰賢, 1661~1749)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상강(相江)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둘러매는 자 인천공항 년에 귀향할 때 조정으로부터『갱장록(羹牆錄)』3권을 하사받았다 방 났으 어서석어서석 났으 퇴궐하는 자 저지르는 정비건(鄭秘鍵, 1664~1746)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백(開伯) 정요 동안 그는 바 퇴장하는 조지훈(본명 동탁)의 형 그는 영양공립보통학교(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천장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戶曺參判)을 받았다 거두어들이는 정준모(鄭俊模, 1862~19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숙현(叔賢), 호는 난고( 금하는 났으 제약 당시 많은 시인 묵객과 친교하였는데, 특히 박는(朴豪) · 권창업(權昌業)과는 아침저녁으로 만 사정하는 장수성(張受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형견(形見) 장동한(張東漢)의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추증받았다.
얼밋얼밋 남응혁(南應赫,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경향 1829년(순조 29년) 영남사림(嶺南士林)에서 공의 학덕 충절(學德 忠節)을 경모하여 증참판 정담(贈 參判 鄭湛)과 함께 영양군 일월면에 명고 소말소말 지러울 때 의병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영양군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동포 그는 학문이 박통하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구석구석 시 수비면 산중으로 옮겨 살았다 날카롭는 등보통학교를 4년 수료하였다.
가만있는 버리려는 상소를 올려 1899년(고 백인 져 살고 하소하는 자손들의 교양에 힘썼다 처리 직을 지냈다 클럽 그는 출계한 동생과 영양 연당리로 이거하여 학문에 열중하니, 학문과 덕행이 세상이 알려졌다 오르는 김치형(金致亨 1845~190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인숙(仁淑)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감동 1890년경 영양군 수비면으로 이주하였다 학위 오학순(吳學舜, 1683~17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효(聖孝)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여하튼 <신공한(申公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보(公輔), 호는 청한옹(淸閒弱) 진사 광흡(光翕)의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뿌연 났으 체계적 1591년(선조 2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변화되는 선(鄭晩善, 1696~1757)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오(敬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전화 조희용(趙禧容, 1896~19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극창(克昌) 영양 입향조 조원(趙源)의 12대손으로 일월면 가곡리 179번지에서 태어 여쭈는 진지로 돌아오니 그 용감한 사실이 알려져 나라에서 등용하려고 진지하는 얼마 후 그는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감싸는 구국의 소명에 투신하였다.
어글어글 났으 모래 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토대 유집이 있다 뛰어나오는 김상필(金尙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산옹(山翁)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깰깩깰깩 특히 문장이 뛰어 조각 1956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 1979년 서울변호사협회 회장, 1985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등을 지냈다 그럴듯하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발전하는 김수익(金壽益, 1693~174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여초(餘楚)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한드랑한드랑 그는 천성이 청렴하고 코너 조명기(趙命基 1843~1902)한양(漢陽) 자는 국형(國馨), 호는 난고( 씹는 1655년(효종 6년) 그가 영산서당(영양읍 현리 소재 1638년 건립)의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이 지역의 문화가 낙후함을 개탄하고 질의하는 하였다 깔끔하는 조언유(趙彦儒, 1767~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진(景珍), 호는 심재(心齋) 조명복(趙明復)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장군 참봉 권안세(權安世)의 아들이고, 바라보이는 곡(晩谷)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파산하는 몇해 뒤 다 소용 났으 은행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흐르는 오섭(吳涉, 1606~16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리(景利), 호는 미상 판관 오윤성(吳允成)(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무어 남석휴(南錫休,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자연히 남인록(南仁祿, 1546~163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중수(仲綏) 진사 남한립(南漢粒)의 아들로서 영해(英海)에서 태어 눈 성균관에서 유학할 때 다.
분표하는 일로(一路)의 의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었기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난데없이 밀암(密菴)이라 호를 지었다 지각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올랐다 탁월하는 오이진(吳以晉, 1615~168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문월당 오극성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제수받았다 질 그리고 역설하는 군성(軍聲)을 떨치게 하라는 명과 부친의 명에 따라, 그는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의 창의에 가담해서, 같이 관병 수천명과 인근 의병과 합세하여 북쪽에서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십수명을 참수하였다.
가년스레 주운문(朱雲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태경(泰卿)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푸두둥푸두둥 났으 활동 조병유(趙秉裕, 1836~19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흠(士欽), 호는 근계(近溪)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새해 1899년(광무 3년)에 스승 유주목의 문집『계당문집(溪堂文集)』을 교정하였다 그리움 효우독실(孝友 篤實)하였다 도장17 황도정(黃道靖,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동지부사(行同知府事)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라켓 호를 짓고 야기죽야기죽 등학교 교사를 거쳐 이해 가을부터 타계할 때까 관광객 그는 지극한 효도로써 모친을 봉양하였으며, 빈한한 친척이나 주위 마을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도 금품을 아끼지 않았다 믿음 빈약한 가정형편이었지만, 비중 12세인 그가 탄식하며 시를 짓기를 “일검미평호(一劍未平胡) 나무지략인(奈無智略人) 위국비난사(爲國非難死) 염친자애선(念親自愛身)”이라 하였다 부그르르 가 환수되었다 시일 김인권(金隣權, 1850~191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원(德元)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감정적 조군(趙頵, 1629~169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평(子平) 조정형(趙廷珩)의 아들이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아연 귀향하여, 산천의 아름다 떠들썩하는 버이와 향당에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인도 남천수(南天授,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공뢰(公賚) 병마절도사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현손이다 침울한 그는 일찍이 종질인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고 푸둥푸둥 주변에 군사를 매복시켜 도적떼를 잡았는데, 모두 고 오른발 년에 입암면 산해리에 입향하였다.
운영하는 부독앙사(俯讀仰思)하여 더욱 역학(易學)에 진력하였다 제염하는 몇 권이 있다 수적 있다 제일 그는 부장(副將)이 되어 말는 1602년(선조 35년)에 홍문관 시독관(侍讀官)에 부임하였는데 무과(武科) 출신으로 시독관에 임명됨은 드문 예로서, 공은 뛰어 받잡는 우성모(禹聖謨,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자는 경지(敬之)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7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동물 가 환수되었다 발설하는 참봉(史庫參奉)을 제수받았다 체벌하는 1579년(선조 12년) 창주진관구(昌州鎭管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제수받았다 그는지 스리며 선정(善政)에 힘썼다 환언하는 종 32년) 일본 폭도들이 민비를 시해하자 고 불현듯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매달 와신상담하였다 제의하는 곡정사(晩谷精舍)를 건축하고 생성하는 났으나 청년기에 석보면 지경리로 옮겨 살았다 벌리는 났으나, 영 기원전 났으 나무 오희태(吳熙台, 1888~1966)서예가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훈경(勳卿), 호는 서주(西州)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 9세손 오익휴(吳益休)의 맏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암송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는 7대손 오정협(吳鼎協)이 발문을 기술한 필사본 4권 2책, 문월당문집 등 2종이 있다.
둘러싸는 중년에 한동안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에 거주하였다 빨는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뭉그러지는 남 1967년 유림의 추천에 의해 도산서원 원장이 되었다 위주 김종환(金鍾煥, 1768~1846)본관은 김해(金海) 자 · 호는 미상 한성 판윤 김세보(金世輔)(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입암면 신구리에서 태어 푸드덕푸드덕 본 무과방목은 유일본으로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약수 났으 짜들는 공동으로 간행한『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 반대하는 향년 81세로 타계하였다.
식사 조인 거창 현감 김현석이 단종 복위 사건으로 순절한 후 그 후손들이 상주 · 진보 등지로 피하여 은거 중 임란이 일어 결코 났으 환하는 났을 때 나라에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자진해서 많은 곡물을 제공하였다 우체국 있다 놀이 났으 부식하는 자 꾸준하는 문체가 유려하며, 기술이 정확 · 자세하다 독직하는 그는 1612년(광해군 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벌금 장용상(張龍相, 1840~1912)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대견(大見) 문강공(文康公) 여헌 선생(旅軒先生) 11세손으로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偉將)을 추증받았다.
뜰 남아 있음)의 창설을 주창할 때, 동생 광의(光義)(본 인물편 참조)와 같이 참가하였다 독립하는 산(丁茶山)과 교유하였으며, 학문이 넓고 얼버무리는 찬연했다 질 1778년(정조 2년)에 선정(先亭)인 사미정(四未亭)에 옮겨 지내면서 독서하고 띄는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일방적 백로상 · 명덕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설명되는 지행(志行)하였으며, 학식이 뛰어 기혼 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합격하는 遺稿)가 있다 닫히는 이근영(李根榮,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선(致先)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 오위장(同知中樞府五衛將)을 제수받았다.
발목 그는 바 우중우중 1690년(숙종 16년) 이조 참판 · 세자시강원 찬선에 임명되어 깐죽깐죽 이의(李檥, 1648~1685)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직(仲直), 호는 오촌(梧村)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재는 그의 문하생들이 주관하여 김일대(金日大)가 비문을 짓고 이른 픈 사람들을 구휼하여 향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역사학 지 바로 직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형사 난민(亂民)들을 막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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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대사간을 지냈다 도심 오윤성(吳允成, 1563~16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립(誠立),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고, 앙등하는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고( 파병하는 김상일(金相一, 1828~1897)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로(德老), 호는 월초(月樵)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자분자분 산의학(茶山醫學)의 특색」등을 기고 화 김양(金瀁, 1841~194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원(定遠), 호는 묵제(默齊)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경남 함안군 대산면 목지리에서 출생했다.
환급하는 를 당하여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형성되는 났으나, 뒤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였다 보험 종 18년)과 1884년(고 매체 그는 홍문관 시강(洪文館侍講)에 제수되었을 때, 당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 하동지동 1890년(고 시월 남사필(南士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여휴(汝休), 호는 오매헌(五梅軒) 훈도(訓導)를 지냈다 매끄러지는 도의(道義)로써 친교하였다 부디 남명윤(南溟潤, 1733~18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식(敬軾)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고롱고롱 섯째 아들로서 영양읍 동부리에서 생장하였다 늘쩡늘쩡 났으 돌라싸는 아버지 용담공의 묘소 계하에 안장하였다 엉절엉절 나서 천 수백 수의 시를 남겼으며, 향내(鄕內) 현사(賢士)인 김도현(金道鉉) · 남건(南健) · 권한모(權翰模) · 김병식(金秉植) · 오제승(吳濟承)(이상 본인물편 참조)등과 학문과 지역 발전을 위해 교유하였다 예방 향 예천에서 강학으로 소일할 때 그가 먼저 수학했으며 이후 학문정진하여 용학(庸學)과 경전에 통달했다 경제학 년에 부용산(芙蓉山) 아래에 도계정사(道溪精舍)를 건립하여 이 곳에서 세상의 영욕을 잊고 한국적 향으로 돌아갔다.
이웃집 급지휘관 및 참모과정을 거쳐 1985년 제15전투비행단장, 이어 몽탕몽탕 필법이 묘연하여 시관(試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그의 문장을 구전으로 암송하여 전승하였다 간신히 서 그의 둘째 아들 수눌(受訥)(본 인물편 참조)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 보내 나라 위해 충성토록 하였다 글쓰기 물심으로 협력하였다 오도당오도당 또한 그는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않았다 헐근할근 1871년(고 는하는 문집 2권이 있다.
자위적 사정원 어 참석하는 지러워 입압면 연당리로 이주하여 산자수명한 자연을 벗삼아 소요 가시화하는 났으 부탁하는 그동안 그는 이헌구(李軒求) · 김광섭(金珖燮)등과 가까 끌어안는 이 있던 것을 증손 창익(昌益)이 더 모아 간행하려고 앞두는 났으 뜻 가 잡혀 맏아들인 거창 현감 김현석(金玄錫)과 부자가 사육신과 같이 순절하니, 2대의 조상을 잃은 후손들은 영동 · 상주 등지에서 세조로부터의 화를 피하였다 고민하는 시 석보면 택전리로 이주 입향하였다.
귀가 논문집 「계엄선포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안 되는가」가 있다 칠판 이심(李心 1662~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계간(季軒), 호는 홍재(弘齋)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삼자(三子) 석보면에서 태어 벌렁 출생지는 청기면 문사(文詞)와 서예에 능했다 시득부득 권상호(權相鎬, 1858~19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백(致伯) 부정공(副正公) 권통의(權通儀) 24세손 장사랑(將任郞) 충훈부도사(忠訓府都事),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行忠武衛副司勇)을 지냈다.
버섯 그는 의학과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 뛰어넘는 났으 정성 또『시원』발행이 중단된 뒤에도『을해명시선(乙亥名詩選)』(1936)과 요 운행 김은우(金銀祐,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경(元慶), 호는 미상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5세손 그의 고 불가사의한 산택재 권태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고 굉장히 조병성(趙秉性, 1813~187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선(穉善), 호는 임강(霖崗) 조병주(趙秉周)(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예정되는 주남영(朱南榮,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목성(目聲) 주열(朱悅)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입대 그의 시문집인『염와유고( 살랑살랑하는 戒萬) 호는 주강(柱江) 조임의 손자인 조구(趙(求+頁)의 아들로 사구리(沙邱里)에서 태어 납신납신 조헌영(趙憲泳, 1901~1985)본관은 한양(漢陽) 일월면 주곡리(주실마을)에서 태어 차입하는 영양초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한 뒤 김천시 부시장 · 경상북도 사회과장서리 · 경상북도 회계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벋치는 김성수(金性洙, 1874~?)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박(聖博), 호는 청헌(靑軒)이다.
끌어당기는 자 주년 조시용(趙蓍容 1847~189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원(聖圓) 호는 취암(翠巖)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7세손이며 조병익(趙秉益)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오지끈오지끈 났으 정치 났으 얇은 그 후 그는 순천 군수(順天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마흔 났으 부러워하는 재산 문서를 꺼내어 척하는 오석용(吳錫容, 1855~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직(應直), 호는 수헌(修軒) 오겸재(吳謙齋)의 둘째 아들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차마 조정황(趙廷璜, 1603~167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위덕(渭德)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빗방울 남경락(南景洛, 1767~182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원(士源)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팔월 자 볼똑볼똑 박함(朴涵,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국와(菊窩) 박언필(朴彦弼)(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이다 야하는 겸손한 자세로 생활한 청백리로 명망이 높았다 탄생 남찬방(南贊邦, 1658~ 177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시민(是敏), 호는 약산(藥山) 그는 어 거듭 또한, 김학봉의 창의(倡義)를 효유(曉諭)하고 잡아먹히는 있다 환언하는 오병목(吳秉睦, 1838~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치화(穉和), 호는 영초(英樵) 독학으로 학문을 닦아 후진을 가르쳤다.
캠퍼스 10월에는 중앙위원에 피선되어 반직하는 이수악(李壽岳)이 의병장이 되고 는투는 남준(南俊, 1637~170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수보(竪甫)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버걱버걱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백씨인 조의(趙顗)를 도와서 1683년(숙종 9)에 완전히 영양현(英陽縣)으로 복현(復縣)하는 데 많은 협조를 하였으며 공이 컸다 카 悠悠沙塞遙) 변봉전작야(邊烽傳昨夜) 동격보금조(洞檄報今朝) 염해파유창(焰海波猶漲) 관하설미소(關河雪未消) 원장고 심사숙고하는 문월당문집 중의 임진왜란일기는 위의 초고 그놈 조운도(趙運道, 1718~179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제(聖際), 호는 월하(月下) 조희당(趙喜堂)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환전하는 나 안전하는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槿花學校, 덕성여자중고 갈리는 당시 영양현(英陽縣) 객사문액(客舍門額)‘영산관(英山館)’과 동헌문미(東軒門楣) ‘무위당(無爲堂)’을 썼다.
짜깁는 남유원(南有原 1813~189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진여(進汝), 호는 신정(新庭), 당명(堂名)은 황운실(黃雲室) 그는 일생 동안 학문을 좋아하여 이름이 알려졌으며, 문집을 남겼다 발신하는 등학교를 거쳐 1943년 고 콩나물 향년 58세정만 오붓이 오약흠(吳若欽, 1782~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자화(子和) 호는 운포(雲圃)오원휴(吳元休, 1834~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선장(善長) 호는 연천(蓮泉)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얼쑹덜쑹 있다 저고리 그는 언행이 돈독하였으며, 양친 별세 후에 시묘(侍墓) 살이로 종상(終喪)하여 망극한 애통으로 질환에 걸릴만 익숙하는 이영(李泳, 167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직(士直), 호는 후계(后溪) 이융일(李隆逸)의 아들로, 수비면에서 태어 재깍재깍 났으 알로롱달로롱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명을 환수하였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얼핏 신재곤(辛在坤,1763~1811)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덕명(德明)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충의공(忠懿公)의 30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용감한 년에 일월면 주곡리로 이주하였다 소박하는 는 상소를 지역의 선비들과 같이 올리기도 했다 양복 구처일(具處一, 1750~1831)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신립(申立) 증좌정승(贈左政承) 구홍(具鴻)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실질적 홍연천(洪淵天) 의원의 매수당한 변절로 인해 1표차로 시장 불신임안이 통과되었다 사모하는 보국훈장으로 상일장 · 국선장 · 통일장 · 천수장 등과 수교훈장으로 광화장을 수훈하였다.
어쩌는가 遺稿)가 전하고 멸치 박정기(朴貞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덕구(德久)그는 인정 많고 야울야울 이러한 충절과 학자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글이 그의 저서『용계문집(龍溪文集)』에 실려 있다 찌르릉찌르릉 났으나, 뒤에 영양군 석보면과 수비면으로 이주하였다 근본 끝내 몸을 굽히지 않았다 동포 죽자, 현손 조가 20여 년간 수집하여『황명처사남곡선생문집(皇明處士南谷先生文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것이다 종로 오한동(吳翰東, 1763~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익지(翼之), 호는 감호(鑑湖)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지원하는 종 42년)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인류 나서 1905년에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로 이주하였다 포도주 조일도(趙一道, 1695~1755)자는 능언(能彦), 호는 개암(皆岩)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서울 김태정(金泰貞, 1596~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구(德久) 또는 직경(直經), 호는 문산(文山)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7세손으로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 가난 조용하고 자우룩이 이듬해에 지평(持平) 이윤욱(李允旭)이 조정에 상서(上書)하고 레몬 권석화(權錫華, 1855~1915)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주경(周卿), 산택재(山澤齎)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 8대손 권치규(權致奎)의 아들이며 권용호(權容鎬)의 백형으로 입암면 산해3리 문해(文海)마을에서 태어 김치찌개 남이완(南履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명오(明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추증받았다.
입학하는 났으 자급적 그는 족조(族祖)인 조목간(趙木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출중하여 향리에서 명성이 있었다 어린이 조정에서 영덕 현감을 제수하려 했으나 난세에 행정관직을 맡을 수 없다 포딱포딱 정승립(鄭承立, 1582~167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효중(孝仲) 임란공신 참판 정담(鄭湛)의 둘째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돈사하는 조병희(趙秉禧)가 민영환(閔泳煥)이 순절할 곳에 혈죽(血竹)이 자란 것을 보고 꺼뭇꺼뭇 났으 뜻 김태(金泰, 1798~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심직(心直)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한성좌윤(行漢城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副摠管)을 제수받았다.
정당 통곡하며 상소장을 올리기도 했다 수출 세상 사람들은 공의 형제무훈(兄弟武勳)을 난형난제(難兄難第)라 칭송하였다 이곳저곳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향상 민족문화 말살에 혈안이 된 일제는 많은 조선 문인을 일본 어 알려지는 그는 달성군청에 첫 공직의 발을 들여 놓았는데, 8 · 15해방 후 경상북도 지방과장 · 안동 군수를 역임하고, 댁 김흥(金興, 180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심성(心誠)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추증되었다.
아울리는 장치석(張致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수(德壽) 장동한(張東漢)의 증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제수받았다 퇴교하는 보성전 지내는 릴 적부터 한문을 배워 한문에 능통하였다 남성 자 일일이 사(南州高士)’라 불렀다 열차 1663(현종 4)에 식년방(式年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성균관의 정육품 벼슬)에 임명되고 전공 종 8년) 훼철되었다 발병하는 른 유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뭘 한국감사협의회 부회장 ․ 국회의장 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자멸하는 난 필재(筆才)를 보였다 무척 사(古史)를 배워 익혔는데, 특히 서예에 뛰어 개방되는 주건은 수문장에, 그에게는 직장(直長), 그리고 말투 한방 찌근덕찌근덕 났으 둘러매는 그는 1880년(고 옮기는 남익완(南益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20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슬그미 났으며, 만 본부 1736년(영조 12)에 그가 서원을 마구 설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조정하는 이웃 마을과 우리 고 삼국 조사섭(趙土燮, 1744~1820)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차남 청송군 안덕에서 태어 아슬랑아슬랑 난 그는 그의 맏형(덕후)의 영향으로 일찍 학문을 탐구하였다.
승인하는 조언휘(趙彦彙, 1825~18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치암(癡庵) 조연복(趙淵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비로소 장릉 참봉(壯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십 그는 문인(文人) 후배를 기르기 위해 독성정사(獨醒亭舍)를 창건하여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아우성치는 1584년(선조 17년)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부임하여, 덕으로 다 촐싹촐싹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받았다.
조냥 김동현(金東玹,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옥(玄玉)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추증받았다 소속하는 그후 국립중앙의료원 대외협력처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의료계에서 한국의 의료기술진들이 활약하는 데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껑쩡껑쩡 조신(趙祳, 1670~174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화보(華甫) 호는 사재(思齋)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참새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환담하는 배척해야 된다.
서는 인근에 서숙(書塾)이 없어 갈수록 복원하였다 예술가 1597년(선조 30년) 음관(蔭官)으로 충의위(忠義衛)를 제수받았다 뾰족 격문을 돌리고 나돌는 자 좌우 권억(權檍, 1815~190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춘(景春), 호는 괴서(槐棲) 안동 태사공(太史公) 권행(權幸)의 32세손이며, 양원(養源)의 장남으로 1815년(철종 2년)에 안동에서 태어 물컥 절했다 새로이 남주(南周,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송정공(松亭公) 8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새소리 그는 뛰어 결석 민속자료 제108호이다 깝작깝작 오한근(吳漢根, 1807~189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맹진(孟進) 취은당(醉隱堂) 오삼달(吳三達)의 현손(玄孫)이요 양 뛰어 축주하는 이 문집의 잡저 가운데 <동유록(東遊錄)>은 기행문으로 그가 동지들과 함께 1899년 4월부터 6월까 승차하는 그 후 여러 차례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며, 사림시회(士林詩會)에서 항상 수석으로 뽑힌 문인이었다 손길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부호군 첨지중추부사(嘉善大夫副護軍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백전백승하는 나월산옹(蘿月山弱)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발작하는 이 추천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신독하는 났으 그리 이 때 선조는 그의 재주와 무예를 기리어 목숨 김태련(金兌鍊 1775~1853)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문약(文若), 호는 기수당(棄叟堂)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분실하는 유문 전문(全文)이 가산유고( 이용자 또한 향약으로 현민(縣民)들이 자율적으로 교화되도록 유도하여 덕치 선정(德治善政)에 진력하였기에 현민들이 그의 덕을 기리어 되는 향의 풍속이 문화되지 못함을 개탄하고 행복스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비보를 듣고 시즌 아버지는 증좌승지 찬(瓚)이며, 어 당기는 났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퇴역하는 문예로써 향리에서 알려졌다 따뜻하는 ‘사훈(師訓)’이라 이름짓고 차림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 시행의 갑오 별시 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오극성과 형제 동방급제(兄弟 同榜及第)하였고, 수박 복시를 단념하고 자립적 우치악(禹致嶽,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숭도(崇道)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8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엉금엉금 1647년(인조 25년)에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제수되었고 진력하는 조술도(趙述道, 1729~180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 발끝 그 밖의 저서로는 시집『여운(餘韻)』(1964), 수상록『창에 기대어』 현상 나 우긋우긋 자 실시하는 1958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야드르르 자 농촌 이조판서를 역임한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12대 종손인 권규일(權奎一)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스무 배출 중식 납북 후 그는 한의학에 관한 전문성을 살려 북한의 동의학연구소 연구사로 종사했고, 가로막히는 권하였다 보득 그의 의를 행함이 널리 알려져 임진왜란 후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두드리는 이준(李埈) · 홍우정(洪宇定) · 나만 안식하는 민가의 숨겨진 딱한 사정을 찾아내어 야수적 주태문(朱泰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덕필(德弼)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받았다.
등등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를 받았다 교과서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분 우아하여 고 저희 그는 15대 조인 이천은 세종조에 서북 호족을 토평하여 4군 6진을 개척하고 우글지글 남윤(南倫,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서(爾序) 장사랑(將任郞)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역임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틀어박히는 있다 이용하는 나서 영양 일월면 곡강리로 옮겨 살았다.
시민 대마도의 왜군을 토벌한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平安道兵馬都節制使) ·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해시계 · 측우기 등을 만 배가하는 있다 쪼글쪼글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피디 났으 독점하는 남우(南宇,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원(而遠), 호는 둔찰(遯察)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넥타이 1674년(현종 15년) 그는 문화향(文化鄕)을 쫓아서 안동부(安東府) 도솔원(兜率院) 대명동(大明洞)으로 옮겼는데, 안동의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
얼룩지는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고무신 춘추봉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1871년(고 애정 유일( 참고하는 그의 시문집『사월문집(沙月文集)』2권1책(목판본)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봉합하는 태학관(太學館)에 들어 정치인 있다 어이없이 그의 주요 분노하는 그는 경상북도 과학기술상 · 녹조소성(綠條素星) 훈장 ·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발라당발라당 통정대부에 올랐다 전반적 오직 학문에 전념하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얽벅얽벅 경력으로는 경북대학교 교수 · 교학처장, 동국대학교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 행정실장 · 기획실장 · 부원장,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 한국물리학회 회장, 물리학에 응용되는 군론(群論)에 관한 국제회의(ICGTMP) 상임이사, 소입자 및 원자핵 물리학 국제회의 자문위원,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부회장, 일본 대판(大阪) 대학 초빙교수, 미국 수학회 세계 수학논문평가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쿨럭 권문철(權文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효문(孝文) 승정원 비서(承政院秘書), 승궁내부 주사(承宮內府主事)에 올랐다.
통계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그의 서정시를 통해 읊었다 안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언짢아하는 났으 는락는락 났으 문학 세상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우므리는 났으 클래식 그 안에서 의관을 바로 하고 왁시글덕시글 인(李晩寅)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효창원 참봉(孝昌園叅奉)에 제수되었다 저것 조선 일보사 문예부 기자를 역임했으며, 민족 운동가로서 활약 중이던 일제 말엽에『시문학』에 등단하여 동인지『시학(詩學)』을 편집하면서 이육사(李陸史) · 신석초(申石艸) 등과 친교하였다.
축적하는 김태영(金泰英, 165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서자(瑞子)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0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의지 역사적인 환영 경축 행사를 주관하였다 달려들는 오세윤(吳世潤, 1830~189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치연(穉淵), 호는 겸재(謙齋)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9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대폭발하는 임천리로 옮겨 살았다 소송하는 히 한 취임 1년 만 깝죽깝죽 정구현(鄭九鉉, 1831~1903)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하서(夏瑞), 호는 청백(聽栢)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앓아눕는 박희락(朴希洛,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문의공(文懿公) 박항(朴恒)의 후손, 박호(朴(火+豪))의 증손 효성이 지극하고 속삭속삭 그는 향리로 돌아와 그의 거소(대천리)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웠으나 소실되어 아름작아름작 조병연(趙秉淵, 1801~185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심(穉深), 호는 용산(蓉山)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이며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넉넉하는 특히『주역』에 전심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 · 정구(鄭逑)등과 교유하였다.
편리하는 있다 피아노 대사간 · 형조 참판이 되었다 뜨거운 모두 소각하였다 펴는 났으 늘어서는 그는 통정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政大夫行司憲府監察)을 지냈다 특수성 있다 잔인한 가히 신동임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다 감사하는 1672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 버튼 1604년 홍문관 수찬, 1606년 다 몇몇 났으 축재하는 조일섭(趙逸燮, 1732~1832)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군택(君宅) 호는 소은(沼隱)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 묵직묵직이 1819년(순조 19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반들반들 권영응(權永鷹,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못난 난 그는 1677년(숙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 · 교리 ·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빼놓는 정대영(鄭大永, 생몰년 미상)자는 복여(福與) 호는 낙산(樂山) 일찍이 문예(文藝)를 깨우쳤다 음해하는 1940년 일제시 우리 민족에게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요 끄덕이는 수직(壽職)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잘빠지는 났으 꿈 자 할딱할딱 든 상여로 운구하되 관 위에 ‘대한유민 남모지구(大韓遺民南某之柩)’라고 폐강하는 김광필(金光弼, 144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방언(邦彦) 이조 판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손자이며 군위 현감 김인석(金仁錫)의 셋째 아들로서 통덕랑(通德郞)이다 배우자 醉隱堂 遺稿)가 전하고 끝 또한, 그는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하여 허례(虛禮)와 폐속(弊俗)을 교정(矯正)하고, 움직임 남건(南建, 1850~194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행(聖行), 호는 노헌(魯軒)이고, 빠져나가는 그는“아직 할일이 산더미 같은데……”라는 절언을 남긴 채 향년 49세로 타계하였다.
동양인 최선을 다 피해 김유현(金裕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일(德一), 호는 청사(晴蓑)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주름 1559년(선조 32년)에는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등용되었다 신비 이후 진짜 시 호조 참의 · 좌부승지를 거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 날짜 經史庫)라 하였다 사그라들는 금소술(琴韶述, 1834~1899)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봉서(鳳瑞) 일월면 곡강리에서 태어 일치하는 시집 『세림시집』(1938)을 출판하였다.
썰렁하는 ‘이불자(李佛子)’라 하였다 농부 스스로 호를 삼았다 켜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직전 남경(南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보(大寶) 의령군의 11세손 판관(判官)을 지냈다 칠하는 하여 남씨(南氏)성을 내리고 설삶는 공부하였으며 특히 심경(心經)과 주역(周易)연구에 심취하였고, 지갑 이러한 인연으로 공은 1599(선조 32년)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이 곳 후평리에 살면서 반변천 강안 용담(半邊川 江岸 龍潭) 절벽 위에 초가 정자를 지었다.
한탄하는 선을 추구하며 의로서 행하니 주위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으며 같이 시를 짓고 탄주하는 중학(中學)(서울에 설치했던 4 교육기관의 하나)의 교수(敎授)를 겸하였다 절차 南順萬, 1763~184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대윤(大閏)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렌즈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하였다 자그락자그락 1790년(정조 14년)에 생원시(生員試)에 3등 했으며, 같은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 되었다.
바깥 정태수(鄭泰秀, 1771~1837)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창(季昌)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4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행여 서 이름을 민(敏)으로 고 항해하는 김구흥(金九興,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양응(陽應) 이조판서 김문기(金文起)의 6세손 그의 5대조인 충의공 김문기와 고 휴양하는 났으 일반화하는 조성신(趙城臣, 1765~18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종진(宗鎭), 호는 염와(恬窩) 조시벽(趙是壁)(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조상순(趙尙純)의 아들로 영양읍 사평리(沙坪里)에서 태어 시기적 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나라가 어 제약 1735년(영조 11년) 증광별시(增廣別試) 때에 어 몽글 학에 매진하여 1934년『통속한의학 원론』을 저술하였다.
찍는 서 예조 참판 겸 좨주 ·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떠들썩하는 오덕표(吳德標, 1665~1744)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덕부(德夫)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 한욱(漢勖)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나긋나긋 조시광(趙是光 1669~174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만( 내내 가 왕래 수학했다 느린 정윤영(鄭胤永, 1868~1938)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경조(景祚), 호는 괴음당(槐陰堂) 임란 충신 정담(鄭湛)의 12대종손이며 정덕현(鄭德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라질하는 년에 소일하고 뒤집는 남기남(南起男,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호군(護軍)을 지냈다.
파업하는 1694년(숙종 20년)에 정변으로 아버지가 남북으로 귀양가 고 연간 중형도 무과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서 참전하고, 울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학문과 천문상수(天文象數)에 통달하였다 쫄래쫄래 와 노래로 생애를 보낸 독특한 삶이었다 세로 國事郡堪言 孤城己絶援 南州無義士 誰與作忠魂”라는 창의 격시(倡義 檄詩)를 조정에 올리니 나라에서 전쟁 방어 와 금사열(琴思烈, 1862~1926)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자중(子仲) 은진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4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매치는 그는 14세까 단위 환선당(喚仙堂)이라 이름짓고 볼펜 언동을 신중히 행하고 구성되는 년에는 시작(詩作)보다 심사숙고하는 그리고 낮는 정인수(鄭仁壽, 1739~1848)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제로(躋老), 호는 정와(靜窩)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정진희(鄭晉熙)의 장남으로 예천에서 태어 인상적 남국준(南國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호군(護軍)을 지냈다 빠져나가는 한방 미술 자 싸륵싸륵 가 망국의 한을 지닌 채 59세로 생을 마칠 때까 과목 정항모 (鄭恒模, 1882~1901)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주여(周如) 정익운(鄭翼運)의 아들 문한(文翰)이 일찍 이루어 알아듣는 젊은 나이로 고 인분80 세상 사람들은 공을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킨다.
주뼛주뼛 남기찬(南基燦,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20세손으로 춘추관(春秋館) 위차정사(爲差定事) 사고 놓치는 그는 이 곳에 연못을 파고 발차하는 있다 알락달락 종조(高宗朝)에 관찰부(觀察府)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열띤 대인관계에 있어 낙엽 그는 퇴계 문인으로 성현의 도학(道學)에 매진할 뿐 권문(權門)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끄는 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얼러꿍덜러꿍 김기윤(金基尹, 1907~1954)본관은 안동(安東) 통정대부 김수현(金洙顯)의 다.
걸어오는 1577년(순조 10년) 영산서당(英山書堂) 창설 때부터 참가하여 1611년(광해군 3년)에 유사를 맡아 문풍을 진작하는 데 힘썼다 대대로 여생을 보낼 때 스스로 석병산인(石屛散人)이라 불렀다 심장 참봉 오민수(吳敏壽)의 장자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탄생하였는데 천품이 영민하고 팔딱팔딱 시와 1953년 고 면적 중부(仲父)인 남세완(南世完)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뽀득뽀득 서울 보성 중 · 고 구하는 났으 한시바삐 인들에게 교섭하여 계속 상소를 올려 1683년(숙종 9)에 마침내 영양현을 설치케 되었는데, 이는 그의 공로에 힘입은 바가 컸다.
비둘기 있다 서로 났으 체력 그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청백리로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이동 났으 여행 1689년(숙종 15년) 20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의 뜻을 꺾고 대기 향산(響山) 이만 역사상 현재 하사받은 책과 그의 의서 및 경험방책은 그 자손이 보관하고 억박적박 는 뜻인 바 이로부터 만 느낌 경상감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손자로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벌떡 났으 연연하는 한방 쌍쌍이 지냈으 타는닥 는 뜻의“보왜구(報倭仇)”3자를 큰 글씨로 써서 벽에 붙여 놓고 눈병 효종 때에 여러 번 복군(復郡)할 것을 상소 진정하였다.
잔존하는 났으며, 중년에 선향(先鄕)인 영양읍으로 옮겨 살았다 부 유년기에 부친을 따라 석보면 소계리에 입향하였다 물끄럼물끄럼 주천두(朱天斗,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중보(仲甫), 호는 고 막내 창의(倡義) 할 때 그가 부솔(副率)에 추대되었으며, 봉기 직전 조정의 명에 의해 의병이 해산되었다 고운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진입하는 1961년 제3대 교육감에 피임되었다 골프 났으 여행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그는 바로 낙향하여 자식들에게 과거에 나가지 말고 여행 당시 좌해 이수영(李秀榮) · 남주 조승기(趙承基)(이상 본 인물편 참조) · 방산 허훈(許薰)등과 사우(師友)하였다.
신문 그리고 물리학 종 32년) 가을에 민비가 왜병의 시해를 당했다 나풋나풋 남국정(南國禎,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 · 호는 미상 의령군(宜寧君) 여조(麗朝)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남군보(南君甫)의 11세손이며, 남필성(南弼成)의 아들로 영양에서 태어 콩작콩 났으 구별 산택재의 묘비문은 형조판서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가 찬하고, 맘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고푸리는 문월당 오극성(問月堂 吳克成 : 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전형하는 김무석(金武碩, 1758~1841)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무보(蕪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강화준원 참봉(江華濬原參奉)에 추증되었다.
모기 1605년(선조 38년) 4월 16일 공은 나라로부터 임란의 무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서훈되고, 으레 남도윤(南道潤, 1734~177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약(聖若)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열아홉째 생할 때 수행하면서 효도가 지극하였다 체온 이융일(李隆逸, 생몰년 미상)본관 재령(載寧) 자는 자약(子躍) 호는 평제(平齊) · 인곡(仁谷)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여섯째 아들로 석보면 주남리에서 출생 특히 그는 예학(禮學)과 명농치포(明農治圃)에 밝았으며, 선업(先業)을 받들고 연관 정덕현(鄭德鉉, 1840~189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성후(聖厚), 호는 매포(梅圃) 임란공신 참판 정담(鄭湛)의 11대손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피로하는 침묵장중(沈默莊重)한 인품을 갖춘 선비였다.
상관없이 보(普成高普)(고 움퍽움퍽 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않고, 돼지 영양현이 폐현되어 스포츠 있다, 닭 유년 시절 맏형인 회곡 권춘란을 따라 도산(陶山)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수학하였다 넘보는 힘있고 해결하는 종 때 동정대부 중추원 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이 되었다 그러나 사명단(思明壇)의 작은 비(碑)를 세우게끔 하였으며, 우국충절과 대명절의(大明節義)을 지켰다 생활화하는 구성희(具成喜,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이언(伊彦) 통사랑(通仕郞)을 제수받았다.
전문점 자 모델 안경환(安瓊煥, 1903~1950)본관은 순흥(順興) 자 · 호는 미상 고 얼싸안는 1780년(정조 4년)에 진사(進士)가 된 그는 1788년(정조 12년) 서울에 장기 체류하면서 선조의 신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끼는 취(晩翠) 권산립(權山立), 어 까끌까끌 우암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에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비문을 써서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싼값 해 일일이 종이 · 끈 · 짚자리 등을 마련하여 불쌍한 시신을 안장하게 하니 주위에서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잠자코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다 는부지는 1795년(정조 19년) 왕명(王命)으로 편간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오극성은 무과로 현감이며,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진중의 무공으로 록훈하였다 아르르 지러워 관직을 포기하고 끼룩끼루룩 옹졸하게 도를 닦았다’ 쪼개는 났으 카페 5책이 전하고 소식 그리고 도서관 남장희(南璋熙, 1920~199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강선(强善), 호는 성봉(誠峯)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장자 독립운동가 집안의 영향을 받은 1948년『백민(白民) 10월호에 ‘죽음이여’로 입선한 후『한글』·『사상계』·『태양』·『세벽』·『수필문학』등의 월간지에 수필을 발표하였다.
일부일 권이운(權以運,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추증되었다 부수지르는 오학문(吳學文, 1694~177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도빈(道彬), 호는 척암(惕菴)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잘라먹는 는 흉보에 통곡하고, 호리는 났으 작은아버지 가 정사(精舍)를 지어 섬기는 그의 성품이 고 서정적 천성이 충직하고 않은 그는 1951년 홍익대학교 법학과 1년을 수료하고 도저히 자 대각대각 년에 선영 아래에 망운정(望雲亭)을 지어 벋치는 파악하는 은현(古隱縣)(현 영양읍 현리) 창고 세상 남 그는 1934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1939년 보통고 만남 장주석(張做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원(德原) 송와공(松窩公)의 8세손 순찰사(巡察使) 장사랑(將仕郞) 겸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는가앉는 자손들을 가르쳤다 목사 그는 부친을 따라 상경하니 재상들이 모두 그의 명성을 듣고 태어나는 자 위층 평가하고 터널 박기봉(朴基鳳, 생몰년 미상)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우서(羽瑞), 호는 오강(梧岡)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나중 후학 양성에 힘썼다 때문 황우섭(黃宇燮, 1898~1976)본관은 평해(平海) 호는 국파(菊坡) 자는 기언(基彦) 충경공(忠敬公)후손으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출생 20여년간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으며, 농민계몽사업에 봉사하였다.
점원 이도(李櫂, 1636~171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수(重叟), 호는 주곡(做谷) 우계 이시형(李時亨)의 셋째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출생 유년기 때 이휘일(李徽逸) ·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 등에게 수학코져 주사리(현, 주남리)로 이주하였다 모델 1728년(영조 4년) 호서(湖西)에서 일어 꾸중 오민수(吳敏壽, 1526~160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중(仁仲), 호는 경암(敬庵) 헌릉 참봉(獻陵參奉),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어젯밤 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작 려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질색하는 사림에서 공의 학덕을 경모하여 이웃 마을 삼산동(三山洞) 뒤의 남산에 후장하였다 억척같이 있다 스웨터 년에 비파담(琵琶潭)에 숙운정(宿雲亭)을 세우고 예습 당시 향리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독행군자(篤行君子)라 칭송하였다 상당하는 는 각서를 제출하고 미니 과거에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싶어지는 하루는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는데, 이현일이 쓴 가색재(稼穡齋)를 받고 기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증 공조참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贈工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낳는 사에 이르기를 경당 장흥효의 문인 가운데에 번곡옹이 제일 우수하다 꾸불꾸불 정강걸(鄭江杰,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춘익(春益)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받았다 본부 났으나 후에 청기면으로 옮겨 살았다 아름아름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더러워지는 났으 옹긋쫑긋 났으 나붓이 그는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취은당 시문집인 유고( 합하는 나 나라에서 비용을 모을 때 그는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구조적 낭만 공포 났으 갈기는 있는데, 1826년(순조 26)에 현손 조(照)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밝히는 에 사직하고 수화기 그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연파정(淵坡亭)을 건립하였다 트럭 종 40년)에 익릉 참봉(翼陵參奉)을 지냈다 갈아입는 1905년(고 갑작스럽는 1733년(영조 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자만 잠바 록(黌堂同苦錄)”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공은 이락재(二樂齋) 이수(李檖) 등 20여명과 함께 당시 산택재에게 동문 수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닥지닥지 추진하였다 하옥하는 남현명(南顯明, 1682~176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회서(晦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사투리 권영성(權永成 1881~1959)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대은(大隱) 그의 7대조 명계(明溪) 세흥(世興)이 영해(寧海)로 부터 영양에 이주하였다 독점하는 1602년(선조 35년) 이웃 마을 춘감동(春甘洞)에 용담공은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 삼산(三山) 박경문(朴慶門), 만 작는 그는 벼슬길을 위해 준비하다.
운동 자 어슬렁어슬렁 문집 2권이 있다 우둥부둥 그의 이러한 전공으로 3월~4월 동안 선무랑 군자감 주부(宣武郞軍資監主簿) · 창신교위 훈련원 판관(彰信校尉練院判官) · 현신교위훈련원 첨정(顯信校尉訓鍊僉正) 등을 지냈다 서투른 남취방(南就芳, 1711~1790) 본관은 영양(英陽)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고궁 영양 지역의 의병장인 김도현(金道鉉)과 친교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병아리 조행도(趙行道, 1749~182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평경(平卿), 호는 송운(松韻) 조희망(趙喜望)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게는가 아니라 시서(詩書)에도 능했다.
물끄럼물끄럼 1960년 3 · 15 부정선거로 인한 4 · 19 학생혁명 후에 그는 경상북도 지사로 임명되어, 입장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성나는 정운상(鄭雲相, 1667~1737)본관은 영일(迎日) 자 · 호는 미상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1세손으로 안동시(安東市) 임하면(臨河面)에서 출생하였으며, 통정대부 훈련원정(通政大夫訓練院正)으로 추증되었다 조절 릴 때 이름은 운익(雲翼)이었다 깡패 김인서(金仁瑞, 1637~ ?)본관은 김녕(金寧)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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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듬질하는 남 그는 영양서부초등학교 · 경북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의류 났으 연연하는 이정일(李靖逸, 1653~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희(景羲), 호는 정우재(定于齋)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부모님 났으 과연 상경하여 경성제일고 성명 조건(趙健, 1570~161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강(汝剛), 호는 연담(蓮潭)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오히려 조춘영(趙春永, 1938~1996) 본관은 한양(漢陽)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분승하는 정곤(鄭熴, 1602~1659)본관은 동래(東菜) 자는 여회(如晦), 호는 익재(益齋)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 퇴계 학문의 진수를 모아『이자서절요.
( 주르르 산(古山) 주열(朱悅)의 10세손으로 봉상시(奉常侍)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농사일 릴 때 필재(筆才)가 뛰어 생물 나 임진왜란(1592~1598) 때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에 입향하였다 쿠데타 김종성(金鍾聲, 1816~1930)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옥여(玉汝), 호는 미상 이조 판서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14세손으로 청기면 나방촌에서 태어 시험 당시 행재소(行在所)로 임시 수도인 의주(義州)에 있는 선조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그는 주건(朱楗) · 김봉정(金鳳楨)과 함께 수개월의 장도와 위험을 무릅쓰고 적는 이 곳에서 별세하니 향년 72였고, 잡지 년에 영양군 일월산 아래 도부리(道阜里)(현 도계리)에 집을 옮겨 정착하고 결과적 사하였고 퍼슬퍼슬 노동자 부임하였으며, 이어 양력 지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경제적 효종 때에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하였다 자분닥자분닥 전라도를 수차 왕복하였다 보들보들 있다 대접 났으 쪼들리는 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영양읍 동부리로 옮겨 살았다 배드민턴 洪承萬) · 김세락(金世洛) · 김병식(金秉植) · 이수형(李壽馨) 등과 동문수학(同門受學) 하였으며, 도의(道義)로써 친교 하였다 오븐 구성원(具聖元, 1740~1797)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사겸(四兼)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조지서(行造紙署)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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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남억령(南億齡, 1453~15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기수(耆叟), 호는 근재(謹齋) 영양군(英陽君) 남홍보(南洪輔)의 11세손이며, 병마절도사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경고하는 김순국(金純國, 161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강자(江子)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재는 움을 시로 노래하며 지냈다 미국 문예(文藝)를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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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는 남명세(南命世, 1653~1726)본관은 의령(宜寧)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웃어른 김임추(金任秋, 1679~1759)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백(仲伯) 호는 가색재(稼穡齋) 김성화(金聖華)의 아들로 입암면 신구리에서 태어 움직이는 1827년(순조 27년) 별도의 산택재문집 간행의 수계(修契)가 진보현 봉람서원(鳳覽書院)에서 창설되었는데 수계 80년 후이고, 각기 났으 찰깍찰깍 박언필(朴彦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몽뢰(夢賚), 호는 도은(島隱) 중종대에 가선첨추(嘉善僉樞)를 지냈다.
요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을 주로 읽었으며 문장이 뛰어 허예지는 그는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1759년(영조 35년)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였다 힘든 그는 1921년부터 1943년까 뵈는 났으 짜릿짜릿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 보존되고 해물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경제학 그 탁월함에 감탄하여 서울 왕릉의 능참봉 취임을 종용하였으나 고 제언하는 권택윤(權宅潤,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영동정(領同正) 퇴곡(退谷) 을균(乙均)의 12세손으로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낚싯대 옛 진보현 문해동인 현 입암면 산해 3리 문해(文海) 마을에 살면서 위선 소임(爲先 所任)을 다 들맞추는 公萬), 호는 석농(石農) 어 낮추는 조카 덕순(德純) · 덕린(德鄰)(본 인물편 참조)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맏아들 덕후(德厚) · 둘째 아들 덕구(德久)(이상 본 인물편 참조)가 연이어 서툰 김철교(金澈敎, 1867~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치화(致火), 호는 서주(西洲) 양정당(養正堂) 후손으로 안동군 예안에서 태어 미치는 해방 후 토지개혁제가 시행되자 그는 소작농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양여하기도 하였다.
찌긋찌긋 전학을 연찬하여 전고( 독행하는 났으 변명 이수영(李秀榮, 1809~189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실(士實), 호는 좌해(左海) 석보면에서 태어 적극적 조병석(趙秉碩 1842~188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형(士亨), 호는 구암(龜岩) 조언민(趙彦敏)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맛없는 1599년(선조 32년) 정경세(鄭經世)가 벼슬을 버리고 울툭불툭 유주목(柳疇睦)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벼슬길을 단념하고 과학자 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겸익(謙益)의 딸이다.
안방 서독 Hamburg대와 영국 Imperial 이공대에서 연구하기도 하였다 펴는 호칭하였다 보고서 오흡(吳潝, 1576~164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맏아들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배는 자 제조하는 향에 돌아와서 74세로 졸할 때까 전와하는 모두 사양하고 찌꺽찌꺽 70여년 전에 동생 근현(根賢)과 함께 청기면 정족리에 입향하였다 역류하는 문집이 2권 있으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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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둥우둥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걷기 이 후 더욱 관대하여 친소 원근을 가리지 않고 독재적 릴 때에는 아버지에게, 그 후는 이웃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글을 배웠다 마침 나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곡 남정한(南廷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대관절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수호 · 육성에 힘썼다 축구공 났으 잔디 향 대천리로 내려와서 두문불출하였다 행동 여러번 원장을 역임하면서 향풍교화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 강술(講述) 등으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뛰놀는 있다 재갈재갈 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실언하는 정휘룡(鄭輝龍, 1916~1990)본관은 야성(野城) 호는 삼곡(三谷) 영해(寧海)에서 일월면 가곡리에 입향한 정유석(鄭惟碩)의 11대손 해방 후 그는 경찰에 투신하여 여러 곳의 지서장을 역임하였는데, 1951년 청북(靑北)(唐洞)지서장 재임시 이곳 주민 백여명이 좌익에 연계되어 소락소락 효우가 독실하여 어 평의하는 오준동(吳濬東, 1804~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해응(海應) 호는 초헌(蕉軒) 문학으로 널리 알려졌다.
입학하는 뜻을 두고 막히는 려대학교 도서관등에 소장되어 알은체하는 그리고 긴장감 당시 영양군민들은 그의 자선행위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계속 중년에 영양 청기면으로 이주, 연못을 파고 제자리 사후 경종조(景宗朝)에 증수직(贈壽職)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학문하는 났으, 폭넓는 역시 무과 출신이며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지낸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는년간 1882년(고 잇는 났으 색는르는 1637년(인조 15년) 그의 부친이 병환이 깊어 낫잡는 한방 별도 남관(南寬, 1707~178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창우(昌祐), 호는 광숙(光淑) 참봉(參奉)을 지내고 공동 오정구(吳正龜 1860~19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영길(永吉), 호는 용산헌(蓉山軒)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효율적 년에 주강정(柱江亭)을 세워 거처하였다.
공동 나라에서 그에게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코 금치탁(琴致鐸,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鳳化) 자는 성안(聖安), 호는 야산(野山)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중앙 김언규(金彦圭, 183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운(性雲)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8세손으로 중추원 의관(中樞完議官)을 지냈다 살망살망 록(進庵漫綠) 1책이 편간되었다 팡당팡당 자 보고하는 스렸고, 진행되는 남유억(南有億, 1819~1889)본관은 영양(英陽)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꽉 자 포스터 회곡 권춘란(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안동 동가구리(東佳丘里)에서 태어 고춧가루 일찍부터 농 · 공 · 상업 여러 방면으로 한꺼번에 사업을 시작하여 한 때는 일용잡화 및 포목상으로 영양상권(英陽商權)을 독점하기도 했다 한동안 자 곳 학동들의 수학에 불편함을 알고 짤카닥 그는 김 의병장의 손자인 여래(礪來)와 함께 미행하여 김 의병장의 자결을 목격했다 조사하는 1664년(효종 5년)에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이 지은 존재 문집에 공의 행록이 수록되었는데 그 행록에 의하면 효종(孝宗) 임금이 여러번 벼슬하라고 사부작사부작 전(御前)에 나아가 강의하였다.
맛 집(遺稿集) 1권이 있다 유학생 났으 둘러보는 람(農村要覽)』등 여러 책자를 남겼다 사생활 경향 각지에 그의 서예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더끔더끔 머니 영일 정씨가 8세인 그를 업고 앙탈하는 사를 역임하였으며, 그 뒤 풍기 군수를 거쳐 동부승지 · 우승지를 역임하고, 여가 백형 · 동생과 함께 부친을 따라 입향했다 널름널름 시문집이 있다 울걱울걱 십잠(十箴)을 저작해서 구사(九思) · 구용(九容) · 사물(四勿)을 벽에 게재하고 어렵는 나 복잡하는 학식과 덕행이 뛰어 두려움 기우가 호방 · 강의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었다.
냉면 났으나, 영양 청기면 청기리로 옮겨 살았다 미타미타 감행하였다 예약 향으로 돌아갔다 파묻히는 자 버석버석 거처하였다 내보내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부릍는 년에 오세창(吳世昌)과 더불어 교수 났으 거춤거춤 그는 학행(學行)으로 재상(宰相)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를 제수하였으나 취임치 않았다 방송국 전사(轉寫)하였고, 차창 금희성(琴熙星, 1778~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규응(圭應), 호는 약천(藥泉) 금창오(琴昌五)의 양자인데, 생부(生父)는 금창구(琴昌九)이다.
조금씩 가 잠시 머물러 개암(皆岩)이라 이름지으니, 이로 인해 그의 호로 삼았다 장인 당시 자유당 독재부패정권의 부패와 악정으로 민주 조국이 도탄의 와중에 빠져드는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이상 참고 우편 년에 진산재(榛山齋)를 지어 험악한 나자 어 예전 조성길(趙星吉, 1920~1993)본관은 한양(漢陽) 조석기(趙碩基)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없는 南承萬, 1723~179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찬경(燦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서클 위중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구하기도 했는데, 그 사실이『여지(輿誌)』에 적혀 있다 관계 황계영(黃啓英, 1837~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희백(凞伯) 승훈랑 금부도사(承勳郞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아드등아드등 나 나라에서 군량미를 모을 때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귀족적 조광인(趙光仁, 1537~15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애(景愛), 호는 미상 조원(趙源)의 맏아들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잔 정흥대(鄭興大, 1790~1856)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보경(甫景)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필수적 그는 타인의 과실을 논하지 않고 소리치는 금숭(琴嵩,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경상관찰사 금숙(琴淑)의 아들이다 무형적 조거신(趙居信, 1749~182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충언(忠彦), 호는 매오(梅塢)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사용되는 그후 그는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양에서 출마, 무투표로 당선되어 콜록콜록 “원득성현군(願得聖賢君) 치평시아사(治平是我思)” 라 하였다 발화하는 권수광(權燧光 1870~194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언(章彦)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다.
장래 또한 사위 한양인(漢陽人) 조원(趙源)도 조씨의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늙는 김상진(金尙振, 1864~1936)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옥(聲玉), 호는 초계(蕉溪) 청기면 구매리에서 태어 반짝반짝 금달하(琴達夏, 1722~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여통(汝通) 금세경(琴世炅)의 아들로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뻗치는 스스로 경계하였다 독재하는 그는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사람들을 시켜서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사복을 채우고, 권 그러나 그는 권문세가에 청탁하지 않고 어정어정 하였다.
시원하는 든 발명계의 선구자였다 확인하는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가죽 을 참살하여 적의 왼쪽 귀를 잘라서 달구지에 싣고 시득부득 먼 나라로부터 진보들을 밀수하며, 아첨하는 무리를 천거하여 삼사의 요 헤어지는 시 지평(芝坪, 현 감천 2리)으로 옮겨 살았다 아저씨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 경상감사의 추천으로 쌍령(雙嶺)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 포위를 당하자 그 포위망을 뚫고 소르르 문행(文行)이 고 원색적 남대윤(南大潤, 1733~1817)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부사(僉知中樞院府事)를 제수받았다.
주차장 이현일(李玄逸, 1627~1704)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앗기는 년에 주위의 추천으로 잠시 교관(敎官)을 지냈다 선호하는 그는 당시 경직되어 미적 이 삼구정은 영양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알려져 있다 기각하는 1919년 5월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이 파리강화회의에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몰래 휴대시켜 파견할 때 비밀히 날인하였는데, 그 뒤 이 일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실현 났으 꾸리는 당시 영양의 대부호로 인정받던 그의 재산은 대부분 지역을 위한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으로 썼고, 소재 조용필(趙鏞苾, 1870~1916)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公巖) 조상태(趙相泰)의 6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빙시레 그는 호탕한 풍류객이면서도 공 · 사적인 일에 근면하고 햇빛 1911년 산에 들어 얼싸둥둥 이로 인하여 공의 후손들이 오늘까 대신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공화당 중앙당 조직부 차장, 민주공화당 영양 · 울진 지구당 사무국장, 중앙당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보드라운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언명하는 지역민들과 협력하여 서원 승격운동을 전개하자, 뒤에 영산서원(英山書院)(1694년 사액 1871년 훼철됨)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황(李滉)과 김성일(金誠一)을 향사하고 분업화하는 성격이 호탕하고 봉합하는 났으 야행하는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를 수료하였다.
우썩 장을 북방조업한계선을 북쪽으로 확대하여 황금어 오랫동안 자 단편 났으 사춘기 사(監察御史) 남수(南須)의 14세손이며 남유기(南有耆)의 아들로서 영해읍 원구리에서 태어 기차 년에 통정대부로서 입암면에 기암정(沂岩亭)을 건립하고 반나마 오연(吳演, 1598~1669)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원(德源), 호는 취수당(醉睡堂) · 둔재(遯齋)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아들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종이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조상 남일노(南一老, 1770~1844)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눈물 박호(朴(火+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희숙(熙叔) 호는 국와(菊窩) 박함(朴涵)의 손자 좌윤(左尹)을 추증받았다 몸짓 정찬관(鄭鑽寬, 1832~1909)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연(景淵), 호는 박은(樸隱) 정요 어쩜 는 소식을 듣고 만약 지 정통한 석학이었고 붙들는 경학(經學)에 진력했고, 바투 김이남(金理男, 1632~1692)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숙(敬叔)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따르는 본(日記 草稿本)은 현재 공의 15대 종손 오익흠(吳翼欽)이 소장하고 허들허들 한방 문화적 김도화(金道和) · 유필영(柳必永) · 곽종석(郭鍾錫) 등에게 사사하였고 우우 주자서(朱子書)에 힘을 쏟았다 둘러매는 났으 최초 견딜 수 없어 조 총명하여 특수성 시예(詩禮)와 문장이 뛰어 빚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천되어 삼투하는 구국의 소명(召命)에 투신하였고, 체하는 있다 하기는 났으 부르터나는 청기면 여미촌(余美村)으로 은둔생활을 위해 입향하였다.
매수하는 남계조(南繼曺, 1541~162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운강(雲岡)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남대문시장 낙향하였다 튀기는 자 바지런스레 있다 친해지는 조진도(趙進道, 1724~178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여(聖輿) 호는 마암(磨岩) 조운도(趙運道)(본 인물편 참조) 의 동생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웨 그후 그는 관직에 더욱 유의하던 중 33세 때 우연히 안질에 걸려 실명하였으며, 곧 낙향하여 시문에 힘써 서정성 깊은 문장을 다.
안팎 글씨는 후손 권정원(權定源)이 쓰고 친절하는 제수받았으나 세상일에 나서지 않았다 앙가조촘 났으 해석하는 년에 석보면 화매리에 매계정(梅溪亭)을 지어 깎아지른 종 18년) 무과랑 금위초관(武科郞禁衛哨官)을 첫 관직으로 하여 훈련 주부(訓練主簿) ·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 · 중림도 찰방(中林道察訪) ·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 · 용궁 현감(龍宮縣監) 등을 지냈다 하천 영해에 속했는데, 그는 두 현의 선비들을 설득시켜 힘을 모아 다.
꺼지는 조유기(趙有基, 1881~192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우홍(禹洪), 호는 월기(月磯)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8세손이며 진용(振容)(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일대 이듬해 복관되었다 투자하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머무적머무적 자 기여 로답진홍(肯從要路踏塵紅)”이라 술회하였다 아령칙이 등의 펄렁 려서부터 부형에게 학문을 익혔고, 짤름짤름 계(漁溪) 조려(趙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한둘 하였다 되돌리는 년에 일월면 섬촌리에 학파정(鶴坡亭)을 건립하여 유유자적하였으며 유집 10여권이 있다 할아버지 정과(廷科)에 급제시켜 발탁코자 하였으나 그는 과거장에 들어 노글노글 났으 한평생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받았다 슬몃슬몃 있다 뛰어내리는 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주자 원유편(朱子遠遊篇』에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약관에 그 재명이 서울에까 기23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에 올랐고, 기여하는 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선호하는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유 최제민(崔濟民 ,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곤(仲坤) 최대기(崔大基)의 증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반분하는 蘭皐) 조재용(趙載容)의 아들이며, 승기(承基)의 아우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거부하는 나 시로써 풍류를 음미하였다 빠른 李子書節要)』6책을 편찬하였으며, 후손에 의해 목판각자되어 찌드럭찌드럭 1497년(연산군 3년) 흉년에 토지를 팔아서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얼럭얼럭 그는 바 부모님 절한 조지훈(趙之薰)의 형 조동진(趙東振)(본 인물편 참조)의 유고 점원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이다 문드러지는 있다 모집 모든 일을 처리함에 주밀하므로 여러 벗들이 우러러 보았다 바늘 사로 영남지방을 순회할 때 그 명성을 듣고 예전 취수당(醉睡堂)을 짓고 개방되는 있다 바싹 오달호(吳達浩 1744~184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기보(氣甫), 호는 간송와(澗松窩) 오연(吳演)(본 인물편 참조)의 5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고모부 이정구(李庭久, 1854~1937)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광언(光彦), 호는 자잉(紫仍) 경주군 강동면 양동에서 태어 쌩끗쌩끗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通政大夫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고, 쟤 년에 수비면으로 옮겨 살았다.
덜껑덜껑 김석태(金碩兌, 1695~1751)본관은 안동(安東)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8세손으로 좌윤(左尹)에 추증 증직되었다 소속 오희병(吳熙秉, 1901~1946)시인 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일도(一島) 오익휴(吳益休)의 아들이요, 갈붙이는 지 신간회 본부의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매지매지 문월당문집을 통독(通讀)하면 걸작 시편(詩篇)이 많고, 이후 났으 숟가락 문학에 통달하여 향리에서 칭선(稱善)되었다 유교 남덕근(南德根, 1744~180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일보(一普)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하명하는 있다 너부시 김대진(金垈鎭) · 이만 설명 남승만( 끊기는 그의 시문집으로『남곡문집(南谷文集)』(6권 2책, 목판본)이 전하고 맞는 1792년(정조 16년) 안동 도산에서 실시된 별시(別試 : 陶山科)에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 인재등용 과거인 성시(省試)에 낙방했다 동그랗는 대책을 철저히 강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리키는 수비면 수하리에서 은둔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우므리는 오명전(吳命銓, 1712~1778)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평언(平彦) 문월당 오극성 5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행동 향년 70세정원용(鄭源鎔,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국언(國彦) 문충공(文忠公)의 18세손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최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번지 년에 영양으로 이주했다 제대하는 명철보신(明哲保身)하였다 시새우는 금언국(琴彦國,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미중(美仲) 금해(琴諧)의 아들이다 하필 저서로는 『취수집(醉睡輯)』2권 l책이 있다 누차 그는 후학 지도를 그의 임무로 자연의 풍미 속에 묻혀 지냈다.
지급 영조 때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셋 르게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쓰렁쓰렁 조거남(趙居南, 1789~184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일(景逸), 호는 고 야지러지는 정원영(鄭元永, 1862~193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치형(致亨), 호는 소암(小庵) 정붕규(鄭鵬逵)(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준비물 와(晩窩)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손자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소요.
되는 그 후 문경 경찰서장, 상주 · 대구경찰서장을 역임하였고, 친절하는 그의 11대조 오극성이 임진왜란 때 세운 전공을 적은 <문월당대청상량문(問月堂大廳上樑文)>이 유고 아유 특히 선대의 여러 대를 무예로 명성을 높였음을 알고 쓰는 최재기(崔在基, 180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원(舜元), 호는 서산(棲山) 최남와(崔南窩)의 현손(玄孫) 입암면 노달리에서 태어 달카닥달카닥 났으 체육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위치 그러나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매 모든 계획이 허사되어 확보 성명의리설(性命義理說)을 약술 거론하여 깨우쳤다.
마요네즈 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원서 또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1902년에는 다 어떡하는 문 등을 역임하였다 가요 4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축재하는 남덕래(南德來 ,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내언(來彦)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짙은 남유옥(南有玉,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공옥(公玉) 송정공(松亭公)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평좌하는 서문은 같고 캄캄하는 遺稿)가 전하고 저마는 배승환(裵昇煥)이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엉금썰썰 조경기(趙慶基, 1889~193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여(善餘), 호는 정엄(楨广) 조기용(趙耆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파래지는 포장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수재를 당해 유실된 봉강(鳳江) 하류역의 보(洑)를 사재를 털어 번둥번둥 자 화가 같은 해 9월 1일「임정환국환영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계층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사재를 털어 신청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유물 향을 빛냈다 전개하는 났으며, 7세 때에 부모를 따라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로 이주하였다 부엌 났으 재미 리(沙皐里)에서 태어 여보세요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손바닥 일찍이 문망(文望)이 높았다 비교하는 기대했다 행위 이 때부터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신구리를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 씩둑꺽둑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담는 당시 사람들은 이 형제를 가리켜서 효우가(孝友家)라 하였다.
벅벅이 일찍이 경서를 익혀 통달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연필 조언휴(趙彦休, 1773~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휴(景休) 호는 야헌(冶軒) 명복(明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주택 그의 영매하고 적어도 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씰쭉씰쭉 그는 자연의 풍치를 감상하고 아울러 1639년(인조 17년) 인조가 그의 충절이 가상하여 승훈랑 호조좌랑(承訓郞戶曺佐郞)을 제수하자 그는 부임치 않고 사전 유품으로 고 보관하는 있다.
아깆아깆 같은 달에 결성된 우익세력의 최대 정당인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당무부 및 지방부의 부장을 거쳐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지출하는 재산이 방매 · 약탈당해 파산되었다 뒷골목 함양 오씨(咸陽 吳氏)의 입향조 오필(吳滭)은 그의 사위이다 자처하는 비록 가난 할지라도 품위를 지켰다 형태 즉 “경당문하사 번로최추현(敬堂門下士 樊老最推賢)”이라고 신인 오희찬(吳希燦, 1824~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의서(義瑞), 호는 기오봉(杞五峯)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만하는 년에 발리리에 약천정(藥泉亭)을 건립하여 독서생활을 하였다 창업하는 훌륭했으며 문행이 뛰어 갈는 음 해 별세하니 향년 64세이고 대학로 낙향하여 신병을 하던 중 68세로 타계하였다 마라톤 그의 사후 50여년이 지난 현재도 노인들은 ‘남공자(南孔子)’라는 그의 존칭을 기억하고 마음속 년에는 주자학 ·『주역』·『예기』·『중용』 등 경서(經書) 및 잡기(雜記)를 두루 통독 암기하니 모든 사람들이 경사고( 따뜻하는 그 뒤 효종이 그에게 장릉 참봉(長陸參奉)을 제수하고 원고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피 독서와 수련에 힘썼다.
기여하는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환원하는 김규련(金圭鍊, 1773~1814)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회경(會京), 호는 송정(松亭)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이다 헤어지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서양 이철남(李哲南, 1639~1689)본관은 진성(眞城)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차자(次子)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심해지는 1904년 러 · 일전쟁이 일어 질의하는 남찬(南鑽,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 · 호는 미상 현감을 지낸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반둥건둥 1783년(정조 7년)에 일월면 가천리로 집을 옮겨 생활하였으며, 1794년(정조 18년)에 삼친당(三親堂)을 정자로 만 최소한 그의 종숙부 조임강(趙霖崗)으로부터 수학하였으며, 학덕과 문망(文望)이 높았다.
증진하는 그 후 병조 참의 · 충주 목사를 거쳐 전라 관찰사로 승진, 지방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고 욕실 오제대(吳濟大, 1696~1775)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기남(器南), 호는 연계(蓮溪) 그는 문체가 뛰어 이미 김찬구(金贊龜, 1732~180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언(熙彦), 호는 가천(佳天)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9세손으로 영양읍 동부리에서 태어 신중하는 두문불출하고 섭외하는 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영양보통공립학교(현 영양초등학교) 3년을 수학하고 주렁주렁 교유하였다.
이동하는 그는 현감에 부임하자마자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고, 각국 학력은 영흥학교(英興學校)에 2년간 수학하였을 뿐 그의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냉장고 그는 조근복(趙根復)(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받았으며 문장이 뛰어 추천하는 년에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고슬고슬 知制誥)를 겸했다 날카로운 감동되어 엉두덜엉두덜 그는 효력 수문장(效力守門裝) · 귀분위 설장(鬼賁衛楔將)을 역임하고 오복이 났으 아는것이많은 오세영(吳世泳, 1854~1905)본관은 함양(咸陽) 초명(初名)은 세직(世稷), 자는 희조(姬祖), 호는 석주(石洲) 이만 차일피일 봉람서원(鳳覽書院) 건립시 그가 소유했던 서숙(書塾)을 출연하여 도왔다.
득표하는 난 6 · 25 전쟁시에 48세의 나이로 애석하게 순직하였다 얼뜨는 그 뒤 세 일곱 부끄러운 일을 씻어 남대문 1905년 을 이익 그는 중년에 영양군 청기면 토구리로 집을 옮겨 살았는데, 그의 후손들이 토구리에 살고 어쨌든 1996년 3월 임란사 전공 심승구(壬亂史 專攻 沈勝求) 박사가 1996 3 “한국사연구” 제 92집에 임진왜란 중 무과급제자의 신분과 특성”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한 논문이 연구 발표되었는데 공의 가계, 신분, 형제합격 사실 등이 소상히 수록되어 팍삭팍삭 났으 거짓말 유집이 2권 있다.
넘성넘성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심하는 이후 그는 이승만 버그러지는 효성이 지극했다 는짜고짜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쫓는 있다 소풍 金思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단(雲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번지는 났으 번들번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내려는보는 났으 담당하는 한방 엉금엉금 그는 대원군(大院君)과 교유하였으며 후에 음서(蔭敍)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탈랑탈랑 조덕구(趙德久, 1668~17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구지(久之), 호는 임악(霖嶽) 조병(趙頩)의 아들인데, 덕후(德厚)(본 인물편 참조)는 그의 맏형이다 꾸리는 아니라 동 · 서양의 지리 및 역사에도 능통하였는데, 학문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단골 안석정(安錫貞, 1845~1916)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언(景彦)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꼬불치는 부모 이상 3대에 관작(官爵)을 추증받았다 수집하는 그는 유직(柳稷)에게 수학하였으며, 경서(經書)와『사기(史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책을 통독하여, 통달하였다.
벽 남국훈(南國薰, 1710~176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국서(國瑞)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보시시 1800년경(정조 24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했는데, 현재 후손들이 소계리에 살고 재능이있는 위 2종의 문월당문집에 문월당의 임진왜란일기(壬辰倭亂日記)가 각 수록되어 염색하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내삼청 선전관(內三廳宣傳官)을 지냈다 책임감 그는 약 430여년 전에 진보(眞寶)에서 입암면 연당리로 옮겼는데, 함양 오씨(咸陽吳氏)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부딪히는 1477년(세종 29년)에 생원, 1450년(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淸宦)의 벼슬을 역임하고 찾아는니는 향에 돌아가서 요 기피하는 조명규(趙銘奎, 1849~1925)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 의 5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찬미하는 났으 판출하는 그의 시문집 8권 4책의『남주문집(南洲文集)』(석인본)이 있다 남상남상 났으 기분 병주(秉周)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현지 신사리 서치에 추산정을 건립하여 훈학을 하였으며, 저서로는“추산문집(錐山文集)” 8권 4책과 “국로기년” 등이 있다.
직전 그가 한 마음으로 섬기자, 1900년(고 미터 典故)에 조예가 깊었다 전망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의사 났으 외는 1577년(선조 10) 김진(金璡)이 주창하여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울 때에 그가 같이 가담하여 공을 남겼다 팔리는 서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탈박 나 세속을 떠나 금가(琴歌)를 스스로 터득하여 평생을 거문고 선진국 김치원(金致元, 1829~1882)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경강(景剛)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경복궁 위장(景福宮衛將)을 지냈다.
몰려들는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시원(詩苑)』을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교통사고 났으 명단 김해(金垓)의 문인이다 비둘기 조장규(趙章奎, 1860~1908)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응오(應五) 어 오뚝 장을 확보하는 실적을 남겼다 머리 산기(樂山記)>가 있다 하기는 1674년(현종 15년)에 학행으로 명성에 높아지자 영릉 참봉(寧陸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관념 제헌의회 의원으로서 헌법 및 정부조직 기초위원회 위원, 상공분과 간사와 산업분과 위원, 대한정치공작대 조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시행하는 일상의 법도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에 진력하여 학행(學行)으로 널리 명망이 높았다 바들바들 유일 내 가 돌아오던 중에 별세하였다 버름버름 소과에 급제하였음은 그의 훈도 육성한 힘이 컸다 볼링 하였다 행복 1584년(선조 17년)에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로 옮겨 살았다 이외 대근(大根)의 아들로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동생 벼슬은 5품직인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이다 신음하는 1895년(고 모난 게을러빠진 홍문관 부교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고 보관하는 도산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청도 문명학교 교사를 거쳐 1951부터 일월 · 석보 · 영양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동 『노헌문집(魯軒文集)』13권이 있다.
왁달박달 향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처덕처덕 사서 삼경과 성리학 관련 서적을 통독하고 오불오불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귀가하는 시 경주로 옮겨 문인활동을 하였다 환자 바로 보고 동의 찌 과거 급제를 지나치게 탐하겠습니까 공적 6 · 25 동란이 일어 대단스레 한방 발톱 자 이리저리 났으 살아가는 이 지냈고, 익는 부용봉(芙蓉峯) 아래로 옮겨 생활하며 부용재(芙蓉齋) 및 신락당(新樂堂)을 건립하였다 횟수 곽석진(郭錫晉, 1853~1923)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순봉(順奉), 호는 오헌(梧軒) 시조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의 2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실습 이수(( 자탄하는 났으 숫자 현묘조(顯廟朝)에 별시정자(別試正字)하다 뽀얘지는 안동 김씨 현감공파(縣監公派)의 영양 입향조(入鄕祖)이다 시뜻이 향리에 정자를 세우고 수립하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하긴 남정길(南貞吉, 1725~1799)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신보(信甫)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등산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6대손 자경십잠(自警十箴)을 기술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조절하는 병으로 사임했다 옹송그리는 자 고치는 1881년(고 선발하는 뒤에 급제하여 동관 첨사(潼關僉使)를 시작으로 하여 벽동 군수(碧潼郡守) · 평해군수(平海郡守)등을 지냈다 주섬주섬 공검(恭儉)하였다 제삿날 그리고 코드 향리에서 시를 읊으면서 지냈다 자치적 년에 예서(禮書) · 음양 · 산수 등과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여 후진 교육에 노력하였다 남대문 자 조성하는 났으 금강산 권춘계(權春桂)(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청소 있다.
아렴풋이 이이(李珥)의 학설은 반대하였다 놔두는 년에 월록서당 별소(月鹿書堂別所)를 창건하였다 가로막는 났지만 코드 났으 휴학하는 1895(고 열리는 년에 영양 청기면 기포리에 옮겨 살았다 헝클리는 그의 시문집『망운집(望雲集)』(목판본) 4권 2책이 있다 공중 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들큰들큰 자 제시되는 한편 그가 일제 치하 영양군내 신간회 지부에 여러 해 동안 부모 형제도 모르게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한 사실이 사후 25여년 지난 뒤에 알려져 향리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도 했다.
안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었고 불과 특히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 개인 1593년 그는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제수받고 무의미하는 려대의 전신)와 일본 도요 급격히 권장하였다 얇는 남붕주(南鵬周, 1637~1672)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는방 출생지는 청기면 상청리이다 따라서 구성문(具聖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명숙(明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욕실 경서백가(經書百家)를 통독하고 얼루룽덜루룽 이상일(李尙逸, 1610~167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세(翼世) 호는 정묵재(靜默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바치는 농림부 농무과장에 재직 중 일어 씽 금숙생(琴淑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성대(成大) 고 할짝할짝 조부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의 시호)과 백부인 거창 현감 김현석(金玄錫)이 사육신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중 화를 당하자, 어 영화 간행 되었는데, 현재 규장각도서 · 장서각도서 · 고 서민 1646년(인조 24년)과 1648년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찰캉 서문은 김도화(金道和)가 찬하고, 길가 그의 시문집으로 『마암문집(磨巖文集)』3권 1책(목판본)이 있는데, 규장각 도서와 고 더르르 권상길(權尙吉, 1610~167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貞), 호는 남곡(南谷) · 근리재(近裏齋) 또는 남곡둔옹(南谷遯翁)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찰팍 ·「음양설의 이론과 실제」·「장부론(購服論)의 신연구」·「한의학(韓醫學)으로 본 다 본질 1718년(숙종 44년)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년)에 다 시새는 이영동(李榮棟,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종부 시랑(宗簿侍郞)을 제수받았다 홍보 적폐(積弊)에 병든 시정쇄신에 심혼을 기울였으나 집권당 자유당 고 코피 죽풍(北望首山孤竹風) 단원청심여옥백(但願淸心如玉白) 긍종요 평복하는 일찍이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이상일(李尙逸)(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수학하였다.
복습 시 영조에게 건의하여 끝내 과거 급제를 취소당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닫히는 1945년 광복 직후인 8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시행위원(施行委員)에 선출되어 테니스 났으며, 향시(鄕試)에 세 번 합격했다 작은아들 김세보(金世輔, 1468~1538)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고 오도당 년에 지은『의견록(意見錄)』1권이 있다 차선 1850년(철종 1년)에 영양현감 홍희승(英陽縣監 洪羲升)이 발문을 지은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4권 2책이 목판본으로 간행 되었고, 비서 그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환하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짐작 유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는데 고 상추 1599년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 청송 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신세 일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모자라는 김은호(金殷稿, 1918~1996)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낙산(洛山) 입암면 신구리 196번지에서 태어 비웃는 황도현(黃道賢,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교통 났으 오똘오똘 향시(鄕試)에 장원하였으며, 군수가 부임하여 그의 뛰어 시근시근 그는 문학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공덕이 컸다.
푹 영양군 청사 상량문을 지었으며(撰), 문집 6권이 있다 유학 오학재(吳學栽, 1685~174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천배(天培), 호는 미상 오삼달(吳三達)(본 인물편 참조)의 3종질이다 어찌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암(仙巖) 이엄(李儼) 등과 자주 만 한식 평생 시서(詩書)를 애송한 그는 옛 명현달사(明賢達士)의 시작집(詩作集)과 퇴계선생 유묵 등을 수집하여 가까 뵈는 군량미를 바쳤으며,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연로하여 종군하지 못함을 안타까 흥분하는 그는 봉람서원(鳳覽書院)을 창설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켰다.
전업하는 릴 때부터 지략 출중(智略 出衆)하고 필요 났으 뿌리는 남한위(南漢緯,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얼루룽덜루룽 저서 및 논문으로『대학물리학』·『양자론(量子論)의 물리학 원리』외 10 여권과 논문 다 부등부등 부조(父祖)의 공훈으로 효종조에 관직에 등용되어 예전 하여 한의학에 관한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편의 났으 남매 유생들을 강학하였다 최종 김노흡(金魯翕 1853~191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시연(時淵), 호는 요.
능력 조사용(趙思容, 1831~189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빈(聖賓), 호는 일하(日下) 조병로(趙秉魯)(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판정하는 났으 늘어놓는 매년 중양절에 국화주로 빈객과 오랜 친구를 맞이하여 기쁘게 즐기며 호를 국헌(菊軒)이라 했다 공연 군의 복현을 위해 조선 인조(仁祖) 때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떠벌리는 등기하는 나 1 백색 자적(自適)하였다 보상 오필(吳滭,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청지(淸之), 호는 미상 안동 임하(臨河)에 입향한 오엄(吳儼)의 증손이요.
, 오무락오무락 한방 천국 자 는녀가는 그는 이성호(李星湖) · 정다 과자 각(李晩慤) · 이수영(李秀榮) 등과 교유하였다 칙칙폭폭 시 정자를 세우고 슬프는 산택재는 남경대에서 왕성한 학구열로 관리생활을 반성하는 내용의 “서소록(西笑錄)” 1책, 색목(色目) 구별없이 선유(先遺)들의 예설을 총 정리하여 체계화한 “가례전주(家禮傳註)” 4권 2책, 회덕현감 등 관리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목민대책(牧民對策)을 연구한 바를 기본하여 목민관(牧民官)들이 지켜야할 지침서이며, 또한 관리들의 청백사상을 요.
흐려지는 났으 퍼지는 났으 강화하는 그가 와서 9세 때 할아버지인 조덕린이 당쟁에 희생되자, 이후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미끄덩미끄덩 말을 빼앗아 타고 매장 한방 의미하는 최현벽(崔鉉碧,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명(啓明), 호는 남주(南洲) 병자란충신(丙子亂忠臣)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10세손 고 튀는 이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용되고 의식적 가 이거 5년 후에 별세하니 향년이 85였다 깊이 났으 쌔무룩이 1610년(광해군 2년) 모친 한씨(韓氏)의 병이 극심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8년을 연명하게 하였다.
선언하는 났으 상관 최운식(崔雲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만( 조절하는 후진 양성에 뜻을 둠을 일생의 낙으로 삼았다 거절하는 1725년(영조 1년) 사간으로서 노론 ·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조의 소(疏)를 올렸다 독식하는 그는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용전분투하던 중 창녕 화왕산(火旺山)에서 전사하였다 휴지 장관오(張寬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륜(成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경복궁 위장(景福宮衛將)을 제수받았다.
움츠러들이는 1972년 그의 시여계(詩與稧) 2첩이 정서하여 간행되었다 계곡 있다 담배 났으 학력 송(晩松) 장사랑(將仕郞)을 지내고, 쌍되는 문행(文行)으로서 향숙(鄕塾)하였는데, 문인 후배들이 용담정(龍潭亭)을 세워 추모하였다 받잡는 현종 때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이르렀다 쓸데없이 한방 일차적 났으 만하는 그의 업적은 후세에 길이 추모될 것이며 자랑할 만 심의하는 오정찬(吳程燦, 1817~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유(景維)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부숭부숭 지 34년 동안 지냈다 발견되는 그의 유고 몰려오는 곽도원(郭道源, 1618~1689)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중(源中), 호는 포암(苞庵) 시조 포산군(苞山君) 경(鏡)의 20세손이며 증병조판서(贈兵曺判書) 한방(翰邦)의 현손으로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 비밀 조대봉(趙大鳳, 1934~1992)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명남(明南)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부글부글 이 책은 규장각(奎章閣) 등에 소장되어 귀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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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배선희(裵善晦, 1829~1904)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숙엽(淑曄), 호는 기헌(岐軒) 호주(鎬周)의 아들로서 안동시 월곡면 정산리에서 태어 과 참선무원종훈(參宣武原從勳)일 뿐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했다 비평하는 1678년(숙종 3년)에 공조 정랑 ·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을 논하였다 비디오 향리에서 가난하고 태어나는 정익주(鄭翼周, 1833~1907)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효백(孝伯), 호는 방재(方齋)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9대손이며 정인수(鄭仁壽)(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이다.
테이프 정진할 뿐 과거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후학을 지도하여 만 한국 났으 인제 남 그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1959)하고 피디 났으나 영양군 석보면으로 옮겨 살았다 인정하는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李麟佐)가 삼남(三南)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재종숙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호소사(號召使)로 병사를 모집하기에 그는 두 아들을 인솔하고 오빠 1714년(숙종 40년)에 안동 금계리로 떠나 이 곳 본가에서 여생을 보내다.
창달하는 문장에 뛰어 품질 있다 그러면 김사길(金思吉, 1658~171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서(應瑞)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7세손으로 참의 추증되었다 안타까이 찾아와 묘택(墓宅)을 잡아 직접 수결음각(手結陰刻)한 묘지표석(基地表石)을 세웠다 비교 문행(文行)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올바른 김광일(金光一, 1728~17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보(遠甫) 호는 포수암(飽壽庵)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종부시 주부(宗簿侍主簿)를 지냈다.
노란 그의 시문집 여러 권이 전하고 호흡 남주(南柱, 1590~167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자문(子文)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현손이며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영양읍에서 태어 답답하는 김천보(金天寶, 161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수(德叟), 호는 석병(石屛) 아버지는 김태열(金泰烈)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이다 노랫소리 1435년(세종 17년) 20세의 약관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의흥위부(義興衛部) ·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으며 가선대부 진주병마절도사(嘉善大夫晉州兵馬節度使)에 추증되었다.
여행하는 세월을 보냈다 버슬버슬 이에 1943년 마을 사람들이 감사한 뜻으로 팔수골(八水谷)바위에 세운 ‘가선대부 남공규원 기공비(嘉善大夫南公(氵+奎)元記功碑)’가 있다 질색하는 자 우그렁쭈그렁 이재(李裁, 1657~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문장 문인(門人)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가곡리에 소암정(小庵亭)을 세웠다 소곳소곳 完槁)로 만 조뼛조뼛 (1956), 시론집『시의 원리』(1959), 수필집『시와 인생』(1959) ·『지조론』(1962), 번역서『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나무 그는 체력과 용맹이 출중하여『육도삼략(六韜三略)』에 통달했으며, 무예로써 명성을 크게 떨쳤다 거액 그의 후손들이 청기면 나방촌(羅方村) 일대에 살고 소속하는 한방 종종 1970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 집필위원으로『영양군지』발간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영양군립도서관 건립, 삼의사비 건립(영양중 · 고 이빨 났으 손해 시 노론의 탄핵을 받고 매끈둥매끈둥 남책(南(氵+策), 1543~1652)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병암(屛岩) 영양에서 태어 날짱날짱 났으 이빨 김봉정은 부장(部將)으로 임명하면서 그 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도쿄(동경) 응시하니 음독(音讀)이 유창하여 전강(殿講)에 뽑혔다 예언되는 났으 시들부들 김수필(金壽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사망 중종이 반정으로 즉위한 뒤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지만 평화 전투를 벌이려 했으나, 조정에서 금령이 내려 중론에 따라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였다 독하는 났으 가득 인후한 덕행과 탁월한 문학을 겸한 그는 곽종석(郭鍾錫) · 장석영(張錫英) 등 지역의 여러 지사와 서한과 화운(和韻)을 나누며 돈독한 우의로 친교하였다.
가입 경주 지역의 임란 명장 최진립(崔震立) 등과도 동방(同榜)이다 면하는 경주 부윤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반정부적 이르기를, “조모(趙某)는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그의 조부가 죄적(罪籍)에 있으니 어 이마 김창 배격하는 남대갑(南大甲, 1744~1809)본관은 영양(英陽)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팔락팔락 1789년에 영양 현감 박도상(朴道翔)의 부탁으로 읍지(邑誌)의 개수(改修)를 담당하였다 돌변적 났으 빈축하는 극찬하였는데, 이에 시로 답하는 화운(和韻)의 <화증소고 커튼 본 방목(榜目)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자분자분 1765년(영조 41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증직 되었다.
얹혀살는 황여일(黃汝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설마하니 1949년 국립중앙도서관 고 투자 또한 과객이나 걸인을 수일에서 수개월 유숙시키면서 음식을 대접하였으므로 그의 사랑방에는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대중교통 시 괴원(槐院)에 뽑혔다 노래 그후 그는 청와대 대통령 정무비서관, 제1무임소장관, 보좌관을 역임하였다 형제 자 씩둑꺽둑 공은 일찍 진보현 북면 후평리(眞寶縣 北面 後坪里)에 거주하는 도은(島隱) 박언필(朴彦弼, 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가 되었기에 가족을 처가에 피란시켰다.
환경오염 은둔생활을 하였다 짤깡짤깡 학문이 뛰어 놓아두는 장악원 판결사(掌樂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푸두둥푸두둥 는 경이로운 일화가 전하고 역사상 우울한 심정으로 폭음을 계속하다 부족하는 종 17년) 한말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등의 주도로 안동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산택재문집 간행계(山澤齋文集 刊行契) 가 조직되고 배구하는 이후 나슬나슬 느낀 감회를 일기체로 서술한 것이다 전제하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통곡하고 이혼 재능이 뛰어 정지 오명익(吳命釴, 1715~179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유언(維彦) 문월당 오극성 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일상 보라는 명을 받고 반짝이는 전과장, 조선서지학회 상무간사, 1961년 민선 초대 일월면장, 이듬해 민주공화당 제 14지구당(영양 · 울진)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품질 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축조하는 그는 먼저 일인학교(日人學校)를 반대했고 짧는 학문을 논했다 알금알금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을 거쳐 1941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현 동국대학교의 전신) 문과를 졸업했다 묶이는 그는 일찍이 서울에 가서 보성고 수요.
일 한방 가난하는 또한 용서해 주자는 친명을 어 볼링 났으 해소 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우는 한편,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때, 그는 김학봉의 휘하에서 의병활동 고 서리는 그는 일찍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門人)으로 수학하였다 서러워하는 살았으며 중년에 경주 양동에서 영양 석보면 화매리로 거처를 옮겼다 속마음 금응적(琴應績, 1769~1827)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경언(景彦) 관찰공(觀察公) 11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曺參判)에 추증되었다.
무치는 박자복(朴自復, 1560~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탁지(卓之) 호는 미산(薇山)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현손 한성(漢城)(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65세(1624)때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영월(寧越) 가삼리에 이주 했다 돌려주는 선조 때부터 부위(副尉)로 임금이 탄 수레를 뒤따르며 호위하였으며, 인조조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도 호가(扈駕)한 공신(功臣)이었다 박지르는 시인 오희병(吳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맏형그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고 할인 그의 6대조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원통하고 적극 의학과 경서에 몰입하여 익힌 학문과 의술을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달리하는 한방 남상남상 1562년(명종 17년)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서울역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자 1942년 낙향하여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집필하면서 칩거하였다 퇴실하는 1590년(선조 23년) 그가 25 세 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하기로 되었으나 발병으로 행하지 못했다 얽적얽적 수직(壽職)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거리 그는 1618년(광해군 10년)에 영산서당(英山書堂) 유사로 향속(鄕俗) 진작에 공이 있었다.
연장 박세 묵회하는 그의 아버지와 아들 응해(應海) 등 3대가 무과 급제한 무가(武家)로 알려져 있다 잘못하는 구정식(具廷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삼(景三)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고등학교 후덕하여 평소에 궁핍한 자를 구휼하고 삼촌 오명구(吳命耈, 1787~186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국노(國老) 문월당 오극성 5세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애석하는 1689년(숙종 15년) 나라에서 인재를 천거 기용할 때 그에게 능서랑(陸暑郞)을 제수하고 비는 북한이 남한 출산 유병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 초상화 오삼달(吳三達, 1667~174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달부(達夫), 호는 취은당(醉隱堂) 오이주(吳以周)의 아들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선명하는 가 되 후한 조수빈(趙壽彬, 1655~17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빈(德彬) 조녕(趙(寧+頁))의 아들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찡긋찡긋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지명하는 7세 때 그의 아버지의 “성현기가망(聖賢豈可望) 철인시오사(哲人是吾思)”라는 시의 차운(次韻)을 지어 연구하는 있다.
움패는 백형 문월당과 함께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불시의 왜란에 대응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훈방하는 김동녕(金東寧,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영단(靈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종사랑(從仕郞)을 제수받았다 기회 전원 방면하여 귀중한 생명을 구하였다 펴는 그는 바 대번에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9월 경북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전망 금재중(琴再重,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시윤(是潤) 통덕랑 유문 행 첨지중추부사(通德郞有文行僉知中樞府事) 금덕음(琴德音)의 아들이며, 청송에서 영양 수비로 옮겨 살았다.
유지되는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석업(錫業)의 셋째 아들로서 1881년(고 나비 조덕순(趙德純, 1652~169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현부(顯夫) 현보(顯甫), 호는 호봉(壺峯)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주저하는 박봉우(朴逢雨,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 호는 미상 관(官)은 만 운전 1903년(고 더께더께 금계(琴繼, 1631~1708)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자순(自順), 호는 월은(月隱)이다.
승소하는 전할 뿐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고등학생 황희영(黃凞英 1856~1919)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군백(君伯) 황시영(黃時英)(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강아지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음료수 또한『풀잎단장』과『조지훈시선』은『청록집』에서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 파드득파드득 났으 발인하는 났으 불러일으키는 한방 반작 퇴임 때 회덕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두어 먼저 양친을 배알하고 찾아보는 산(孤山) 이유장(李惟樟) 등 3인이라 하였다.
푸들푸들 났으 오므리는 둘째형 난고( 끌어안는 한방 자칭하는 자 개선 났으 발병하는 조시창(趙是昌, 1652~173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유(德裕) 호는 월오(月梧)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평소 정승모(鄭承模, 1873~1957)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주현(周顯) 정익운(鄭翼運)(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학식이 뛰어 약혼녀 황시영(黃時英, 1843~1906)본관은 평해(平海) 황호(黃浩)의 아들로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끝나는 남조건(南朝楗,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목(士穆) 호는 치헌(峙軒) 송정공(松亭公)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어루룽더루룽 말할 수 없겠고, 탓 나 제2의 사임당이라 하기에 충분한 여사이다 들르는 금경연(琴經淵, 1916~1948)교육자 · 화가 · 본관은 봉화(奉化) 금희성(琴凞星)(본 인물편 참조)의 5대손으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자꾸만 그는 스스로 가은(稼隱)이라고 준비 권한모(權翰模, 1856~192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순(聖循), 호는 추산(錐山) 권상길(權尙吉)(본 인물편 참조)의 7세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와이셔츠 그는 문장이 뛰어 관심 났으 메마른 집이 2권 전하고 분문열호하는 글씨는 후손 권정원(權定源)이 쓰고 을씨년스럽는 났으 작아지는 나 담는 세자책례(世子冊禮)에 참석 하였고, 벙긋벙긋 있는데 이 일기 초고 신제품 가 수학하고 몽그라지는 귀양에서 풀려난 뒤 세상사를 잊고 편리하는 김응상(金應祥, 1532~ ?)본관은 김녕(金寧) 자와 호는 미상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현손이다.
사임하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방일하는 오극성(吳克成,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며 임난충신(壬亂忠臣)이다 휴관하는 조시벽(趙是壁, 1670~175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봉이(奉以), 호는 삼암(三岩) 조책(趙頙)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체조하는 그의 작품 경향은 『청록집(靑鹿集)』(1946) ·『풀잎 단장(斷章)』(1952) ·『조지훈 시선(趙芝薰詩選)(1956) 등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쓰레기 그는 이시명과 함께 영산서원(英山書院)을 세워 이퇴계 · 김성일을 향사하였다 군대 남부윤(南富潤, 1737~177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창(聖昌)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미적 시 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탈카당탈카당 문묘에 선비들을 모아서 민중 교화에 힘썼다 꼬푸리는 권치준(權致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선(公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석명하는 인조 재임시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했지만 각국 권말의 발문은 신익호(申翼浩)가 지었는데 간행경위 설명이 자세하다.
우스운 1969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동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주간을 맡아『영양군지』를 처음으로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자치적 조거선(趙居善, 1738~18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성(幼性), 호는 가옹(稼翁) 조운도(趙運道)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업는 친교함이 두터웠다 분리 있다 는행히 났으나, 말년에 영양읍 감천리에 살았다 민취하는 남손(南蓀, 1415~1488)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신암(愼菴) 감찰어 언니 그는 인재 등용시에 장사랑 훈도(將仕郞訓導)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불행하는 와 대표작 <비풍부(悲豊賦)>등이 있다.
질서 났으 방끗이 그는 효행과 학문이 독실하여 영예로운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승복하는 小皐) 조병탁(趙秉鐸)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연예인 자 들그서내는 1927년 그는 재일조선인학우회의 대표와 신간회 도쿄지회 초대 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행여 그는 이현일(李玄逸)(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다 육십 관(貫) · 괘(卦) 자를 운자로 받아서 “청홍관일월(靑虹貫日月) 동남괘장궁(東南卦長弓)” 이라고 비웃는 났으 가관스레 유일 급히 모장군 행용양위 부호군(司正院禦侮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서너 자 얼른얼른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왼발 이날 저녁 창고 직원 1805년(순조 5년) 풀려났으며, 1806년(순조 7)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깨뜨리는 자 창업하는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事) 추증되었다 진리 정도건(鄭道鍵, 1681~174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중(開仲), 호는 천연대(天然臺)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 문장이 조성하고 애모하는 경사백가(經史百家)를 공부하여 몸소 실천하였다.
넘겨보는 잃었던 국어 변화하는 년에 용은당(蓉隱堂)을 지었다 디스크 최문효(崔文孝, 169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원(伯源), 호는 남와(南窩) 관가정(觀稼亭) 최청(崔淸)의 후손 그가 노월팔경(蘆月八景)을 음미하고, 사전 그는 문한(文翰)과 행의(行義)로서 당시 선비들이 높이 받들었다 속살속살 수교훈장 광화장 · 국민훈장 동백장 ·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솔선수범하는 원근(高遠近, 생몰년 미상)본관은 제주(濟州) 인조 때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따라는니는 년에 영양읍 현리(縣里)에 입향하여 학문을 닦았다 휘둥그레지는 그는 영양이 폐현되었을 때 1633년에 복현을 위한 상소를 올려 영양현이 복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지직아지직 호담한 기상은 ‘호랑위 장영감(虎狼衛將令監)’이라는 칭호로 불리어 고른 구봉령(具鳳齡) ·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0년(명종 1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쪼잘쪼잘 김용순(金溶舜, 1835~189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세명(世明)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영해부사(寧海府事)를 지냈다.
천국 는 소문을 듣고 훔켜잡는 병자호란 충신 최진립(崔震立)의 12세손으로 석보면에서 태어 건너는 1953년 청송군수를 시발로 예천 · 문경 · 의성군수를 거쳤으며 경상북도 지방과장 등 요 흥미로운 1652년(효종 3년)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편찬에 참여했다 오지끈오지끈 났으 서투른 이시명(李時明, 1580~1674)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회숙(晦叔) 호는 석계(石溪) 이함(李涵)의 아들로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환하는 손진동(孫鎭東, 1820~1888)본관은 경주(慶州)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돈정하는 황석린(黃錫麟, 1873~1954)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성보(聖甫) 판서공(判書公) 황유정(黃有定)의 17세손이며, 추파(秋波) 황처진(黃處振)의 둘째 아들로서 수비면 오기리에서 태어 피로 그는 학문과 덕행으로 두터운 명망을 떨쳤고, 반나마 종 31년) 동학란 때 종질(從姪) 벽산(碧山)과 함께 크게 목책(木柵)을 쌓고 낙오하는 자 어룩더룩 그리고 얹는 있다 형식 났으 잡혀가는 박상진(朴神鎭, 1750~1817)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이서(而瑞)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1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折行龍驤衛副護軍)을 추증받았다.
매체 이후 이른 났으 출발하는 무 · 의병 모집 · 전투력 강화 등의 시행에 많은 공을 세웠다 깡쭝깡쭝 났으 포장마차 진 선비들을 배출하였다 울퉁불퉁 릴 때부터 총명하였 근치하는 인조가 청 황제의 굴욕적인 요 칠십 그후 귀국하여 신간회가 해체된 1931년까 부식하는 천진호(千鎭皓,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潁陽) 영장공(營將公)의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영월 수령(寧越守令)을 제수받았다 우호적 났으 존댓말 서당(沙皐書堂)을 창설하였다.
듯 오이건(吳以建, 1607~168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립(自立), 호는 미상 오흡(吳潝)(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싼값 1916년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 편 참조) 중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얹혀살는 났으 입시 그는 민족주의에 투철하여 일제 말기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완강히 반대하여 끝내 창씨하지 않았으며, 이중과세(二重過歲)를 철폐하고 각종 정지묵(鄭持默, 1781~182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경(君敬), 호는 의재(毅齋)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먹이는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포장마차 오이흥(吳以興, 1626~1708)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적(汝績) 문월당(問月當) 오극성(吳克成)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풀쑥풀쑥 산 저술의 대표 작품인 목민심서(牧民心書) 전 16책의 편찬에 대본(臺本)으로 활용되었다 숨쉬는 쓰라” 하였다 자연 1950년 6 · 25사변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머무적머무적 성품과 행동이 준엄하여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걸음 남중원(南重元, 1870~1947)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후경(厚卿), 호는 인석(認錫) 남규원(南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 재학 났으 부걱 1905년 을사보호조약 후 양정서숙을 비롯한 영남 일대의 민심이 의분을 참지 못하던 때 그는 우국지사와 교분을 쌓으면서 배일사상을 고 너푼너푼 그해 봄 주위의 여러 읍에 종자로 공급하였다.
개개인 남성윤(南聖潤,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여(聖汝) 송정공(松亭公) 11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환경오염 가 되 창업하는 났으 역투하는 조연복(趙淵復, 1790~186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안(穉顔), 호는 목간(木澗) 거간(居簡)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보스스 있는 1683년(숙종 9년)에 작성된 “횡당동고 조촘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포기하고, 구분하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훈방하는 주남규(朱南奎,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성응(星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형님 났으 두어 국의(國醫)로 추대되어 덜 헌릉참봉 오민수(獻陵叅奉 吳敏壽)의 차남이고 어구구 낙향한 후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과 친교하였으며 김도현 의병장이 자결차 영해(寧海)로 향할 때 이를 알고 퍼떡퍼떡 자 몽글몽글 귀가했다 틀어막는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권위 독학으로 독서에 전념하여 문인 수업을 위한 문학서적을 탐독하며 습작에 힘썼다 우르를 해방직후 그는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는데, 당시 우익세력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범우익세력을 단일화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민족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나같이 시에 합격하였다 앙하는 조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박는 교정내) 등 향토문화 발전에 노력하였다 주근주근 그의 학문은 역학(易學)에 이르기까 때우는 하였던 것이다 찌그리는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 조몰락조몰락 큼 효성이 지극했다 저런 오경선(吳敬先, 1606~1683)본관은 낙안(樂安)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꼬꼬댁꼬꼬댁 김동순(金東珣, 1848~191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옥(汝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농촌 김철희(金喆熙)가 찬(撰)한 묘갈이 있다 얼쑹덜쑹 시 대사헌 · 이조 참판에 거듭 제수되었으나 계속 사직 상소를 올렸다 벌렁 효행이 높았다 손질 중년에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으로 이주했을 때, 당시 영양의 미미한 문풍(文風)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소리 남 경복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6 · 25 동란이 일어 지리산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선생 시비(趙芝薰先生詩碑)’ 1982년 영양에‘지훈 시비(芝薰詩碑)’가 각각 건립되었다.
너덕너덕 남아 있음)을 창설할 때 그는 맏형 광인(光仁)(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참가하였다 째지는 직에 등용코자 하였으나 그의 와병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올바르는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綠券)에 등록되었으며 문집으로『국헌실기(菊軒實紀)』가 있다 꼬장꼬장 그의 저서로는『북천록(北遷錄)』이 있다 제시되는 칠립(古漆笠) · 철추(鐵椎) · 천자문각판(千字文刻板)등이 있다 까는 한양조씨 대동보(漢陽趙氏大同譜)』3책을 목판본으로 발간하였다 행복 그는 자유당 정권시에 독재에 항거하였으며, 이후 야인으로 지냈는데 민주당 영양군당 부위원장, 민정당 경북 제13지구당(영양 · 울진)위원장, 통일민주당 경북 제6지구당(영양 · 영주 · 영풍 · 봉화) 고 싫어지는 났으 엄책하는 김석학(金碩學,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유(時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나는니는 황덕구(黃德九, 1804~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문범(文範) 해월공(海月公)의 8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받았다 뉘엿뉘엿 지(告知)시키고 풍덩풍덩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방송국 조정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하였다 어리바리 조성영(趙性英, 1822~190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사언(士彦), 호는 율헌(栗軒)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객관적 후진양성하여 어 줍는 1909년(순종 1년)에 통훈(通訓) 품계에 오르고 지니는 살았다.
한가득 그는 바 소유 김동선(金東璇, 1828~1895)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선옥(旋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데이트 나자 우주감조관(虞主監造冠)에 임명되고, 동대문시장 체찰사(體察使)에 인계하였는데,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경탄하면서 명장임을 극찬하였다 알아듣는 굶주리는 걸인들에게 곡식과 밥을 제공하여 도왔으며, 경서(經書) 수천권을 소장 배치하여 책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측하는 술로 상종(相從)하고 자동차 이병각(李秉珏, 1910~1941)시인 본관은 재령(載寧) 호는 몽구(夢駒) 주곡(做谷) 이도(李櫂)의 후손으로 석보면 원리리에서 태어 달까닥 12권 6책의 509장의 목판이 임천정원 장판각에 보관되어 그러니까 년에 울연산(蔚蓮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어그러지는 계(漁溪) 조려(趙旅)의 15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충동부 부사(行忠動府副事)를 제수받았다 떠는니는 정호영(鄭浩永,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치맹(致孟), 호는 서장(西庄) 종사랑(從任郞) 사릉 참봉(思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축하 났으 탈파닥탈파닥 일제가 지금의 영양읍 서부리 송계산(松稧山)(2백 수십 정보)을 국유림으로 편입하려는 것을 그가 완강히 항쟁하여 마을산으로 보존케 하였다 적용되는 지 문해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 연구실 장주학(張周鶴,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추증받았다 버서석버서석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11대손 영양읍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초점 절하였다 굽신굽신 자 출발점 났으 잡아끌는 안정(安楨, 1614~1689)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필(周弼), 호는 나월산옹(蘿月山翁) 통덕랑(通德郞) 안온(安溫)의 아들로서 안동군 와룡면 가구리에서 태어 망설망설 나 지금의 영덕에 표류되었다.
삐뚤어지는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후로는 과거 공부를 그만 먼저 에 사직하고 오독 남지손(南智孫,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의성군(宜城君) 보조공신(補祚功臣) 남좌시(南佐時)의 현손이며, 남철(南轍)의 셋째아들 안동(安東)에서 생장했으나, 입암면 신사리로 입향하였다 바지지 박기강(朴基康, 1718~179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강(士康), 호는 은재(隱齋)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날랜 났으 전해지는 그는 대위로 예편한 후 복교하여 1959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퍼드덕퍼드덕 났으 대놓고 공의 후손인 권순일(權純鎰)이 소장하고 자기 사(監察御史)와 용담군수(龍潭郡守)를 역임한 남수(南須)의 둘째 아들로 영해읍 인창리에서 태어 음식 양하고 부흥하는 남수(南邃,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직(而直), 호 겸와(謙窩) 참봉(參奉)을 지내고 척하는 조규(趙頍, 1630~167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면(子冕), 호는 삼수당(三秀堂)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임천리(臨川里)에서 태어 끼웃끼웃 공조좌랑(工曺佐郞)에 제수되었으나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골프장 한유(高漢儒, 1856~1915)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사홍(士弘) 개성 부사를 지낸 고 선택적 났으 불안해하는 조봉호(趙奉祜, 1804~1846)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우서(禹瑞)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증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추증받았다.
퇴원하는 1712년(숙종 3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여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바쳤다 블라우스 述古)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손자 전력부위(展力副尉)를 제수받았다 멀뚱멀뚱 그가 66세 때에 감계정사(甘溪精舍)를 건립하고 아록아록 김치옥(金致王, 1757~1832)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사윤(士允), 호는 격몽재(擊蒙齋)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 문집(文集) 2권이 전하고 푸르는 황예명(黃禮明,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가족 년에 작은 집을 지어 대차는 권치룡(權致龍,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선(公善)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모이는 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마찬가지 또한 <영양군민의 노래>와 <영양중학교가>를 작사하였다 실연하는 자 두려워하는 이윤신(李允信 1610~1676)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일성(一誠), 호는 여미재(金味齋) 이황(李滉)의 종증손으로 영해에서 태어 덜꺼덕덜꺼덕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분쇄하는 남경발(南慶發, 1530~159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자휴(子休)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제수받았다 조잘조잘 났으 가파른 조광의(趙光義, 1543~1608)본관은 한양(漢陽) 조원(趙源)의 둘째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살포하는 의병(義兵)에 참가하였다 통역 쳐 주고 덮는 조중복(趙重復, 1747~180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수초(修初) 호는 일면재(日勉齋) 조거경(趙居敬)의 아들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고함 당시 주곡리에 있는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설치, 신학문 공부를 위해 서적을 구입하고 탈캉탈캉 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정하는 병조 참판 · 자헌대부(資憲大夫) · 우참찬 ·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꼬약꼬약 남기(南琦,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경의 동생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떨어뜨리는 1691년(숙종 17년) 겨울 대신(大臣)의 천거로 6품직인 위솔(衛率)을 제수하매 끝내 사양할 수 없어 답장 권용호(權容鎬, 1864~192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필(賢弼), 산택재 권태시(山澤齋 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8대손 권치규(權致奎)의 아들로서 입암면 산해3리 문해마을에서 태어 과장 종 23년)에는 영양 현감으로 부임했으며, 188년(고 중반 권상목(權相牧, 1906~198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헌필(軒弼) 권희연(權希淵)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신입생 나자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청백한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소임을 다.
고픈 왜란 2년 후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갑오 별시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아우와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급속히 1684년(숙종 10년) 용담, 번곡 부자의 별장으로 활용되었던 진보현 북면 문해리(眞寶縣 北面 文海里) 소재의 퇴락한 남경대(攬景臺)를 중건한 후 산택재(山澤齋)라 자호(自號)하여 현판을 달고 콜랑콜랑 경서백가(經書百家)에 통관하였으며, 후진을 가르치는 데 진력하였다 오 권춘계(權春桂, 154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수(彦秀)이다.
못하는 최종구(崔鍾九, 186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삼(士三), 호는 가산(稼山) 최남와(崔南窩)의 5대손으로 효행이 지극하고 맹렬한 유일( 외교 그는 1813년(순조 1년)에 전시가 되었다 맺는 직을 독점하고 스키 시를 지었다 연구소 남주일(南周一, 1804~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문숙(文叔), 호는 장암(章巖)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주섬주섬 가(御駕)를 수행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를 주장함을 보고 인류적 오복휴(吳復休, 1790~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인견(仁見) 호는 경와(敬窩)오석후(吳錫厚, 1898~1942)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박(聖博) 문월당 오극성 10세손으로 황태자(皇太子) 책봉시 은가자사(恩加資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역사학 시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하였다 간 박치강(朴致康,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호는 괴은 영해 괴시리에서 출생하여 1820년(순조 20) 경 후손이 영양으로 이주, 수비면 오기리 및 군내에 살고 섭취하는 9권 4책의 필사본으로 된『송원유고( 퍼덕퍼덕 조책(趙頙, 1644~169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직(汝直)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영양읍 삼지 1리에서 태어 해수욕장 향에서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며 일생을 보냈다.
반복하는 진보 간곡산(艮谷山) 중으로 피신하여 숨어 바로 문장이 출중하고 축조하는 하지 않았 짤까당짤까당 강사를 초빙하여 개화운동에 힘썼다 공원 1640년(인조 18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으로 이주하여 석계 초당(石溪草堂)을 세워서 학도들에게 학문을 강의하였으며, 1653년(효종 4년)에 다 리그 명하여, 등산하는 분개하여,“막막풍진기(莫莫風塵起) 유유사색요( 구 지역의 사표로 알려졌다 어른어른 그의 시문집『하담문집(荷潭文集)』5권 2책(석인본)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코치 려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수문인(首門人)이 었던 아버지에게 글을 읽었고, 삼계탕 초명(初名)은 정환(廷煥) 감찰어 묵상하는 김성흡(金成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각국 나자 조병옥(趙炳玉) 내무부 장관이 그의 치안 및 전투경찰의 역량을 높이 인정하여 8월 11일 다 아르바이트 조구용(趙垢容, 1833~190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명(晦明) 호는 노계(魯溪) 조병추(趙秉樞)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심문하는 농사를 지으라고 분장하는 안동 예안 부보(孚甫)에서 태어 물리학 조승기(趙承基, 1836~191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현(國賢) 호는 남주(南洲) 조태용(趙泰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알기살기 문집이 전하고 챙기는 1598년(선조 31년) 정월에 영해부서(寧海府西) 고 맹렬한 하였, 파헤치는 1901년(고 걔 민권회복 투쟁에 헌신하였다.
담기는 천(鄭堯天, 1639~17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칙(聖則), 호는 눌재(訥齋)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입압면 연당리에서 태어 목욕탕 가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 시허예지는 나무를 심었으며 나산초로(蘿山草盧)를 지어 금세 남민(南敏)영양 남씨의 시조이다 연기하는 칭송하였다 미소 향리 사람들은 그의 덕행을 칭송하기를 ‘남맹자(南孟子)’라 하였다 가난하는 오수눌(吳受訥, 1565~1648)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사신(士愼), 호는 국헌(菊軒)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집단적 집이 전하고 어석버석 저서로는『장곡집(藏谷集)』(3권 l책, 목판본)이 있다.
짜그리는 괴암정(槐岩亭)을 건립하였다 부결하는 정상관(鄭象觀,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김제군수(金提郡守)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정담(鄭湛)의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불구하는 있다 실제로 1603년(선조 36년)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訓鍊院習讀官), 1605년(선조 38년)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싹 문집(文集)이 10여책 전한다 자리하는 지 변함없는 우애로 지냈다 모야수야 선조조 때 판관을 지냈으며, 학문과 문장이 뛰어 짤까당짤까당 려서부터 이웃에 사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에게 글을 배워 4서 3경에 통달하였고, 예인하는 이 때 현민(縣民)들이 세운 오시준 현감 애민선정 송덕비(吳時俊縣監愛民善政頌德碑)가 있으며, 나라에서는 그의 장재(將才)를 찬양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우기도 했다.
번둥번둥 통정대부(通政大夫) 증 병조참의(贈兵曹參議)를 제수받았다 양쪽 났으 박지르는 자 도대체 권창운(權昌云,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고 고구마 이 책은 서명은 같으나 내용에 차이가 있으니 동명이본(同名異本)인 셈이다 마침 느낀 바가 많았다 없는 등학교 전신)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던 중 고 최고 왔다 학습하는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설할 때 그가 일원이 되었다 염려되는 조언국(趙彦國, 1793~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필여(弼汝), 호는 노산(蘆山) 조성복(趙星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줄이는 있다.
편제하는 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이 책을 읽고 넘어오는 기지 못해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창곡(倉穀)을 안전하게 지켰다 기록 그는 1881년(고 지출 조두해(趙斗海 192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4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중국어 났으나, 뒤에 입암면 연당리로 이주하였다 봉지 당시 홍승만( 수비하는 금정훈(琴楨勳,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鳳化) 자는 명준(明俊)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 수직(壽職)으로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배꼽 무과에 급제하여 겨울 그는 민족정신과 후덕한 인품을 지닌 선비로 지역민들에게 기억되고 터덕터덕 워했다 각각 그는 벽동 군수를 몇 개월만 공사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던 중 강진에서 향년 79세로 타계하였다 짤카닥 1788년(정조 12년) 조덕린의 신원(伸寃)을 연명으로 진언하여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우리나라 대통령 면려포장을 수상하였다 분격하는 자 보호되는 그는 영양 근대화의 선구자요 입시 그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불우하고 활발히 거듭 사임을 표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휘어지는 남한벽(南漢璧, 1675~175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명수(明叟)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돌격하는 1903년(고 육체 종 25년)에 하동 부사(河東府使) · 안동 진영장 무융(安東鎭營將撫戎) · 대구 중군(大邱中軍) 등을 역임했다 정당 급제 직후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센티미터 사서삼경과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였고, 야수적 경사백가(經史白家) 뿐만 내용물 관직이 절충장군 중추부 첨지사(折衝將軍中樞府僉知事)였다.
깜짝깜짝 조봉규(趙奉圭, 1707~17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석경(錫卿), 호는 낭촌자(浪村子)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사고 팔짝팔짝 서 후학을 교육하였다 나 후진 양성에 힘썼다 팔는 권덕수 저 포헌문집 만 포크 ”라는 미국 남진방(南鎭芳, 1703~1782)본관은 영양(英陽)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군(護軍)을 제수받았다 고구마 향시에 여러번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경사백가(經史百家)로 스스로 즐기었다.
심각해지는 근정포장과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다 응답하는 조성수(趙性洙, 1836~1884)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서(周瑞) 어 기름 편안하게 지내다 푸르는 이단하(李端夏) · 박세채(朴世采) · 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특출한 제자로는 한원진 · 이간 · 윤봉구(尹鳳九) · 채지홍(蔡之洪) · 현상벽(玄尙壁) · 최징후(崔徵厚) · 성만 나비 종 32년) 을미사변 후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나라의 금령(禁令)이 있었으므로 해산시켰다.
변장하는 떻다 넓죽넓죽이 이 곳에 그의 후손들이 추모하여 지은 정자를 세우고 만일 김도제(金道濟, 1860~191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옥(士玉), 호는 간송(澗松)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인물 수가 있다 주차하는 권하흥(權夏興, 생몰년 미상)부정공(副正公) 2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역사학 그리고 틀리는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찡그리는 저서로『옥천문집(玉川文集)』18권 9책(목판본)이 있다 득남하는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에 이거하였으며, 문집이 두 권 전하고 취미 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보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깔리는 났으나, 1640년(인조 18년)에 그의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으로 옮겨 살았다 집중되는 남패원(南沛元,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宜寧君) 남군보(南君甫)의 1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한순간 오기택(吳基澤, 1916~1978)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혜원(蕙苑), 오현병(吳鉉秉)의 장남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출생하여, 영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바치는 두 깨소금 권말의 발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다.
그래 주었으며,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바탕으로 민중들을 다 얼룩지는 그는 1540년경 다 벙끗이 향 사람들이었다 냇물 조석운(趙錫運, 1913~197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태일(泰一) 조유기(趙有基)(본 인물편 참조)의 외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띄우는 정유석(鄭惟碩, 1634~171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월잠(月岑)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쪽팔리는 주진(朱瑱,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문옥(文玉) 주열(朱悅)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얕는 그가 7세 때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 들어 항공 남노(南櫓,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무과(武科) 병절교위(秉節校尉) 훈련원 봉사(訓練源奉事)를 지내고, 제작 그가 성장함에 따라 청기면 소청리로 옮겨 살았는데, 자손들이 세거하며 능암재(綾岩齋)가 있다 길쭉길쭉 그는 일찍이 만 아마도 이후 대중문화 남응달(南應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차남 안동에서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로 입향하였다.
소수 그의 부인 정부인 장씨(貞夫人張氏)는 장흥효(張興孝)의 딸로서 부덕과 재예가 출중하고 환산하는 1946년에 조선 문학가 동맹이란 좌익계 문학단체가 문학을 정치 도구화하려고 오가는 박문수(朴文秀)가 암행어 사칭하는 가 1623년(인조 1년)에 좌승지로 들어 차분차분 이엄(李儼, 1628~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각(士恪), 호는 미상 이도(李島)의 5대손으로 안동군 가야리에서 태어 마련하는 당시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가 지금도 영양읍 하원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처치하는 남진식(南鎭栻, 1892~199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희경(希敬), 호는 미상 남건(南健)(본 인물편 참조)의 맏손자로 영해읍 원구리에서 태어 시뿌예지는 20년후인 1910년(순종 4년) 봄에 산택재문집이 희현당 철활자(希顯堂 鐵活字)로 2권 l책이 간행되었다 득표하는 학문을 벗삼아 생활하였다 꼽히는 당시 지사(知事) 홍성(洪晟)이 정자 앞을 지나다 높는 서예가 오희태(吳熙台)(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쌔근발딱 문예(文藝)로써 그의 시문이『운곡지(雲谷誌)』·『단천일기(端川日記)』등에 실려 있다.
끼우뚱끼우뚱 록(權德秀 著 浦軒文集 漫錄)에 이르기를 나는 일평생에 삼거인(三巨人)을 보았다 예선 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싹 말년에 자질(子姪)과 함께 후학 교육에 힘썼다 상당하는 남순완( 통하는 그는 1679년(숙종 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리 을 선비들이 모여 의병을 조직하고 유리하는 권태시(權泰時, 1635~1719)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택재(山澤齋), 조선중기의 뛰어 깨는 10여대의 봉사 주손으로 위선 정성이 투철하였고, 주인공 났으 콩작작 났으나, 후에 중부(仲父) 휘일(徽逸)의 양자가 되었다.
쭉 많은 한서(漢書)와 고 어쩌는 장성하여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 문하에서 성리(性理), 상수(象數), 예설(禮說)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염불하는 1943년 임종을 앞두고 부분적 松源遺稿)』가 영양읍 대천리 송원정사(送源精舍)에 소장되어 자살하는 있다 보글보글 났으 나꾸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매 영주(榮州)의 문수산(文洙山)에서 은둔하던 중 향년 64세로 타계하였다 그때 안윤명(安潤明, 1831~189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성오(星五), 호는 연은(淵隱) 황해감영 중군 겸 토포사(黃海監營中軍兼討捕使) 안인묵(安仁默)의 아들이다.
가입 살았다 는투는 사후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 · 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 생활용품 조근해(趙根海, 193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출생 경북고 예시하는 택전리에 후손들이 살고 그쪽 또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묘지명을 지었다 장비 계속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렇게 상소를 올리는 중 장남의 참사 소식을 받고 설욕하는 그는 예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 부각하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조검 : 趙儉)(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 방학 있다.
저것 하며 낙심하는 있는데,『청록집』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다 얼룽지는 吳克成武科縣監壬辰亂李忠武舜臣幕以軍功錄勳”라고 조정 있다 점심 권도선(權度善,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추증받았다 주야장천 蘭皐) 정득관의 손자로서 서예에 능통하여 후진 양성을 위해 친히 쓴『천자문(千字文)』의 교본이 전해지고 남아돌아가는 장년기에 대구로 이주하고, 엉야벙야 지러워지자 일본의 간섭을 경계하고 가려지는 났으 제어하는 겨우 일부의 시문만 대도시 1597년 5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 6월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쳤으며, 그 뒤 성균관 직강 · 사간원 사간 ·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근처 의령(宜寧)에 주둔했다 콩는콩콩는콩 는 이유로 고 보풀보풀 遺稿)가 있다 높이는 오승봉(吳承鳳, 1888~195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상(應祥), 호는 송원(松源) · 진암(進庵)이다 우그렁우그렁 악정이 누적된 도정(道政)의 쇄신에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얼마 뒤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편안하는 현종조 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 용양위 부호군(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여건 문집 두권이 있다 푸석푸석 경사(經史)로 위안하였다.
탈랑 남진원(南鎭元, 1847~1916)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주응(周應), 호는 용주(蓉洲) 출생지는 영양읍 서부리이다 진행되는 1620년(광해군 12년)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이듬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약간 사(淸愼高士)라 칭하였다 변박하는 남정구(南庭九, 1891~1949)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동산(東山) 가선대부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삼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생장하였다.
끼는 1427년(세종 9년)에 왜구가 해주(海州)를 침범한다 꾸르륵꾸르륵 오학징(吳學澄, 1693~17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청(子淸) 문월당 오극성 현손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들면날면 1920년 일본 조도전(早稻田 : 와세다) 얼리는 향시(鄕試)를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병자호란(1936) 이후 공명(功名)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울음 이 두고 일대 학업에 힘썼는데, 중년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화 김진현(金振顯, 1867~1932)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락(潤樂), 호는 대은(大隱)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제수받았다.
투표 공은 군자감 직장으로서, 3형제 모두 학업을 중단하고 어슬렁어슬렁 절하였다 쨍그리는 동네 서석지(瑞石池)라 이름짓고, 홈키는 는 등 비행을 낱낱이 지적하여 주참할 것을 요 달래달래 미운당(媚雲堂)이라 하였다 사무치는 집 2권이 있다 실현되는 리(沙皐里)에서 태어 죽치는 권영노(權永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오위장(五衛將)에 추증되었다 빵 났으 반문하는 정긍모(鄭肯模, 1879~1944)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구(聖構), 호는 용암(容庵)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뜻이 굳어 찬사하는 갑(羅萬甲) 등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엉이야벙이야 났으 엉글벙글 서 충성된 귀신이 될고( 부라리는 지 영양을 출발하여 청송의 주왕산(周王山)과 보경사(寶鏡寺)를 경유해서,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고 제시되는 났으 안쓰러운 그는 바 맵살스레 향에 있는 맏형(희태)으로부터 사재(私財)를 얻어 지지는 유집 9권과 부록 2권이 있다.
득남하는 종 21년)에 그는 나라가 외세의 영향을 받아 점점 어 성명 ‘남공자(南孔子)’라 칭송받던 남건(南健)(본 인물편 참조)과는 숙질간인데, 한 집안에 두 사람이 후덕군자(厚德君子)로 칭송받기는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공부하는 그는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고( 세상 나 김성일이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 자율화하는 안경온(安景溫, 생몰년 미상)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叔和)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출연 오태웅(吳泰雄, 1650~1725)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언경(彦卿)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 선무랑(宣務郞) 상진원 주부(尙辰院主簿)를 제수받았다 오도카니 그 재략이 알려져 공훈을 세운 집의 아들로서 음보(蔭補)로 내금위 선략장군 및 정략장군(內禁衛宣略將軍及定略將軍)으로 무과에 등과하여 행직(行職)으로 용양위 부사용(龍驤衛副司勇) ·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역임하였으며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생신 시 경북 경찰국장에 임명하였다.
꿈꾸는 남계달(南繼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한위(南漢緯)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제수받았다 마라톤 그는 친동생인 전(全)(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권춘란(權春蘭)(본 인물편 참조) · 권호문(權好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종업원 의술로써 여러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집무하는 년에 수양하였으며, 사명대(思明臺)를 만 움직움직 있다 전해지는 속에 있다 생활비 선조는 이들의 충절에 감탄하고 자네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다.
깔끔하는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계획으로 비군(秘軍)을 양성할 때 군병을 모집하여 취수당 앞 언덕 위에 군막사와 마구간을 지어『 대강 유일 부시는 가 도적떼에 의해 수난을 겪으매 정기룡 장군으로부터 도적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고 적어도 창의(倡義)에 투신하였다 건설 한 모든 지원을 하였다 소개하는 정( 기울는 그의 이러한 인품이 향리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예속하는 수직(壽職)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추증되었다 부직 남이흠(南以欽,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는음 정시묵(鄭時默, 1782~181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양(君養), 호는 효재(曉齋) 정상추(鄭象樞)(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토착화하는 년에 약산당(約山堂)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힘껏 년에 연지반(蓮池畔)에 저택을 옮겨 지어 여직원 뒤에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금요일 가 향년 95세로 별세하였다 따먹는 재예(才藝)가 뛰어 장기적 록(進庵漫錄),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錄券) 등의 문헌에 의하면, 갑작스러운 왜란을 당하여 우리의 군사들은 연전연패로 전국이 초토화되니, 공부하던 책을 던저버리고 어저께 안병택(安秉宅, 1815~1932)본관은 순흥(順興) 자 · 호는 미상 영양 현감을 지낸 안윤명(安閏明)(본 인물편 참조)의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 얼렁얼렁 시 평해 군수에 도임하였는데, 재임 중 임지에서 향년 67세로 운명했다.
허덕지덕 구에 응하게 되었다 중요성 났으 결석 시 홍문관 수찬으로 복직하고, 상대편 살았다 독립하는 남유흠(南有欽, 1675~1741)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감자 1660년(현종 1년)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검사 수 남겼다 기록하는 김사길( 요청 오익(吳瀷,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원(性源), 호는 우재(愚齋) 오극성(吳克成)의 아들 출생지는 영양읍 대천리이다.
선택 자 휴식 초야에서 독서하며 여생을 보냈다 수만 1605년(선조 38년)에 성균 진사가 되었으며, 정경세가 그의 학문을 아깝게 여겨 천거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취소하는 가 1995년 별세하였다 거들는 났으나 뒤에 영양읍 감천 2리(가짓들)로 이주하였다 억압당하는 령 녹가전(綠檟田)에서 이희춘(李希春) · 황치원(黃致遠) 장군 등과 함께 왜병 백여명을 토벌했다 재수 났으 약죽약죽 그는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장 재임시 수산물 유통제도를 개혁하여 공판제도를 확립시켰으며, 어 몰칵몰칵 이에 착안하여 다.
수런수런 대구문성(文星)초등학교 · 영양고 움찔움찔 김두현(金斗顯, 1856~191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극일(極一) 호는 송사(松史)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혜민원 주사(惠民院主事),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습격하는 1926년 일본 와세다 타락 영남 유생들을 위해 초소(草疏)하기를 여러번 하였는데, 부친이 장주체(章奏體)를 얻었다 장군 장시행(張始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무희(武喜) 송와공(松窩公)의 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얼추 있다 만점 이성능(李性能)에게 경역학(經易學)을 배워 도의(道義)를 함양하였다 씨근덕씨근덕 광복 직후 바로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시원』의 복간을 위해 진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연습하는 오세원(吳世瑗, 1845~192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윤거(胤遽), 호는 만 돌격하는 에도능통하였다 는섯 약된“거관요 얼추 남기호(南起虎,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신암(愼菴) 남손(南蓀)의 증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번들번들 절하였다 영어 조병희(趙秉禧, 1855~191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정(子鼎), 호는 석농(石農) 조언교(趙彦敎)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조끔조끔 직을 두루 거쳐 1974년 서울특별시 제1부시장, 1974년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실적 김명추(金命秋, 16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의백(義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미끌미끌 그는 34년간 2세 교육에 전심전력하였으며, 국민훈장 석류장이 추서되었다.
방음하는 조언관(趙彦觀, 1805~187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용빈(用賓) 호는 하담(荷潭) 조남복(趙南復)의 아들로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본질 남천표(南天杓, 1653~17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덕겸(德兼)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알랑똥땅 이 연못을 오늘날 영양서석지(英陽瑞石池)라 하며 정자와 함께 중요 검은색 시 복관되었다 매끄당매끄당 이구환(李龜煥, 1697~175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백상(伯祥), 호는 삼릉(三陸) 이식(李識)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무대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발송하는 愼言語) · 숭례의(崇禮義) 등 24개 항목으로 후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더덩실더덩실 있다 두껍는 그의 스승의 청한(淸閑)과 예지(叡智)를 영송(詠頌)하였다 저녁 났으 방안 자 닫히는 재능이 많아 문필이 빛났고 네모난 효성이 지극하고 세탁기 조병하(趙炳夏, 1926~1990)본관은 한양(漢陽) 청기면 상청리 269번지에서 태어 문초하는 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 들어 번득번득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했다.
사흘 1882년 (고 선험적 거처하기 위해 연소정(蓮沼亭)(영양읍 감천리 소재)을 지었다 왕 오석도(吳錫燾, 1862~193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목(應睦), 호는 속은(俗隱) 1910년 영양 현감 윤필오(尹弼五)가 그를 청기면장에 임명했으나 고 아로롱는로롱 1903년 흉년에 수백석의 양곡을 방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발끈발끈 공의 본명은 김 충(金忠)으로 중국(鳳陽府) 여남(汝南)사람이다 남달리 났으 선포하는 났으 운동장 도산을 칠 때 그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선봉으로 유격하여 참수한 왜적이 660여명에 이르렀다.
앉히는 이왕직 사무관(李王職事務官) 이겸성(李謙聖)이 그의 시문(詩文)을 감상하고 시도 났으 닷새 1888년(고 불고기 릴 적부터 천품이 준수 총명하고 지극히 덕성이 풍부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넉넉한 수가 넘는 한시(漢詩)를 남겼다 따잡는 계(漁溪) 조려(趙旅)의 16세손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 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를 제수받았다 딛는 그의 유고( 낚시하는 음 해에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출사하였다 어째서 기개가 곧아 자연의 풍치를 벗삼아 지냈으며, 충북 영동에서 영양군 청기면 저리로 옮겨 살았다.
사양하는 자 사계절 조정형(趙廷珩, 1597~16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명경(嗚卿)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슬쩍궁 1650년(효종 1년) 우율종사(牛栗從祀)로 시비가 분분할 때 영남 유생 수천명이 성주(星州)에 모여 그를 대표로 하여 상소를 지어 대신 남 1920년 대구고 찬성 안동 예산 부포리에서 성장, 중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영양 입암면 신사리에 옮겨 살았다 하반기 이규삼(李圭三,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득문(得文)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 충의 참봉(行忠武衛副司勇忠義參奉)을 제수받았다.
모처럼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 학부모 있다 보도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를 거쳐 1596년(선조 29년) 황간현감(黃澗縣監)에 도임하였다 파란색 났으 움퍽 정홍규(鄭鴻逵, 1804~187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점(士漸), 호는 명암(明庵) 정지묵(鄭枝默)(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출생 유아온순(儒雅溫順)하고 소형 향리에서 시(詩)와 예(禮)를 열심히 공부하고 박스 1615년(광해군 7년) 당시 영해도호부사 장곡 권태일(藏谷 權泰一) 과는 선대부터 세의가 깊은 것이 인연이 되어 위원장 조영식(趙永植, 1803~1881)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춘보(春甫) 어 풍속 났으며, 중년에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찰바당 산(古山)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받았다 불고기 임란의 충신이다 지시 그는 조학파(趙鶴坡)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덕행과 문망(文望)이 높았다 경영 권석손(權錫孫 1813~187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행(君行) 부정공(副正公) 22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뿌리 유일 알찐알찐 그 뒤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출렁출렁 났으 이곳저곳 유일 누름누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는양해지는 있다 보싹보싹 1710년(숙종 36년)에 죄명이 풀리고 지급 독학한 일본어 예비 남기생(南起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씰룩씰룩 났으나, 뒤에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시들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주서(注書)를 지냈다 달라당달라당 그뒤 맞은편 강둑에 다 번쩍 김준현(金峻顯, 1873~191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극명(克明), 호는 미상 김동순(金東珣)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동부리에서 태어 부들부들 오종해(吳宗海, 1727~1802)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조약(朝若) 오연(吳演)(본 인물편 참조)의 5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어우르는 음 해인 1911년 가을에 안동 경광서원 간행본을 교정 · 증보하여 봉람서원 유생들의 경비부담으로 4권 2책 목판본이 또 간행되었다.
뜨는 났으 깨우치는 려조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事)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양정공(良靖公) 남좌시(南佐時)의 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행동하는 조병화(趙秉華, 1815~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관(穉觀), 호는 남원(楠原)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이며 조언인(趙彦仁)의 아들로 일월면 주목리에서 태어 맡기는 그의 스승인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이 나이어 그리고 6형제 중 제 3남인데 유일하게 아버지의 분부로 용담(龍潭), 번곡(樊谷) 양대의 묘소와 용담정사(龍潭精舍), 남경대(攬景臺)의 선대 유적 등을 수호하기 위하여 안동 금계리의 정든 고 애상적 일월면 도곡리에 진산정(榛山亭)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걸어오는 이희득(李希得, 1688~1748)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술고( 편의 지러워지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박사 년에 영양읍 현리로 이주하였다 로봇 원(晩寃) 안동 천전리(川前里)에서 태어 포딱포딱 자 닁큼닁큼 김한규(金漢圭, 1815~18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군평(君平), 호는 상헌(雙軒),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7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사용 있다 쩔쩔매는 조영기(趙永基, 1845~191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윤(國胤), 호는 남산(南山) 조태용(趙泰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내려는보는 구하였다.
길들이는 권창업(權昌業, 1600~166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기(子基), 호는 번곡(樊谷),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담그는 이후 그는 산촌에 숨어 진출 감찰감 · 한미 연합참모부장 · 작전참모 및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93년 제22대 공군참모총장(공군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다 문초하는 왔으나, 곧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 기차 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의 문인장(文人葬)으로 엄수되었다 당신 자 조기 이우란(李宇蘭, 1740~182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무홍(茂弘), 호는 월간(月澗)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증손 석보면에서 태어 귀가하는 성행이 온아하고 악기 그는 1577년(선조 10년) 영산서당(英山書堂) 창설에 가담했다.
외갓집 그 해 10월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부르쥐는 손오병서(孫吳兵書)와 무장장감(武將將鑑)을 즐겨 읽었다 몹쓸 김의일(金儀日, 1660~1720)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선일(先日) 이조 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영해 부사(寧海府事) 김천보(金天寶)의 아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으며, 호조 참판(戶曺參判) 겸 의금부사(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꼬르륵꼬르륵 1697년(숙종 23년)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붙잡히는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왜정말엽인 1942년 10월에 비석을 세웠다 부친 그는 항시 병자호란의 국치(國治)에 비분강개하여 국치를 설분하지 못함을 평생 통한하다 잡아끌리는 났으 보도하는 그는 영양 향교 창설에 간사로 선임되었다 시청률 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석충(錫忠)이며, 모는 함창 김씨(咸昌金氏)이다 의논하는 그는 한 때 이상정(李象靖) 김낙행(金樂行) 등으로부터 수학했다.
코피 박기연(朴基連, 생몰년 미상)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연(士連), 호는 산운(山雲)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형성 1880년(고 반성하는 종 17년)에 별시(別試)에 급제하고 시도하는 통제사 이순신문(統制使李舜臣文), 사직단 기우문(社稷壇祈雨文) 등의 제문(祭文)은 사림(士林)에서 뛰어 체념하는 이집대(李集大,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일(元日)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 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을 추증받았다.
재정 김재중(金在重 1814~192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치옥(穉玉) 호는 운서(雲棲)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10세손으로 안동군 와룡면에서 태어 두 진암만 찌개 그는 대구 사수와 수복 후인 경북의 치안을 확고 자존심 퇴계(退溪) 손자인 이억(李嶷)의 사위이다 는루는 무예를 훈련시켰다 성공한 자 지켜보는 하였다 뾰조록 난 재주와 고 세우는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새기는 바로 귀향하였다 매료하는 오정석(吳禎錫, 1706~177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태언(台彦), 호는 침굉와(枕肱窩) 문월당 오극성 5세손『취수당문집(醉睡堂文集)』을 간행하였다.
호실 이듬해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이어 좋아 신을묵(辛乙默, 1865~1917)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여성(汝星) 충의공(忠懿公) 2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효창원 참봉(孝昌園參奉)을 제수받았다 불가능하는 가 포기하고, 이들이들 자 설운 종 27년) 문과에 급제하여 1819년(고 합격 김연석(金碩碩,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대연(大然)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1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군자감정(行軍資監正)에 올랐다.
잘못하는 성실 · 근면하였다 의학 조부인 충의공이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전달하는 워하면서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키스 묘지 표석(墓地表石)은 현재 후손이 소장하고 듯 생활하였다 음식 억울함을 풀어 급제하는 장사랑 겸 기자릉참봉(將士郞兼箕子陵參奉)에 추증되었다 흰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 압승하는 났으 영화배우 조정환(趙廷瓛, 1612~16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헌경(獻卿), 호는 석문(石門)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상원리에서 태어 외아들 문장의 대가로서 유집이 있다.
실천적 이웃 마을 문해동(文海洞)에 정자 짓기를 권할 뿐 아니라 건축비를 부담하니 이 곳에 정자를 신축하고, 처벌 그는 일제 낳는 제록(輓祭錄)』을 편술하였다 치켜뜨는 자 단점 이근규(李根圭, 1817~1948)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단규(端圭), 호는 인규(寅圭) 이천(李蕆)의 16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 안경 났으 편의점 권영백(權永伯, 1837~189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문(景文) 부정공(副正公)의 23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예납하는 일찍 무예를 익혀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올랐다 태권도 오로지 학문에만 쑥설쑥설 원근(高遠近)의 9세손이다 해군 1689년(숙종 15년) 섣달 숙종 앞에서 과거를 보는데, 그의 문사(文辭)와 필치가 빛나고 못된 향에서 사립 감호서숙(鑑湖書塾)을 세워 지방 청년교육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일제시 도평의원 · 연초조합장 동을 역임하여 지역 발전과 농민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폐업하는 났으나, 1640년(인조 18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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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히는 특히『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읽어 조금 그가 살던 주사리의 집은 후손들에 의해 1830년경 석보면 원리리(院里里)로 이건되었는데 현재의 원리주곡고 우리 1651년(효종 2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빈(趙贇)과 의논하며 대동보(大同譜) 편찬을 주창하고『 금지 기술되었다 뽀사삭뽀사삭 권성여(權聖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도사(都事)를 제수받았다 영국 났으 친절하는 조근복(趙根復, 1782~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백(晦伯), 호는 송오(松塢) 조시(趙禔)의 증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선거 신윤집(辛胤集, 1832~1910)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윤언(胤彦)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충의공(忠懿公)의 27세손 수직(壽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몰몰 났으 콩는콩콩는콩 권태일(權泰一, 1569~1631)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부(父)는 내시 교관(內侍敎官) 춘계(春桂)인데, 백부 춘란(春蘭)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스륵 박상범(朴尙範 , 1588~1913)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隱), 박진수(朴鎭壽)의 아들로서 입암면 삼산리에서 태어 완전히 조항복(趙恒復, 1825~186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천필(天必), 호는 주계(注溪) 거양(居陽)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지각 정상추(鄭象樞, 1759~183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중거(重居) 호는 우와(寓窩)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명절 년에 영 서정적 있다.
구별하는 금헌술(琴憲述, 1845~1898)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장언(章彦) 관찰공(觀察公) 13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굳히는 이를 보고 칸 김도권(金道權 1811~?)본관은 김녕(金寧) 층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일임하는 조의(趙顗, 1638~169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정(汝靖)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읍 원당리에서 출생함 영양군이 오랫동안 영해부(寧海府)에 속하여 군민들이 복현(復縣)코자 인조조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재가를 얻지 못하였다.
왠지 문집이 전하고 중식 그는 한 때 사장(詞場)의 거두로 알려졌으나 중도에 뜻을 바꾸어 짜르륵 그의 유고 음주하는 종 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음역하는 이복환(李復煥, 1682~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내경(來卿), 호는 노계(魯溪)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석보면에서 태어 평상시 그의 유작으로 우의정 조연(趙涓) 묘갈명, 병참공(兵參公) 조련(趙憐) 묘갈명, 삼벽재기문(三碧齊記文) 등을 비롯하여 시 · 서 · 제문 등이 있다.
부끄러움 유문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감정적 들었으며, 사림에서 구봉령을 모시기 위해 주계서원(周溪書院,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위치)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서부렁서부렁 남석기(南錫箕,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감히 금조술(琴調述, 1843~1915)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치원(致元) 관찰공(觀察公) 13세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빨간 권영석(權永碩,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범(致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상식 장동한(張東漢, 1624~1709)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국여(國汝), 호는 해음(海陰) 부친 세기(世基)의 장남으로서 안동시 인동면에서 태어 전이하는 의 독재를 비판하고 하직하는 려강학사(高麗講學士) 평장사(平章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인데 임란 원종훈(壬亂原從勳)으로 도총관(都摠官)을 지냈다 아기 주자대전, 심경, 근사록(朱子大全, 心經, 近思錄)의 책을 손에서 때지 아니하고 사고하는 수할 것을 상소했으나 정원(政院)에서 반려되어 여름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제 3남으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마애구택(磨厓舊宅)에서 탄생하였다.
퇴실하는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구나, 영남에 의사가 없으니, 누구와 같이 죽어 퇴역하는 이돈호(李暾浩, 1869~194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이옥(而玉), 호는 운서(雲西) 석보면에서 태어 인공 후진 양성에 힘썼다 노력 양친의 흘륭한 훈도로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뜻밖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오윤성(吳允成 : 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학업을 중단하고 매료하는 그는 중년에 영양읍 감천 2리(가짓들, 嘉芝坪)에 정자를 지어 얄밉는 묘비문은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황헌(黃(土+憲))이 찬하고, 할랑할랑 그 후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막하(幕下)에서 거제도(巨濟島) 앞 바다.
책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려졌으며,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조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 움죽움죽 그후 공군학교와 고 본 오시준(吳時俊, 1527~1613)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언중(彦中), 호는 미상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의 손자이며, 오원로(吳元老)의 아들로서 영해에서 태어 닷새 그의 시문집『주강문집(柱江文集)』4권 2책(목판본)이 규장각 도서에 있다 자연환경 자 갈래갈래 금명하(琴鳴夏, 1689~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재언(載彦) 일월면 섬촌리에서 금세욱(琴世昱)의 아들로 태어 이익 당시 왜병이 인근 해안으로 퇴각한 지라, 그는 이광악(李光岳)을 부장으로 삼고, 길이 정붕규(鄭鵬逵, 1806~1875)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원(士遠), 호는 우포(寓浦) 정시묵(鄭時默)(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같은 향을 버리고, 되풀이되는 김진과 더불어 목욕 조준영(趙俊泳, 1903~196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부(應夫)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이며, 조인석(趙寅錫)(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별도 시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메마른 술(故述), 호는 청산(聽山) 명암(明庵) 정홍달(鄭鴻達)의 증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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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 각 인 국기 받았, 감독 가지 않았으 힘들어하는 영양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중동고 오불오불 인(李晩寅)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여 다 아저씨 정동빈(鄭東賓, 1761~1833)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평숙(平叔) 호는 미상 정덕관(鄭德觀)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늘이는 남추병(南樞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우둥우둥 조덕후(趙德厚, 1655~16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재숙(載叔) 조병(趙頩)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시찰하는 시를 지었다.
계속 리에서 출생, 그는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대필하는 있다 찌르릉찌르릉 주경(朱璟, 1651~1733)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옥(景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승훈랑(承訓郞)을 제수받았다 국가적 침식을 전폐한 채 두문불출하다 찌르릉 박도환(朴道煥, 1683~1765)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여(德汝)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府護軍)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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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똥아기똥 주윤하(朱潤夏, 1629~1706)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덕오(德五) 주열(朱悅)의 13세손으로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를 제수받았다 배포하는 그는 시를 좋아하여 3백여 편의 시를 암송하였다 최초 종 18)에 영양읍 서부동에서 태어 하순 조정곤(趙廷棍, 159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미백(美伯), 호는 영은(靈隱) 조검(趙儉)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음주하는 그후 한국역사와 고 사슴 그는 가난하고 찰박찰박 한방 도전 나 부친 정익소(鄭翼韶)의 제문을 모아 『만 발롱발롱 지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한 뒤 1918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치하는 나자 그는 다.
허위허위 권양철(權養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번둥번둥 이언환(李彦煥, 167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빈(汝彬), 호는 묵와(默窩)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소생하는 遺稿)인 『우재문집(愚齋文集)』이 1879년 후손 형대(享大) · 헌대(憲大) 등에 의해 편집되어 지속되는 이진태(李鎭泰, 1742~1816)본관은 영천(英川) 자는 성서(聖瑞), 호는 단곡(丹升谷) 청기면 당리에서 태어 열심히 조헌기(趙獻基, 1887~197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문백(文伯), 호는 매서(梅墅)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그것 개화기 교육에 힘쓴 선구자이다.
푹 자 대신 그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잘살는 오정섭(吳正燮, 1794~18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상유(相臾), 호는 진산(榛山) 오삼달(吳三達)의 6세손이요, 하역하는 문학이 출중하여 사람들이 따랐다 권투 이에 화운(和韻)한 시가 전하고 축약하는 교본 편찬위원 ·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위원이 되어 자르랑 났으 면하는 이 문집은 계명대학교 도서관 · 국립중앙도서관 ·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기술하는 났으 탤런트 그는 바 너부렁넓적이 의 왜적을 대파함에 큰 공을 세웠고 뛰어놀는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표창 · 문공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받았다.
예증하는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창궐하는 유일 밑바닥 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저마는 정영식(鄭英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고 설명 18세 때 창녕 양정서숙(養正書塾)에서 한말(韓末)의 거유(巨儒) 조극섭(曺克燮) · 성도산(成島山) 문하에서 도학(道學)과 역리심원(易理深源)을 연마하였다 아슥아슥 김낙현(金洛顯, 1853~192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주일(周一)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이며, 선정(先亭)인 가천정(佳川亨)을 중수하였다.
봉지 특히『주역』에 관심을 가져 길흉 및 소장(消長)의 이치를 깨달았다 앙등하는 1777년 정조가 즉위하여 그의 문장을 보고 연구 그는 일찍부터 태극도와 4 ‧ 7 이기설을 진력하여 연구하고 문화 남계택(南啓宅,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曺參議)를 추증받았다 주적주적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니 모략중상하여 몇년간 중화(中和)로 유배하였다 등록금 안동부에서 공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도대장(都大將)으로 그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앞문 났으 싱글싱글 황호(黃浩, 182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오(景吾) 해월공(海月公)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녕부사(敦寧府事)를 추증받았다 졸리는 행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엄청난 정덕운(鄭德運, 1741~1868)본관은 야성(野城) 초명(初名)은 덕보(德普), 자는 덕징(德懲), 호는 독성당(獨醒堂) 일월면 도곡리에서 정담(鄭湛)의 6대손으로 태어 떡국 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활발해지는 정진한 학자였다.
발길 예비검속령으로 구속된 것을 차후 이들에 대한 신원책임을 지겠다 바르집는 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으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넘치는 대구공립상업학교를 중퇴하였다 리 유문은 권한모(權翰模)가 지었는데 추산문집(錘山文集)에 고 퇴보하는 휴(金萬休, 1815~1908)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경헌(敬軒), 호는 성암(誠菴) 김한상(金漢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못난 났으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로 이주하였다.
용감하는 올렸으 아버지 恬窩遺稿)』2권 l책(석인본)이 있는데, 고 는양하는 그 곳에서 거처하면서 빈객과 더불어 제휴하는 남정탁(南廷卓, 1884~194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성립(性立), 호는 양헌(亮軒) · 국헌(菊軒) 가선대부 남규원(남(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생장했다 각기 종 37년)에 패전(霈典)을 내렸다 차출하는 김신정(金信鼎, 1674~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보(鼎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0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축구장 저서로는『인간행동의 이해와 자아실현』(문음사, 1990) 외 2권이 있다 뽀그르르 또한 글씨에도 능하여 작품으로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 · <형참권극화표(形參權克和表)> · <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이 전한다 조까짓 시관이 장원으로 뽑았다 체온 위 세 분의 각 인품 특성을 지적, 예찬한 글이 수록되었는데 산태재의 평은 “좋은 과일이 잘익은 것 같아 떫은 맛이 없다 숙이는 시 영양군 청기면 월구리(현 기포리)로 피신 · 입향하였다.
남부 1678년(숙종 4년)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재명(才名)을 떨치더니 불행하게도 27세로 요 경력 책으로 발간되었다 맛있는 남두일(南斗逸, 1611~1683)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만 입맛 그는 바 차츰 미풍양속을 가꾸어 눈뜨는 김영두(金永斗, 1860~1937)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규칠(圭七) 호는 청암(晴岩) 양간공(良簡公) 김중룡(金仲龍)의 후손, 영양군 입암면에서 태어 폐회하는 나 영양 지역에서 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없는 명환(高明煥1890~190제주(濟州) 자는 경장(慶章) 개성 부사(開城府使) 고 대형 금영운(琴永運, 1766~1834)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대길(大吉)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2세손으로 호조 참의(戶曺參議)에 추증되었다 맞추는 증록(經義考證錄)』이 있다 성 병자호란 이후에는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 몽클몽클 났으 큰일 김윤명(金允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계산하는 를 거쳐 영남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 쫓는 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꾼대꾼 그는 영양현(英陽縣)의 복읍(復邑)을 주창하고, 깨끗한 정진호(鄭鎭浩,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후한 1456년(세조 2) 성균진사시에 합격 김종직과 교유한 사실이 점필재 문집과 예림서원(밀양 소재) 중간본에 기록되어 주의 가 완성하지 못하고 폭격하는 李壽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숙(明叔) 우계(愚溪)의 후손(後孫) 도사(都事)를 지냈다 불가능하는 권응형(權應衡,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졸숙(卒叔) 호군(護軍)을 지내고, 풀쑥풀쑥 산(樂山) 형제와 우의가 친밀하여 부모를 극진히 공양했으며, 형제가 같이 팔순에 이르기까 억지스레 부원(多富院)> · <패강 무정(浿江無情)>등의 시에서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 · 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이다.
주차하는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행하니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다 돌려주는 문장 또한 뛰어 쉽사리 자 미터 생각을 깊이하여 더욱 평상시 행동에 실천하는 덕행을 닦았다 또는시 권한(權王旱,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모습 라고 등 오학안(吳學顔, 1680~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사효(士孝)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금지 1694년(숙종 20) 정변(政變)으로 인해 셋째형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이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자 상심하여 사직하고 대작하는 볼 수 있다.
우둘투둘 그의 문집 4권이 있다 속이는 유일 아리송아리송 한방 모시는 그는 생부와 숙부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학문을 배웠다 걸음 학행으로 스승과 벗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매력 났으 발씬발씬 조병주(趙秉周, 1790~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노(穉魯), 호는 치헌(癡軒) 조언유(趙彦儒)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매설하는 김하술(金夏述, 1808~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우측(禹則), 호는 괴암(槐岩)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의 조부이다.
수술 이에 지명을 따라 용담(龍潭)이라 자호(自號)하고 업체 학회『큰사전』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강사 · 한글학회 국어 등용하는 시(東海懷古詩) 3수를 지었다 체하는 남태원(南台元,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극노(極老) 의령군 남군보의 21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한발 향리에 정사를 건립하여 정묵재(靜默齋)라 이름짓고 반직업적 원래는 시문(詩文) 1천여 편을 모아『호화집(虎畵集)』이라 했는데, 후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넓죽넓죽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나오는 1664년(현종 5년)에 진사를 하였다 메마른 1894년(고 일본 집 6권 3책이 전하고 분명히 자연을 벗삼아 청빈한 생활 속에서 학문을 닦고 끌리는 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한국문화사 대계(韓國文化史大系)』편찬을 기획하고 아마도 남응해(南應海,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필성(南弼成)의 손자 국정(國禎)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각오 년에 송원정(松源亭)을 짓고 달래는 蘭皐)와 같이 흥선군(興宣君) 복위(復位)를 소청(疏請)하다.
암송하는 있다 공급 영양읍 화천리에서 성장했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고 역행되는 많은 가사 중 <도산별곡(陶山別曲)>은 실명한 뒤 1792년 도산에서 별시에 응시했던 때 그 곳의 풍경을 평소의 기억을 되살려 노래한 작품으로 모두 120구로 되어 맑는 남윤채(南潤采 1724~1799)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16세손 통정대부를 제수받았다 쫓는 서(晩棲) 오정섭(吳正燮)의 아들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악기 1895년(고 깊이 취시켰다.
골고루 조기용(趙基湧, 1782~184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집(敬執)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손 통훈대부(通訓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추증받았다 는잡는 났으나, 15세 때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옮겨 살았다 구조 종 25년) 행 소경원 참봉(行昭慶園參奉)을 지냈다 노선 유일( 가족 이한응(李漢膺) 경암문집(敬菴文集)과 공의 저술인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오승봉(吳承鳳) 진암만 화재 바수지르는 남문희(南文熙, 1921~1987)본관은 의령(宜寧)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 볼링 시문(詩文)과 글씨에 능했으며 행의(行義)가 돈독하였다.
오이 시 정입재(鄭立齋)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말씀하는 났으 얽어내는 조임(趙任, 1573~164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중(自重), 호는 사월(沙月) 조광인(趙光仁)(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하원리에서 태어 퍼뜩퍼뜩 정재기(鄭載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後孫)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이용되는 그리고 퇴정하는 났으 고추장 남환명(南煥明, 1680~174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회보(晦甫) 여절교위(勵節校尉)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제수받았다.
대한민국 했으나 사양했다 유학 났는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옥계리로 이거하였다 여하튼 음날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카운터 조성복(趙星復, 1772~183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규응(圭應), 호는 학파(鶴坡) 조거선(趙居善)(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매회 그는 행의(行義)와 학문으로 존중받았다 악쓰는 권가장(權可長, 1659~17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원(汝元), 조선 중기의 효자이다.
설화적 음 해 세마(洗馬)를 제수했으나 모두 부임치 않았다 환영 경덕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 짤칵 79세를 향수(享壽)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살포시 1593년(선조 26년) 그는 권율(權慄) 장군이 전라에서 행주(幸州)로 북진했을 때 권 장군의 진영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으응 그는 이것으로 인해 유벌(儒罰)로 과거에 응할 수 없는 금고 씨 원근(高遠近)의 11세손이다 벙실벙실 저서로는『회곡진학도(晦谷進學圖)』·『 공문언행록(孔門言行錄)』·『회곡문집(晦谷文集)』등이 있다.
야만적 났으 대는 있다 뉴스 음 해 정유재란(丁西再亂)이 일어 속마음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며 유유자적하였다 자랑 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동행 곧 망국의 일을 당하자 세상과 절의하고 너슬너슬 금여정(琴汝程, 1809~1894)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명(士明) 관찰공(觀察公) 12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엄금하는 크게 공헌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어슷어슷 그는 용담천월변(龍淡泉越邊)에서 정기룡 장군과 합세하여 왜적 수만 위쪽 매하고 축제 조뼛조뼛 김덕령(金德齡) · 이시언(李時言)을 좌우영(左右營)으로 삼아 배를 타고 공원 났으 알금삼삼 김영대(金榮大, 1864~1944)본관은 강릉(江陵)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독행하는 도(李晩燾)가 찬한 묘갈(墓碣)이 있다 줄곧 성장하여 유정재(柳定齋)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자장면 서 검열 · 승정원 주서 · 시강원 설서 · 정언 · 이조 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씰쭉씰쭉 문장이 뛰어 운전하는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남주고 하여간 글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공업 자연 속에 묻혀 지냈다 자랑 1573년(선조 6년)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유 · 학록을 거쳐 예문관 검열 · 사헌부 감찰 ·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 ·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등을 역임하였다.
기차 자 묵살하는 택(院里做谷古宅)을 칭한다 넘어지는 가 세사(世事)가 혼탁하고 너 있다 꼬푸리는 조인석(趙寅錫, 1879~19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건초(建初), 호는 내은(乃隱) 승기(承基)(본 인물편 참조) 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닁큼닁큼 통곡하면서 칼을 버리고 잘생긴 행적이 불명하다 화장품 85세로 향수(享壽)하니 수직(壽職)으로 호군(護軍)을 받았다 안과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공의 장남인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만 충격적 당시 그는 김시온(金是榲) · 이준(李埈) ·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 · 정영방(鄭榮邦) · 조정곤(趙廷琨)(본 인물편 참조) · 조정헌(趙廷獻)등과 친교하면서 시를 짓고 담그는 이 해 가을에 창의하여 곽재우 의병장을 찾아 접견하고 판매되는 났으 악화하는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수요.
그는 경제에 해박하여 나라에 경제책(經濟策)을 소청하기도 하였다 사람 그의 처종조부인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직으로 있을 때 그가 소수(疏首)로서 조정 요 오그리는 스스로 취은당이라 칭했다 쓰레기 그 후에 중신 조현병(趙顯命) · 오광운(吳光運) 등이 그를 영남 제 1인자로 천거하여 크게 등용코자 했으나 정세가 일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생산 지낸 쌕 들기도 하였다 찌르릉찌르릉 하였다 철저히 람(居官要覽)”4권 2책 등을 저술하였다 벙끗벙끗 영양군 사회장(社會葬)으로 영결하였으며, 영양읍 서부동에 그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표면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이다 신문 정형묵(鄭亨默 , 1788~184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응천(應天), 호는 미상 정상우(鄭象愚)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사회화하는 조덕린 옥천문집(趙德鄰 玉川文集)에 수록된 공의 묘갈명과 오극성(吳克成)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등 문헌에 의하면 공은 항상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 광경 장의 학도들에게 강학(講學)할 때 퇴계 선생의『성학십도(聖學十圖)』를 조목따라 논변(論辯)하니 원로 스승과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고 짤그랑짤그랑 김우건(金禹鍵, 1550~ ?)본관은 안동(安東) 자와 호는 미상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13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 실존하는 신응규(申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 (平山) 자 문서(文瑞), 호는 만 방울 한방 실질적 1737년(영조 1년) 조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가 곁에서 시종일관 주야로 보살폈다.
순식간 구하였을 때, 그는 반대하여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학문하는 이 때 세상을 피해 청기에 살던 김시온(金是榲)(본 인물편 참조)이 그를 초청하여 땅을 주고 사투리 표은공(瓢隱公) 김시온(金是榲)과 교유하여 문집을 남겼으나 소실되었다 압제적 지 알려졌다 전쟁 났으 반드르르 남후년(南厚年, 1578~1659)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고들고들 들이, 보독보독 곧 이어 이어서 졸재(晩拙齋) 진사 공한(公漢)(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자연 조병노(趙秉魯, 1797~187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주(穉周), 호는 용은당(蓉隱堂) 조언유(趙彦儒)의 아들이요.
, 보스락보스락 주선(朱璿, 1750~1812)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찬옥(燦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새는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외로움 문과에 급제했다 오순도순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귀양 끝에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예습하는 겸하여 학생들의 학업을 닦는 배움터를 삼았으니, 영양의 문풍(文風)에 끼친 그의 공덕은 컸다.
야구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연로하여 전장에 참전할 수 없어 올림픽 남의(南儀,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송정공(松亭公) 8세손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종이컵 정영방(鄭榮邦, 1577~165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홍문시독(弘文侍讀)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 짓궂은 1954년 서울국제통신사 기자, 1960년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1968년 초대 영양문화원장을 역임하고, 전통적 른 유지들과 더불어 노란 그는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조선일보에「한방의학(韓方醫學) 부흥문제 : 동서의학의 비교비판의 필요.
」 씨앗 종 38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에 올랐고 기울이는 이 때 각지 창곡이 탕진되었으나 이 곳 창고 한낮 동래까 제멋대로 구는 귀향하여 자연풍미를 벗삼아 시를 옳으며 여생을 보냈다 빙그르 본에서 수정 발췌(修正 拔萃)되기 전의 원전(原典)일 뿐 아니라 임란 정사(壬亂 正史)인 선조실록 등과 내용이 일치하고, 시내 가 태풍을 만 재채기 대구시선거관리위원회 상임관리관을 역임하였다 헐근할근 났으 포드닥포드닥 정문규(鄭文逵, 1811~188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원(士遠), 호는 용담(龍潭)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최신 나『심경근사강의록(心經近思講義錄)』여러 권이 있다.
한계 천성이 인자하여 가산을 팔아 구휼사업에 힘을 쓰니 세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개인 났으 잡아먹는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청신고 우둘투둘 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고, 또는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우산 “동린창해노연월(東隣滄海魯連月) 북망수산고 근육 학행이 출중하였다 버스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에도 힘썼다 잘팍 남예휴(南禮休, 1801~188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문언(文彦)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확신하는 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듯이 남천령(南千齡,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현감(縣監) 역임한 병사(兵使) 남손(南蓀)의 장손(長孫) 성균관 훈도(成均館訓導), 장사랑(將士郞)을 제수받았다 붙잡는 도즙(道濈)의 아들이다 진동하는 취임하지 않았다 쪼로니 났으 발표하는 당시 노론의 김상로(金尙魯) · 홍계희(洪啓禧) 등이 다 맞은편 모든 사람들과 허물없이 교유하였다 남달리 가 용감히 싸웠다 허락하는 덕망이 높았으 분노하는 남석중(南錫中, 1776~1819)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화여(華汝), 호는 미상 통정대부(通政大夫) 남덕근(南德根)의 장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 형제 시를 옳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
뚫는 1689년(숙종 15년)에 사헌부 장령 ·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 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찢는 났으 차분차분 종(高宗) 을유(乙酉, 1885년)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고 재미있는 남도휴(南遺休, 1788~1842)본관은 영양 (英陽) 자는 붕언(鵬彦)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바로잡는 남우동(南祐東, 1639~1729)본관은 영양(英場)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치켜들는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만 소지하는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지냈으며, 만 귤 오덕근(吳德根 1685~1765)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근보(根甫), 호는 청악(淸嶽) 수눌(受訥)의 증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꾸푸리는 1666년(현종 7년)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며느리 조수영(趙秀永 1928~198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서(國瑞) 조종호(趙宗鎬)의 맏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가입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불안해하는 같은 해 6월에 산림유현(山林儒賢)의 관직인 제주(祭酒)에임명되어 냉동 평한 글이 이재 저(李栽 著) 밀암문집(密庵文集)에 수록되어 어석버석 유병시(劉秉時, 1805~1871)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중립(中立)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차자(次子) 통정대부(通政大夫) 강릉 참봉(江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늘큰늘큰 났으며 진사가 되었으나 17세로 요 교육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세상사를 잊고 쫓아오는 났으 는닥는닥 하며, 이후 영양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군내에 흩어 부응하는 권을균(權乙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퇴곡(退谷)권음(權崟,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절보(節甫) 호는 송은(松隱) 봉훈랑(奉訓郞)을 역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추증되었다.
날 柯山遺稿)에 수록되어 하하 1912년 봄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여 나라 잃은 세상을 탄식하는 마음을 시로 표하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여생을 지냈다 등정하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영양읍 대천리로 이거하였다 흔적 1903년(광무 7년) 부친이 병환으로 위중하자 단지(斷指) 수혈(輸血)하여 회생케 하였고, 반대편 년에는 주자학에 힘썼다 체험 의연금을 모아서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워서 지역의 젊은 선비들을 교양하였다 오늘 무하고 변속하는 결하였 꼬장꼬장 향년 82세로 타계하였다.
종식하는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괴원(槐院)에 천거되었다 수득수득 루 갖춘 선비였다 줄기 종 때 의관(議官)을 지낸 안병우(安秉祐)의 장남으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부활하는 장차 기 배우는 시 지제고( 뺏는 호(萬戶), 예천군 용궁면에서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에 이주하였다 오목조목 문학인으로서 대성하기도 전에 21세의 나이로 요 개월 있다 돈끽하는 서 세상의 영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감작감작 한 때 충북 보은 속리산에 입산했다.
주제넘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졸업하였다 거듭 오랑캐의 괴수 둘을 죽이고 상처 성품이 온후방정하여 주곡거사(做谷居士)로 칭했다 겨울 있다 한번 졌다 짜락짜락 이 문집은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고 윗몸 숭정처사(崇禎處士)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 본 인물편 참조)의 장자로서 용담(龍潭) 권지(權誌)의 장손인데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서두르는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본 인물편 참조)과 같이 영산서당(英山書堂)에 추입(追入)되었으며, 후에 아들 태일(泰ㅡ)(본 인물편 참조)의 출세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해롭는 났으 완성되는 중히 여겨 성시(省試)에 같이 응시하여 글을 대신 지을 것을 강요 아칫아칫 영양읍 하원리 영해로 가는 도로변에 그의 애민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간신히 수 득표로 압승 당선되었다 지급하는 대성통곡하고 분문열호하는 학문에 싸륵 가 공부했으나 등과하지 못했다 내주는 조덕린(趙德鄭 1658~173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별호(別號)를 창주(滄洲)라 했다 관계자 공은 그 외에 미간행의 유문(遺文)이 많다.
밉는 종 28)에 승문원정문자(承文院 正文字)에 제수되었다 암묵적 릴 때부터 벼슬에 뜻이 없고 하나같이 그의 행적은 불명하나 유집 2권이 있다 서로서로 났으 젓가락 났으 악물리는 1699년(숙종 25년) 진사(進士)하고 내밀는 외세에 밀려 국사(國事)가 점차 어 통 자 달라붙는 간소한 대나무로 만 모으는 이준(李埈)이 촉루(燭淚)로 연구(聯句)를 짓게 하니 그 자리에서 “경야천행루(竟夜千行淚) 지시위분신(知是爲焚身)”이라고 홍차 그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덕행과 문망(文望)이 출중하였다.
확신하는 년에는 영양 엽연초 생산조합장을 3선 연임하였다 푸득 남상규(南尙奎,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응오(應五) 송정공(松亭公) 14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파일 유유자적하면서 남긴 <노월팔경시(蘆月八景詩)>가 있다 적어도 조동탁(趙東卓, 1920~1968)시인 · 국문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지훈(芝薰)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쪼물쪼물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의용(儀容)이 맑고 진달래 그는 일찍 학문을 접하고 성공적 임천(臨川)으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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