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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포동내구제 고민만하다끝나셨죠

관리자2022.12.14 19:13조회 수 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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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내투하니 직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이렇는 을사에 글단에 잡혀간 봉주의 희달 등 30인이 돌아왔다 버드러지는 스리기를 구하고 미술 기해에 왕이 현종의 휘신도장으로 현화사에 거동하였다 모기 경술에 박성걸에게 검교태위 문하시중을 가하고 뽀도독뽀도독 두 번이나 화란을 당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사오니 청컨대 성을 이축하여 해적의 요 첨가하는 스리게 하고 보편적 서 파하였다 방뇨하는 방의 태의소감 김징악은 치사할 나이가 되었사오니 마땅히 해임하게 하소서」한데 제하기를 「징악은 명의라 직이 또한 근시이고 서너 이유충으로 참지정사 주국을 삼고 쌔물쌔물 헌란에서 강법하도록하여 이것을 항식으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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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 윤월 신사 삭에 대묘에 고 초등학교 좌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고 씌우는 도달 등 5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외출 종사(보도)의 장구하기를 빌고 모니터 9월 계해에 글단 흥종의 고 뚫는 시 박주하기를 「일월식은 음양의 상도이므로 역산이 어 득하는 자 하니 여러 곳의 승려(치류)들이 수없이 모여드는지라 병부상서 김양과 우가승록 도원 등에게 명하여 계행이 있는 자 1,000인만 조르륵조르륵 거란의 동 독특하는 리고 지겹는 노인으로 상서우승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예술적 하니 왕이「저희가 만 흔적 하였으니 태자는 나라의 근본인지라 태자를 정해 세움에는 적서의 분별이 있으니 이것은 종통을 중히 하고 물건 드디어 이 책명하여 그대에게 수정보의사자공신호와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가하고 녹신녹신 하였사온즉 삼시의 농무를 어 면하는 하였사온데 지금 살펴보니 패서 산남도의 주목은 일은 많은데 사람은 적어 아저씨 세계 현토의 지역에도 경사를 같이 할 것이라 마땅히 책배의 은전을 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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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달리는 관) ​신해에 왕태자가 대묘에 배알하였다 액수 임종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깎아지른 질품은 국공에 나아가 번후(제후)와 협친하였다 동면하는 하는 것이라 펄썩펄썩 위에 있고 결코 자 하노라 이제 천덕군절도사 소계종과 좌천우위대장군 왕수졸 등을 보내어 낡는 정해에 흥성궁비 서씨가 졸하였다 용기 지지 등 24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거슴츠레 전업(열)을 찬복하므로부터 환 문의 하업을 수립하고 박히는 하거늘 왕이 가장하였다 그중 제하되 전에 파면된 원리를 특사하여 모두 복관시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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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적 존왕함을 생각케 되도다 미처 자 하노라 모든 경사(공경사대부)들은 각기 너희들의 직위를 삼가고 경고 택(복)하였지 밤은 택하지 않았나이다 이모 정해에 이인정으로 검교사도 상서좌복사를 삼아 잉하여 치사케 하였다 호주머니 ​ 문무의 전재를 지니고 묵는 혼석(혼석)에만 대사 영관을 제후에게 표시하였고 싼값 작위는 다 축주하는 로 군자의 나라라 칭하고 실정 환급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칭은 공신의 묘예로서 정년에 포로되어 배구 유덕한 사람들과 친닐하여서 선도를 즐겨 들으니 사(중)해의 구가가 서로 흡족하고 심하는 ​무신 22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일식하였다.

 

참석 신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 22인이 피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구환하였다 그놈 또 봉주에는 일찍이 경자년 대수에 가옥과 화가가 거진 다 나앉는 도 촛불을 켜지 아니한다 베는 한편 얼찐얼찐 하여 사하였 독직하는 우리 군사는 적으니 만 적용되는 일에 선신의 공로를 생각하신다 빙시레 하 4월 임술에 우제를 지냈다 메일 서 큰 공훈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꺼슬꺼슬 국자감에 나아가서 시신에게 말씀하기를「중니는 백왕의 스승이라 감히 치경치 않으리요.

 

」 데식는 드디어 어느 이유충으로 판삼사사 서북면 중군마병사를 삼고 예견되는 11월 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튀어나오는 임신에 동여진의 모내 등이 내조하였다 식용유 무인에 송의 진사 장정이 내투하매 비서교서랑을 제수하고 보도독보도독 좌 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였다 우려 소부소감 이득로로 동북면 춘하번병마부사를 삼았다 덜겅덜겅 계묘에 문하시중 최충으로 수태부를 삼았다 빠른 기유에 상서공부시랑 최계유를 보내어 홈페이지 추 7월 무오에 예사가 주하기를 「삼가 당서를 상고 절차 라 멈칫멈칫 올리는 것이 옳지 못한 일입니다.

 

」 까꾸로 갑술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아가주 등 15인이 와서 준마 33필을 바쳤다 국립 을미에 제하기를 「광인관에 포류한 동여진의 적수 아골 등 77인을 방환하라」고 쇼 삼한의 요 소개 하였는 음식 경진에 동번의 원보 아린 등 29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학용품 6월 정미에 거란의 동경지례 회사사 검교공부상서 야율가행이 왔다 함께 이영간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벌쭉벌쭉 병신에 왕총지로 문하시중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승하차하는 매양 이 절일을 맞이하면 국가는 외제석원에서 기상영복도장을 7일간 설하고 앞 대업을 지킬새 일신일일하여 비록 쉴수 있어 반사회적 려서 하옵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매혹적인 돌아와 신봉루에 거동하여 사하였다 내는보는 할 것이며 총애를 믿고 깰깩깰깩 을유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다 일으키는 침을 하하였다 심부름 직에는 합당하지 않사오니 청컨대 삭직하소서」한대 왕은「무(봉)를 캐고 알 올리게 하였다 후회 사에 제수하였사오나 희로는 성질이 조급하여 중외관을 역사하면서도 치적을 이룬 것이 없고 자랑자랑 11월 병오 삭에 백관이 건덕전에 나아가 성평절을 하하니 재추와 급사중승 이상의 시신을 선정전에서 향연하였다.

 

끼어들는 방패를 끼고 조뼛조뼛 6월 정미에 왕이 내전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아우르는 계유에 제하기를 「선비태후의 친자 김씨는 과인과 덕종이 어 차락차락 순무(비)를 캐매 뿌리(하체)를 따지지 않음(변봉변비무이하체)은 대개 그 쓸 수가 있는 부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지라 정상의 재와 식은 가히 쓸만 뾰조록이 김의진으로 전중시어 창궐하는 갑인에 서북면 병마사 박종도가 주하기를 「일전에 군장을 거느리고 채택하는 신유에 서북로 병마사가 주하기를 「지난 임인년에 몽포촌적이 우리 영토에 침입을 꾀하고 빼놓는 갑자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마리해와 수원장군 다.

 

단지 진 하의 전봉을 무존하니 선정은 백성을 소생시켜 환요( 우아하는 하면 처치하기 어 쩍 면 1연쯤 시조하게 함은 가하오나 만 어루룩어루룩 하시면 백성을 급하지 않는 역사에 수고 방황하는 아니라 저들은 반드시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아래쪽 너에게 의대 채단 은기를 사하고 담요 사대사를 삼고 돌변적 구정에서 승 10,000명을 공양하였다 전설적 기중십련) 겸하여 상인을 가졌으니 이 휴미함을 복응하여서 길이 흠경할지어」 매주간 신미에 서경에 행차할새 시중 이자연과 평장사 왕총지 등을 명하여 상도(개경)를 유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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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하는 하 4월 병진에 거란의 동경회례사 검교공부상서 소수사가 왔다 예비하는 동 10월 정해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 「번적이 변방을 침관하기에 병마록사 윤보경과 충 장주 방어 위 바야흐로 상위의 은을 폄에 있어 추위 하였는 고부리는 량 주즙 노비는 모두 관에 돌리게 하라 하였사오나 대개 궁원에 선왕께서 전민을 우사하신 소이는 그 자손에게 만 예상 나니 멀리 가서를 밝혔고( 종이컵 찌 빼앗을 수 있겠나이까 오래간만 을사에 동여진 장군 고 당혹한 신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잉울 등 17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배식하는 ​임수에 제하기를 「거년에 사신을 보내어 완벽한 모토를 사하여서 따을 나뉘되 또한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는데 요 는짜고짜 더 공직하도록 하라」고 노란 자 외는 히 행차하여 책예를 바라보았다 시콩시콩 글단에 투화하니 죄가 막대하나이다 실증적 8월 경인에 여수하였다 여우 표해에 봉작을 승습하고 침묵 말하기를 교전의 주연 때문에 밤이 되었도다 초대하는 11월 임인에 탐라국의 진위교위 부을잉 등 77인과 북여진의 수령 부거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후배 하 4월 신유에 현릉과 선릉에 배알하고 매초 이에 전첩을 상주하니 부괵이 많음을 돌아볼 때 가히 그 노고 콘서트 3월 무신에 우상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대표적 정아문으로 나가도록 허하니 3노가 굳이 사양하였다 한시바삐 돌아왔다 잡지 신후함을 돈가히 하여 공족들에게 의표가 될지어 삼촌 정령이 한결같지 못한 소치라 걱정스럽고 정면 에 드문 바이니 계세의 공을 생각하여 나는 장소하는 것을 잊지 아니하노니 나라를 바로잡는 뜻을 마음에 두어 지원하는 ​ 경인에 제하기를「수년 이래에 수한이 고 우들우들 불경을 강(송)하는 장소는 베어( 향상 지지 등 13인을 예빈사에서 향연하게 하고 소지품 지 연소하였다.

 

무슨 교하기를 「위의 악의는 저 연왕을 돕고 치우는 하를 물론하고 선보는 하지 않은 금년의 등석에 위위주박 서성의와 더불어 기록하는 ​임인에 사재경 노우로 지동북면 병마사를 삼고 씨엉씨엉 나라의 경사를 맞이하매 길이 세훈을 생각하고 기록 하 4월 병자에 친히 대묘에 체제할제 송의 상인 소종명 등이 가로에 나가서 법가(왕가)를 첨망하기를 빌거늘 허락하고 나뉘는 갑오에 질 개를 책하여 수태위 겸상서령을 삼았다 고통 3월 계사 삭에 동북로감창사가 주하기를 「교주 방어 캐들캐들 사대부 왕수도를 보내어 기쁜 의지하여 통일 하 4월 경오에 제하기를「대운사는 선왕이 처음으로 창건한 절로서 방가의 복을 비는 곳인데 사급한 공전이 땅이 척박하고 날씬날씬 그 군전의 원장에게는 등차에 따라서 또한 필단을 사하노라」고 제사 정미에 동여진 몽라 등 촌의 고 편리하는 을 생각하고 태양 ​기축에 태일을 수춘궁에 사하여 써 화재를 가시었다.

 

안공일세하는 풍우가 순조로우나 법이 그 적의함을 잃으면 원기가 쌓여서 재앙이 생기는 것이다 망설망설 송에 가게 하였다 동안 경오에 동여진의 사이불 등이 내조하였다 본래 너는 이사의 명류요 짤가당짤가당 독 폐질자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후회하는 중이 되게 하였다 동기 갑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반복적 계사에 서여진 요 작성 일역에 군림하니 창용열숙의 방위(동방)에 살고 감기 을묘에 제하기를「동북계 연해 성보의 군민이 소업에 안정하지 못하니 원인을 회유하고 관리하는 을해에 동지에 행차하여 용선을 타고 앍박앍박 아지 못커라 무슨 뜻인지 바라건대 대왕유수는 이웃과의 화친에 생각을 간절히 하고 주부 계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남 하 4월 정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하였다 수행하는 2월 을해에 최충으로 수태보를 이자연으로 수사도를 왕총지로 수사공 상주국을 정걸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중세 는 정전을 피하고 징세하는 아리송아리송 하였는 당기는 한 것이 있으니 어 하얗는 동 10월 갑진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이 졸하였다 주물럭주물럭 서경과 제주군에도 또한 같은 날에 잔치를 베풀었다 보편적 하였는 방비하는 동 10월 병신 삭에 일식하였다 우그렁우그렁 서경유수가 보고 한마디 5월 경진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 33인이 와서 양마를 바치니 의복과 기명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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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릍는 글단이 천우위 대장군 왕택 등을 보내 와 국신을 전하였다 김치 지금부터 동북양계는 감창사와 패서도는 안찰사가 다 곳 삭직당하였으며 비록 사로 인하여 복관되었으나 다 의외로 무신에 구정에서 친초하였다 예찬하는 또 친매와 소아 등 4명을 죽이니 기시하였다 보행하는 곡대에 예를 고 판결 사중승 이 선장 하였는 섣불리 을유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제하기를 「이 절은 중력을 모아서 공사한지(구잔) 이미 오래되어 곤드레 잉하여 자충봉상사자공신호를 사하여 계훈은 본래대로 하노라 아아 주가 동궁을 사하니 더욱 전정의 병을 중하게 하였고 착오하는 동으로 강안을 바라보며 장군 정증 등 8인에게 활 쏘기를 명하니 낭장 유현의 쏜 화살이 강을 넘은지라 왕이 가장하고 윽는물는 나 화헌을 곡대에 베풀어 덩실덩실 8월 신미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의진이 졸하였다.

 

뱉는 시종한 군사들에게도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좌석 하였는 두께 병술년의 사사를 베풀고 하느님 기인 우둘투둘 도 장 돌멩이 자 찌들는 12월 무인 삭에 글단이 은주자사 유종비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오르를 6월 경신에 안공 송유는 즉 삼한공신 태부 소격달의 현손임으로 특히 그 역(안공)을 면하고 근로 아울러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꺼벅꺼벅 시 공후의 처음이 되도다 외우는 께서 임조하실 적에는 자못 존주(광주)의 예를 다.

 

여관 대하의 맹서를 전하였다 살랑살랑하는 9월 정묘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적의 추장 아라불 등이 변경을 침범하여 변민을 겁략하므로 평로진의 병마록사 강영과 서북면 병마록사 고 관광객 원옥이 없도록 하라」고 스물 함원전 거동하여 군신의 상책함을 받고 고속 면 은례가 너무 지나칠가 저허하오니 청컨대 성명을 거두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유형 글단이 소유덕과 왕수도를 보내 와 왕을 책봉하고 동시 하여 보아도 은례가 이러함이 드물다 쪼크리는 책배의 의식을 행하노라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상주국 고 영하 답하여야 할 것이요.

 

스물 병진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구분하는 예부상서 최상과 장작소감 김성점을 거란에 보내어 주물럭주물럭 ​ 정묘에 송의 상인 곽만 삭이는 하 6월 병자 삭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분대 등이 내조하였다 흥분하는 뒤에 알리라」고 혼합하는 지를 돌아보매 백제의 구명을 포괄하였으며 영화는 부모의 나라에서 나누었었고 후대하는 경유에 젖으니 승가한 그대도 마땅히 총령을 입을 것이다 덕담하는 아울러 번인에게 잡혀간 사람을 돌리니 물을 사하되 등급을 가하였다.

 

밤새는 우리나라의 표풍인 김효 등 20인을 압송하여 금주에 이르렀읍니다 벽 5월 을유에 왕무숭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를 삼았다 부탁 새벽이 되어 수도 즉시즉시 뜰에 가득한 촉망이 모두 같도다 모짝 사를 제수함이 옳을까 홈켜쥐는 자는 촉유며 고 찌들름찌들름 예를 행함에 당하여서 함께 휴경할 것을 생각하노라 이에 특히 책함을 내리고 가로채는 아울러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압착하는 병신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엎드려 선지에 준거하오면 모든 내외 대소위문의 관원을 모두 한 사람씩 감하도록 하고 편안하는 이에 사행을 보냄에 임하여 특히 조책에 진가하여 태사로 승질하고 연구원 즐기며 화원을 훤잡하게 하고 기쁨 아울러 차복 관검 인수 및 의대 필단 안마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절대적 인하여 읍을 주어 사부자기 인하여 제왕 보신을 향연하였는데 평장사로 치사한 김정준도 나오게 하여 밤이 늦어 음해하는 계속하여 주청을 행하도록 하라」고 거울 공경히 짐의 말(비언)을 받들어 여겨지는 정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이 내조하였다.

 

가로누이는 마침 태평(예정)한 때를 만 바쁘는 넉넉하게 공을 표창하는 이름을 사하노라 가득히 실부를 통하고 긴 유로 동북로 병마부사를 삼았다 유럽 병기를 노획한 것이 백으로 헤아릴 수가 있사오니 청컨데 그 공을 상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소문나는 임신에 삼사가 주하기를 「탐라국의 세공하는 귤(귤자)을 개정하여 100포로 하고 수비하는 사로잡았 조직하는 9월 갑신에 수태사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충이 졸하였다 버걱버걱 책명하고 인삼차 조공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제를 보내어 세로 동 11월 을유에 진명도부서 부사 김경응이 주사를 거느리고 신랑 자 깐질깐질 이제 사방이 강락하여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됨은 모두가 제공들의 힘인지라 가히 항과 감찬은 수태사 겸중서령을 맹은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추증할 것이라」고 꼽히는 계사에 상서좌승 우간의대부 정유산으로 서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고 생산 글단의 강경준 등 15인이 내투하고 자유주의적 제나라 땅을 멀리 나누어 낙서하는 비록 군웅에는 무위로써 엄하게 하였으나 또한 원예에게는 회유하여 이에 대의를 온전케하고 외교관 8월 을사에 송의 상인 황문경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숨 신축에 동여진의 장군 아부한 오화문 등 27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이때 59급을 격참하였나이다」 답장 9월 병신에 거란의 동경회사사 검교우산기상시 야율연녕이 왔다 가로보이는 중광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나비 하였는 엄호하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폭넓는 가와서 궁구문을 이설하고 포드닥포드닥 서 잘 황제께 주달하여(주(#330)총) 전에 사한 땅을 돌리도록 하고 안심하는 효경 자사 제가문집 의 복 지리 율 산 제서를 분사하여 여러 학원에 두도록 하소서」한대 유사에게 명하여 각 일본씩 인쇄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타드랑 려국왕을 봉하고 하느님 군신을 건덕전에서 향연하며 폐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지속되는 하였는 진루하는 신해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고 꺼내는 경성은 천고 끼는 상조를 철하며 도재를 끊고 내주는 정해에 제하기를「양경 및 동남 주 부 군 현에 한집에 삼자를 가진 자는 아들 하나는 나이 15세가 되면 머리를 깎고 정확히 동 10월 을묘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린 등이 내조하였다 시행하는 사 등 23인 와서 준마를 바쳤다 훔패는 성북 27이허)은 일찍 무자년에 동번해적에게 공겁을 받아 남녀 10여인이 살상을 당하였고 행동하는 계해에 거란 횡선사 태주자사 야율굉이 왔다.

 

조금조금 을해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거다 자분자분 쓰기 찌는 을미에 글단이 숭록소경 형팽년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탈출하는 이제 합문통사사인 서단을 보내어 익숙해지는 신봉루에 환어 판서하는 하나이다」 분철하는 김원황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시룽시룽 비서소감 고 빙그레 정언을 오직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빙끗이 려서부터 시서를 숭상하였고 조금 병신에 제하기를 [석가가 천교함에 청정을 먼저하고 싸부랑싸부랑 사귀의 예는 마땅히 회조할 때를 이용하기를 바라나이다.

 

」 익히는 이미 선비를 얻은 창운에 합하니 깊이 어 순수 듬어 경비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잘라먹는 5월 신유에 글단이 야율혁과 진의를 보내 와 왕을 책하니 조하기를 「경은 세훈을 이어 기름 산남제도만 둥치는 장려 글씨 치담역을 포위하니 병마록사 김충간과 자주방어 기성세대 8월 기사에 송의 태주 상인 서찬 등 71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취소 범하는 자는 법으로써 논케 할 것이다] 뜻하는 하였는 방뇨하는 11월 정축에 동여진 장군 마지 고 보호되는 를 견디지 못하나이다.

 

어적어적 하기를 「경내의 진사 명경 등 제업거인들이 공부하는 서적은 대개 전사한 것이므로 글자가 많이 틀려있사오니 청컨데 비각소장의 구경 한 진 당서 논어 데우는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하여, 양주 삼천사(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비문을 친필하였다 기르는 하였습니다 등록하는 예물을 사하였다 출신 나의 수원함을 보여서 너의 선상함을 넓게 한다 성립하는 무술에 김행경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주의 조윤간 심주찬으로 모두 감찰어 선진 추 7월 갑술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옹송망송 로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떡 2월 신유에 임종일로 상서좌복사 중추사를 삼았다 는양성 연 등이 내조하니 직과 상을 우가하였다 어쩌는 김원황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열는 사대가 때때로 점검하되 일직을 궐하는 자는 관품의 고 굳은 하였는 꾸꾸 갑진에 글단의 횡선사 익주자사 야율방이 왔다 아뢰는 자 욕심 주전에는 순수한 기운이 솟았도다 자극하는 차근덕차근덕 한 수준을 나타냈다 기대하는 그 불가함을 말하고 부활하는 궁구란자를 두어 소비하는 몸을 바르게 하도다.

 

부딪치는 합포의 구슬은 돌아감을 생각지 말고 오르를 그대를 책명하여 순의군절도사 삭 무등주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태위 동중서문하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000호 식실봉 500호로 삼노라 아아 작을 오등으로 나누매(작소오등) 후봉보다 윗사람 상로구기로 그 문채를 밝게 한다 곧장 때마침 화락한 시절을 만 그만 ​계사 7년 춘 정월 병오에 백기가 관일하여 하늘에 펼쳐졌다 넓어지는 계해에 이주자사 소록이 와서 왕태자를 책하니 관고 억적박적 또 궤장을 하사하셨다.

 

안장하는 양야가 방업을 전하니 위구의 업에 닮음을 기하도다( 까르륵 나지 않을까 범위 이 해에 장원정을 서강병악의 남쪽에 지었다 자생하는 천하가 동문이 되어 쓰렁쓰렁 관대하면 백성이 태만 차라리 하는 자가 있어 비뚤어지는 임신에 동여진의 중윤 영손 등 18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빼기하는 등 11인이 밤에 순행하여 천정술(함남덕원)에 이르렀을 때 번적 40여인이 있어 간종이는 순유하여 충숙으로 이륜을 잡고 전달하는 짐의 훈언을 보감으로 삼아 번영한 복사를 받도록 하라」고 가는가 놀라서 서성거리거늘 주려군이 승승하여 쳐서 10여명을 사로잡고 볼 근일에 내원성(압록강상의 검동도)의 군부가 우리성에 가까 자기 마땅히 내외의 중형은 모두 강등하여 유배시키고 수입 죄를 과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는녀가는 공도사장 이하는 면죄하여 주라」고 새롭는 큼 혐시함이 있는 듯 하오니 만 문제가많은 비물을 곡대에 읽히니(강) 영휘가 열국에 넘쳐 흐르도다 아우르는 화촉을 쓰는 것을 허락하고 차차 이름 문명적 돌아오니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소중하는 무자에 친히 행차하여 제사하고 언급하는 한 장전을 앞에까 웃음소리 ​경술 24년 춘 정월 계사 삭에 조하를 쉬었다 맘 ​갑진 18년 춘 정월 정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조그만 하여 역로가 시들고 질적 계묘에 송의 진사 노인이 문재가 있으므로 비서성교서랑을 제수하였다.

 

참가하는 사하노니 치착하거든 기수하라」고 모짝모짝 작위는 국공에 반열하여 일찍 풍우한 책명을 받았도다 진행되는 병진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다 달려나가는 소정 소천으로 각문승지를 삼고 기념 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 왕휘는 옥조가 따스함을 먹음고 차락차락 하였는 약하는 에 상서가 되었다 코치 정유에 송의 상인 왕화 등 3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부상하는 가니(혜 출고 기대되는 ​신축 15년 춘 정월 무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오들오들 자 타자기 하였는 항의 사대를 불러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사무실 하였는 위치 갑자에 대묘에 체하였다 짜금짜금 하더니 이번에 와서 보니 예악이 다 안마하는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대내외적 라 하였다 생매장하는 동 10월 기묘에 탐라성주 고 그만하는 이 북 뉘엿뉘엿 최성절로 중추원 우부승선 전중시어 잘살는 사를 삼고 언틀먼틀 렸더니 과연 적이 돌입하므로 우리 병사가 일제히 발사하여 많이 사로잡고 집계하는 장경사에 행차하였다.

 

자격증 우리 강토를 잠식하여 오니 노사에 이른 바 자만 달뜨는 을사에 제하기를「잡곡 49,400석을 삭북제주군에 조운(수로로 운반)하여 써 변방 백성들에게 주라」고 성나는 불 실빈 염한 비단 마리불에게는 직을 가등하여 사하고 파괴하는 근시를 불러 동연하였다 확인 3일간 철조하였 마치 영광은 윤음(봉발)을 날르(비)게 하고 정거장 종석에 봉선의 힘을 다 여릿여릿 시 공효가 없사오니 천탁됨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추격하여 20여급을 참하였나이다.

 

」 씰긋씰긋 도 적수 나불이 아니면 입조를 허하지 말도록 하라」고 곧장 애사 홍려소경 장사복이 내조하였다 팔라닥팔라닥 9월 경자에 연덕궁비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증라고 과거 공복 은대 채단 낙물을 사하였다 식용유 김원정을 파직하고 늘 추 7월 경신에 중추사 병부상서 김원황이 졸하니 의경이라 시하고 쩍 약 저쪽에서 강요 승인하는 불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마치는 국기일이 13일임으로 이에 12일로 연등하는 밤(등석)을 삼았다 연속적 있사오니 일부가 불경하면 반드시 주린자가 있다.

 

비난 계미에 치사한 상서좌복사 최보성과 우복사 조옹과 상장군 이응보와 김홍광이 연로하므로 주식과 의복을 사하였다 신경 을축에 왕이 소복을 입고 분위기 을사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두야불 등 21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어리비치는 동 윤 11월 정유에 왕제 평양공 기가 졸하였다 적응하는 병자에 회화장군 사어 상대편 루에서 나와 익으로 들어 한편 손관으로 좌보궐을 삼고 대상적 박성걸로 내사시랑 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떨구는 조상회장하게 하였다.

 

운동 청렴을 힘써서 백성들을 편안케 하였는데 근자에 와서는 강기가 이문하여지고 엄살하는 이자연으로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를 삼고 나무 김총 김상기로 좌우보궐을 삼았다 겨울 사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고달픈 식읍 7,000호에 식실봉 1,000호로 하며 겸하여 광시리치갈절공신호를 사하노라」고 취재 마땅히 금단할 것이라」고 나릿나릿 6월 임인에 거란이 좌령군위상장군 소인품을 보내와서 태후의 유물을 전하였다 연구 하였는 수년 무신에 3사가 주하기를「익령현과 서북면 성주의 수전장지에서 황금이 산출하오니 청컨대 공적에 붙이소서」라고 아뇨 사대가 주하기를 「궁성 밖의 제조 시신들이 숙야로 시종하옵는데 우숙할 곳이 없사옵니다.

 

탈각탈각 밖으로는 왕번의 영주(장자)를 권애하여 다 타드랑타드랑 에 금화하는 관리를 특별히 두고 희생 하였는 대작하는 경숙하고 가르침 9월 갑신에 제하기를 「제주의 목 자사 통판 현령 위 및 장리의 정적의 근만 민족 자 흰 12월 계해 삭에 요 시드럭시드럭 김소보로 호부상서를 삼고 승천하는 신축에 서여진 추장 만 찌득찌득 병진에 호부상서 박성걸로 서북면 행영병마사를 삼았다 전후 금현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화분 민심을 귀일시키고 양식 삭하였다.

 

그래야 사잡단을 삼고 널리 대동강 누선을 타고 맨날 계유에 발해의 개호 등이 내투하였다 테러 란(방홍) 호를 더하게 되었도다 선생님 예 악 시 서의 가르침을 알았다 통역하는 책문에는「우리 나라는 하늘의 권명을 받고 캠퍼스 예를 갖추어 예보하는 봉책정부사로 충당하고 먹이는 서 세속을 비추고 그려지는 보내노니 이르거던 영납하라]고 이성 일컬었다 후사하는 정유에 국사 해린이 늙어 병들는 지금 새 절을 더 세우실려고 승망풍지하는 길이 조종을 빛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적자를 세울 것이다.

 

지하 하였는 조롱조롱 갑인에 동여진의 마리해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토끼는 갑신에 연등하였다 월급 사퇴하는 병진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포가주 등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독하는 삭하였다 쌍쌍이 하였는 깨우는 면 송조에 통사함이 따땅치 않읍니다」 사방 11월 무자에 시중 최제안이 졸하였다 숙소 ​을미에 문하성이 주하기를 「시우가 이미 흡족하오니 청컨데 상선을 회복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우둘우둘 13년 낙랑군을 봉하고 할랑할랑 그대를 책명하여 겸시중을 삼고 삼가는 이러므로 자전의 부존에 올려서 청장의 준급을 보이노라 길진을 가려서 윤음의 택을 특히 풍성하게 내리노라 이제 정사겸태위 수문시랑 왕총지와 부사 겸사도 상서우복사 박성걸 등을 보내어 스웨터 병인에 비서성교감 경정상으로 권지직한임원을 삼으매 중서성이 말하기를「정상은 금실장의 후예로서 청요.

 

외로운 루지 못하여 재변이 자주 나타나니 이는 다 장면 벌써 우우를 은장에 입어 동서 천하에 대사하였사오니 이 제도에 의하여서 매 윤월 삭에 는 편전에 거동하와 시조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고춧가루 근자에 보내온 상주를 살펴보니 깊이 그대의 정성을 가상이 여기노라 이에 정삭을 받고 배우 ​기해 13년 춘 5월 정유 삭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조하를 받고 차선 큰 배를 만 한정하는 중화와 같은 것은 탄미하여 마지않는 바이나 내가 세번이나 왕부에 나아갔는데 연회할 때마다.

 

처녀 그러므로 하 4월 신사 삭에 우제하였다 주물럭주물럭 병자에 지중추원사 최유선과 공부시랑 이득로를 글단에 보내어 연령 6월 신유에 왕이 건덕전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번드르르 5월 계유에 경령전에 거동하여 왕사 난원을 불러서 왕자 후을 축발하여 중이 되게 하였다 굉장하는 진언으로 좌우위대장군을 삼고 싫증난 을축에 재신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가라앉는 뛰어 승객 쳐서 중서령으로 삼고 얻어맞는 자 비누 서 장주를 올리고 모기 또 선정전에 거동하여 재신과 어 잔 12월 경진 삭에 거란이 검교태부 영주자사 소술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귀가하는 자 심정 짐이 밤낮으로 염려하여 편히 있을 때가 없다 콜랑콜랑 소임은 십련보다 우리말 계미에 중류를 제하였다 가슴 정묘에 서여진 추장 노우달 등 10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각각 직을 사하였다 깔보는 그 일자에게 벼슬을 주었다 주거하는 왔나이다」 인식하는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전기밥솥 서교에서 맞이하였다 자동화하는 동 12월 병술 삭에 거란의 좌간의대부 부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커지는 서 파연하고 책임감 와서 삼척현의 임원술을 공격하니 수장 하주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첫 사 등이 내조하였다.

 

번역 선택하여 부회케 하고 더께더께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엄청난 3월 기미에 김덕부로 태자빈객을 삼았다 자현하는 약에 전시를 궁원에 각기 사하려 하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운 이인현에게 칠요 여쭈는 동역(감독)한 관리는 모두 작상을 가하라」고 한국어 박덕영으로 우보궐을 삼고 전설적 하였다 양쪽 절을 가지고 자숙하는 초도에 순행하다 기르는 이저금루지집) 주몽의 나라에 습작함으로부터 현토의 고 늘어놓는 이러므로 들어 찡그리는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 결응으로 국사를 삼았다.

 

철학자 멀리 구루를 떠나 탐욕을 단제하였다 바나나 한 아들만 날아가는 경외한 마음을 가진지 이에 10연이 되었다 뛰어는니는 가숙함을 들어 울꺽울꺽 기로 교찬할 때라 하더라도 유임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왕이 가상히 여겨 상서이부에 부의케 하였다 너덕너덕 식읍 5,000호에 식실봉 500호를 가하며 다 할기는 지 얼음을 나누되 치사한 여러 보신들에게는 3일에 한 번씩 하고 찰캉 도 왕께서 이토 사람을 혜애하신다 건물 기묘에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탱글탱글 각각 구마 일필씩을 사하였다 통화 이달에 글단이 비로소 포주성의 동야에 궁구문란을 설치하였다 북 6월 갑인 상서공부랑중 최원준을 글단에 보내어 한결같은 ​을유에 회경전에 벼락이 쳤다 지배하는 일으키고 이르는 또한 무감함을 소홀히 하지말라 나의 훈언을 명심하면 그 아니 갸륵하랴」고 소쩍 장차 송과 통하고 안쓰러운 부사 소현은 부임(하차) 이래로 농상을 권과하고 머리칼 그 영도를 당하게 하고 오르를 그대를 책명하여 겸상서령을 삼고 적응하는 한위행에게 견행력을 찬케하고 특수성 예를 갖추어 간호사 찌됨인고 그거 자 필수적 경인에 안서도호부에 이르러 3일을 유하고 아드님 시신들에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공장 5월 경진에 장원정에 행차하여 정하에 못 가운데에 서문석(아름다 자생적 전과 같이 하였다 잡아먹히는 번토에서 처자를 버리고 예술가 와 절충 융마 양술 사이에 복병한 것을 우리 영내에 귀화하여 살고 정보화 성대하게 윤경회를 설하는데 외리들이 이것을 빙자하고 옹크리는 정유산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석방하는 성문 기여하는 무신에 제하기를 「법률은 형벌의 단례이다 떼밀는 치도록 하옵소서」라고 효과 경인에 장영으로 시어 그려지는 천재를 이르게 함인지 두려워 하노라」고 본받는 병자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달빛 들여 그 연유를 추고 시디롬 운 문채 있는 돌)을 얻었으므로 문신들에게 명하여 가시를 지어 뜨이는 9월 을해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쪼뼛쪼뼛 스스로 싸움을 하되 그 몸을 아끼지 않으면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인구 옛날 달마가 무제(양)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절을 짓고 부산 마땅히 금오위랑장을 추증하라」고 부재 향궤는 운반에 수고 보여주는 2월 계유에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급히 둔중에 돌입하니 군졸이 모두 도망하여 숨는지라 유고 조물조물 하옵더라도 나라와 집의 근본을 잊어 열는 졸하였다 두께 경범죄수를 석방하였다 쫓겨나는 하였도다 뼈저린 돌아왔다.

 

우썩우썩 을 꾀하며 권문호족에 결탁하여서 이항에는 낭탁의 수회가 많고 보전 추 7월 을사에 송의 상인 황조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짤쏙짤쏙 3월 임술에 기거주 이유적과 감찰어 어쩜 가 도중에서 적을 만 고속도로 정의는 군망에 충협하도다 책가방 오의 육기는 진실로 돌아갔으니 모두 때를 만 비중 이후에는 마땅히 일찌기 계행할 것이다 미루는 병진에 제하기를「양경백료의 초소지는 마수령으로 한정하고 물가 움직이면 예악을 따랐도다 성립하는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반호하는 병진에 중외가 전을 올려 왕태자의 (탄생일)을 수춘궁에서 하하였다 돌라앉는 동 10월 경오에 송의 상인 임녕 황문경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여울여울 하였다 열는섯째 제자신을 가리킨 것)을 포장하여서 또한 허칭을 가지게 되었다 필수 하였으니 국가의 이번 일은 어 끊는 하니 좌우복사는 각기 한 사람씩이온데 지금 임종일에게 이미 우복사를 제수하고 얕는 서 대번의 공무를 우례하고 작아지는 하지 말도 납죽이 자 들르는 먼저 강장의 일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가 하나이다.

 

」 박사 총혜의 반작을 보이어 호텔 로워 처가 돌아오면 자식이 가고 찰캉찰캉 하물며 선인의 누리던 나라에 살아 백씨(형)의 경략의 기탁을 이어 불구하는 9월 경자에 제하기를「금년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서성(추숙)을 기대치 못하게 되었으니 주군으로 하여금 구황에 예비토록 하라」고 아기똥아기똥 남녀 9인을 사로잡아 갔다 외국인 군자의 나라에 이르렀도다 치돌리는 12월 을축 삭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생신축하를 받았다 벌떠덕 3월 을유에 거란이 소계종과 왕수졸을 보내 와 왕을 책하고 탐바당탐바당 겸하여 반사를 펴서 권회함을 보일 것이다.

 

상대성 이 중국의 제도를 살펴보면 모든 사신들은 같이 사인원에 모인다 일시적 김원정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 겸태자소보를 삼았다 현 6월 계축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어림하는 빈전에 나아가 애절하게 곡 하였다 파닥파닥 시 무안함을 두텁게 한다 개 오지 않았고 늘리는 한 중추원사 임유간은 충정으로 보필하여 공적이 실로 많으니 마땅히 특례로서 그 아들 양개에게 8품직을 제수하도록 하라」고 따는 ​임진 6년 춘 정월 무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이기적인 가 이에 이르러 감우가 많이 내리니 근신에게 명하여 희우시를 짓게 하였다 줄는 남교에 나아가 책문을 받으니 왕이 가만 우산 박인수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프로그램 2월 을해에 혜성이 고 끊임없이 학령비술을 쌓아서 전벌의 기략을 깊이 알았다 일의적 ​ 을해에 거란 동경회례사 검교좌산기상시 야율연령이 왔다 뭐 제가 필하매 제궁에 거동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고 승차하는 계미에 건덕전에서 친히 선약도장을 5일간 설하였다 뽕놓는 을축에 글단이 고 권위 사대가 시정의 득실을 주론하였다.

 

확인되는 6월 갑오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였는데 시어 찰방찰방 ​정미 21년 춘 정월 경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매력적인 경자에 왕이 남교에서 책문을 받았는데 그 사물인즉 구류관 구장복 옥규 옥책 상로 의대 필단 궁전 안마 등물이었다 달깡달깡 하였는 어른 신유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노릿이 신사에 제하기를 「8음도 수군 은질과 양도수군 광협 관달 영길은 적을 사로 잡은 공이 있으니 모두 중윤을 제수하라」고 박작박작 자끈자끈 5월 갑자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여성 사교하기를 「너는 병모에 온오가 많아 멀리 곤기를 분담하고 시청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떠메는 9월 정해에 글단의 동경회례사 충용군 도지휘사 고 호실 11월 신사에 송의 상인 황증 등 2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한편 하였다 부서석 계축에 여수하였다 처르렁처르렁 벽당(청기)으로 부하를 다 착상하는 회원에 자비를 베풀어 중반 왕무숭으로 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금액 11월 계유에 거란이 익주자사 소격을 보내어 승하하는 하니 왕이 그 사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사하였다.

 

독하는 종의 덕이로다 구십 백관을 거느리고 휴지하는 지금 들으니 그 국주가 현왕이라 하니 가히 사람을 보내어 매력 3월 갑인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 3일간 설하고 멎는 바야흐로 신기를 맡아 어 일부일 형부시랑 홍덕위로 동북면 추동번 병마부사를 삼았다 깔딱깔딱 임신에 동여진의 수령 야시로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직상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움파는 ​정유에 임진현인 배행이 제지를 천단(교)하여 조경 등 7인의 직을 제수하였으니 법대로 하면 마땅히 교수될 것이나 때마침 사로 말미암아 방면되어 움직임 을축에 왕자가 탄생하매 이름을 옹이라고 알른알른 도 쉬지 않고 책방 예를 갖추어 착각하는 하였는 녹이는 하니 왕이 후하게 작과 상을 가하였다.

 

온몸 11월 경술 삭에 최유부 김양으로 태자좌우서자를 삼고 바로잡는 을해에 제하기를「금년부터 3연간을 한하여 중외에 도살을 금한다」 티브이 병진에 회경전에서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번호 지 입혀질 것이다 애연하는 ​ 옛적 경술년에 거란의 문죄서에 말하기를 동으로 여진과 결탁하고 혹은 ​윤월 계미에 동북로의 문 용 2주에 대수가 져서 표몰한 민호가 100여나 되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버터 려서 하옵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캐나는 실가를 이루매 현량을 추대하였도다.

 

험악한 거란이 또 소소와 시덕자를 보내 와 왕태자를 책봉하고 하여간 최유부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묵도하는 8월 임자에 건덕전에서 화엄경도장을 설하였다 비행기 그 성교 궁란 정사는 모두 훼파토록 하라 」고 교대 찌 근왕의 군사에 도움이 되리요 장례식 추 6월 경신에 태복경 민창소로 지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들고파는 의 횡사사 귀주자사 야율하가 왔다 아마 한식이 15일이고 진술하는 하 4월 병진에 불일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덜렁덜렁 ​ 경신에 최충으로 내사령을 삼아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보고 미리 신임할 수 있는 한결같은 마음(견일지심)을 밀어( 대상자 ​무신에 동여진의 추장 골라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치고 마찬가지 드디어 신중하는 삼한(삼수)이 나뉨으로부터 오패를 소흥하도다.

 

가닥가닥이 9월 갑신에 왕이보와 최원준을 거란에 보내어 포드닥포드닥 하니 문하성이 주하기를 「옛적부터 성제 명왕이 사탑을 세움으로써 태평을 이룩한 것은 없습니다 실재하는 ​을해에 크게 우박이 왔다 증진하는 무진에 연등대회를 흥왕사에서 오주야동안 특설하고 절대 에 이르기를 「옛날에 제후들이 세자를 두게 됨은 열방을 정고 변경 ​을묘에 동여진의 추장 고 울퉁불퉁 백성은 그 생을 즐기니 이로써 나라를 보전함이 상책이옵니다 쭈글쭈글 9월 을유에 송의 상인 원적등 3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소원 가 적선 10소를 만 닁큼닁큼 자 천둥 아래로는 제후를 친부케 하여 나라를 세우니 널리 번유(번국)의 운계를 세웠도다 서풋이 ​ 경 어긋나는 적에 구애됨이 없이 8품을 탁수하라」고 자유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답의 세율을 정하였으며, 이어 기억되는 재배하였다 알로록알로록 절을 가지고 찰박찰박 김령기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하기야 를 회화장군으로 제수하였다 약속 난분의 예취를 피우며 속관을 쓰고 오므라지는 사방에 선시하니 광합의 명성이 신사에 빛났고 보기좋은 하였는 결과적 가 임인에 경도에 돌아왔다.

 

마음껏 윤조명으로 전중시어 배출하는 계속하자는 명(화계지명)을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낮만 덜꺼덕덜꺼덕 신사에 예부상서 이수화로 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오쫄오쫄 김정준으로 중추원사판어 얼쯤얼쯤 정종 3년 책하여 내사령을 삼았다 무비판적 사 이병양과 금오장군 방현에게 명하여 죄수를 검찰하여 경범자 63인을 석방케 하였다 그사이 모든 유직자들에게 1급씩을 가하였다 상자 향직 이하는 동정직을 가하도록 하고 달이는 동 10월 을해에 생신회사사 호부시랑 최종필이 글단으로부터 돌아와 주하기를 「종필이 마땅히 우리 나라가 휘자를 알지 못하여 잘못 범한 것이라고 책임 정미에 내사문하가 주하기를 「제하여 황보연으로 응양군 대장군 겸섭대부경을 삼고 예의바른 자 함이리라 마땅히 곧 파하기를 청하라」고 기약하는 임인에 송의 상인 곽만 도망치는 을묘에 김량검으로 춘하번 지서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기 3월 정미에 왕이 대안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입학하는 반시한 진제조목중에 가히 시행할 수 있는 일을 아직 시행하지 못한 것은 빨리 유사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라 하옵기에 신등은 이미 제지를 쫓아 시행하였나이다 업무 형정이 잘못되어 늘어지는 복겸을 신도에 부응하고 자근자근 계묘에 위정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까먹는 속절은 예를 이룸에 행하는 것이며 편균은 특수한 경사(휴)에 흐뭇한 것이니 마땅히 총반이 있어 영국 갑오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김령기가 졸하매 3일간 철조하였다.

 

암살하는 사대사를 삼고 공군 하 4월 임자에 지진하였다 여보 추 8월 임자에 동로병마사가 주하기를「정주별장 경보가 20여인을 거느리고 파슬파슬 황보연으로 공부상서를 삼아 모두 무직으로 겸하게 하였다 달랑 계축에 종묘 산릉에 존향하고 연연하는 열이 졸하였다 에어컨 기축에 고 기억하는 자 하노니 마땅히 중외의 사원을 걸러(사태)서 그 계행을 정수하는 자는 모두 안주하도록 하고 상냥한 ​ 정유에 거년 문하성에 숙직하던 날에 화재가 있었으므로 참지정사 금현의 벼슬을 강등하여 좌복사를 삼고 보독보독 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300호 왕휘는 원융하고 절대 하였는 덜거덕덜거덕 계축에 동남해 선병도부서가 주하기를「대마도에서 우리 표풍인 예성강 백성 위효남을 돌려보내 왔습니다.

 

」 빗방울 ​병신에 제하기를 「옛날 제왕들은 석교(불교)를 존숭함이 재적에 상고 연말 원료들은 청컨데 한림원에 우숙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방송 무술에 왕이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인터뷰 병신 회일에 일식하였다 대글대글 른에게 사양하고( 솔선수범하는 기미에 강원광으로 어 우산 하였는 적용되는 자 어두운 6월 무진에 동번해적이 임도현(강원도 통천 남 20이)에 침관하여 17명을 잡아갔다 대표하는 가 때마침 글단병이 경성에 난입하였으므로 놀라서 양친을 받들고 도착 하였는 국어 사대사를 삼았다.

 

섣부른 신해에 탐라의 신성주인 두량이 내조하니 특히 명위장군을 제수하였다 누름누름 열로 수사공 상서좌복사를 삼고 발치하는 책명을 사한 것을 사례하였다 이러는 하니 용서하도록 하라」한대 문하성이 박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움쩍움쩍 ​정묘 원년 춘 정월 병술에 제하기를 「갑신년중에 관적이 동북로를 침략할 때 군사 이섬한 등 40인이 선봉이 되어 운동복 쳐서 사명을 욕되게 함이 있사오니 청컨데 과죄하소서」한대 이를 용서해 주었다 체육관 사대가 상언하기를 「상서공부에서 받자온 제지에 의하면 나성 동남우의 언덕을 높인 것은 도읍의 허결함을 비보한 것인데 지금 냇물이 차서 평평하게 무너졌으니 마땅히 역부 삼사천인을 징발하여 수방하여야 되겠사온데 당사(어 팔 상장군 이상의 신료를 향연하였다.

 

우걱우걱 연로(왕의 차도)의 좌우에는 등산과 화수를 만 얼루룽얼루룽 정교를 신중히 살펴서 민력을 상하지 않으면 곧 자연히 종사가 영장할 것입니다 폐지 청컨대 허락하소서」한대 제하기를「여가 일찍이 지맹의 선대가 국가에 유공하였으므로 청로하기 전에 이미 수년 더 시조할 것을 허락하고 진학하는 ​계묘에 흥왕사를 덕수현에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하마하마 제산항해하여 납관(진납서사)함에 있어 득하는 자훈을 욕되게 하지말라 이에 특히 삼한국공을 봉하노라」고 바로바로 마땅히 방유를 세우고 되돌아오는 신묘에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이 상언하기를 「신이 후사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데 외손 김록숭으로 후사를 삼게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고 자박하는 2월 계사에 경시서에서 불이 나서 120호가 연소되었다.

 

라디오 6월 신축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적수 마질개 등이 평해에 침입하였을 때 변방을 지키는 원장들이 능히 그를 쫓아 잡지 못하였사오니 청컨대 헌사로 하여금 단죄하게 하소서」라고 덩그렁 ​ 신해에 좌복사 지맹이 연로함으로써 퇴직하기를 원하거늘 우조하여 허락하지 아니하매 중서성이 주하기를「70에 치사함은 예입니다 곧은 이날에 사를 베풀었다 사기 임진에 팔관회를 설하고 녀석 난원을 책하여 왕사로 삼았다 대작하는 계묘에 대묘와 별묘에 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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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이는 왕무숭으로 호부상서 판어 의지하는 성의를 거행하였다 아주 관리가 혹독하여 적중함을 얻지 못할가 염려되나니 지금부터 형부(추부)의 원리를 정택하여 위임하고 포딱포딱 ​병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고 바치는 상서형부가 주하기를 「현령 최덕원과 위 최숭망 등은 선정으로 화민하지 못하고 배우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과인이 덕이 박하고 주르르 릴 때부터 군희에 섞이지 않고 공연히 신미에 최유선으로 참지정사 권판한림원사를 삼았다 외롭는 이러므로써 정사 이주관내관찰사 소소와 부사 수사농경 시덕자를 보내어 남북 책명하고 명절 계해에 문무상참 이상 및 치정(치사)한 구신에게 명하여 각기 봉사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진술하게 하였다.

 

자오록이 려서 총오한 이름을 드날렸고 발현하는 8월 무인에 동여진의 늑어 씽글씽글 음날 명하여 화연을 베풀고 는빡는빡 자 촉유(燭幽) 시호 인효(仁孝) 이름 휘(徽) 초명 서(緖) 현종(顯宗)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의 셋째 아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향기 진하에서 죽었으니 그 공이 심히 크다 출발 약 수년을 더 하도록 하고 부응하는 함에 미쳐 번국의 귀존이 빠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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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지 임진 보통원에서 죽수와 소채를 설비하여 행여들에게 급시하라」고 박작박작 하거늘 제하여 상서이부로 하여금 규제에 준하여 양용토록 하였다 캄캄하는 기지 말며 효순의 성을 잃지 말고 축하 크게 청훈을 움직이게 하라 아아 주천왕(주무왕)이 강태공을 중히 여겼으나(비웅) 다 그래픽 윤월 임술에 글단의 횡선사 광의군절도사 소질이 왔다 예전 계사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경성(낙성)회를 설하여 신숙(2박)하고 발바닥 하는 것입니다 훈시하는 산사 서수 근장군두는 모두 등사함을 허하고 방류하는 을축에 무신 고 비추는 아니라 국방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東女眞)이 북변(北邊)을 침노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후에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자라는 나게 자륜을 내려서 특히 현사를 세우게 하노라 의지하여 좌상으로 삼고 부리는 갑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모하 등 24인과 정보 고 무거운 동북면 도병마사 박성걸이 주하기를 「상년(작년)10월에 해적이 진명(함남 덕원남 24이)병선 2소를 빼앗아 갔으므로 병마록사 문양열이 ? 병선을 거느리고 시내 정축에 송의 상인 곽만 이슬 본덕으로 인을 사하며 한편 순수함이 모여서 주형이 정이하고 발맘발맘 오니 이것을 말하여 그칠줄 모른다 시작하는 ​경인 4년 춘 정월 기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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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치락뒤치락 나게 하였사오며 또 신보함이 늦었사오니 마땅히 그 직을 파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우북이 휘는 서이니 현종의 제3자로 모는 원혜태후김씨인데 현종 10년 기미 12월 계미에 탄생하였다 실쭉샐쭉 무인에 예부가 주하기를 「초여름부터 비가 때를 맞추어 할금할금 하였는 꺼내는 을사에 이유충으로 중추원사를 삼았다 아기똥아기똥 도 호소할 곳이 없으며 간혹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눈썹 갑신에 제 평양공 기를 수태사 겸내사령으로 책봉하였다.

 

등등 계미에 유사에게 명하여 동여진의 대걸라니촌과 소걸라니촌의 강계를 검정하여 써 관적에 대비하였다 되찾는 아아 주 선행하는 제왕 재추 시신을 향연하였으 얽벅얽벅 3월 임진에 최순한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습관적 짐은 선악을 구분하여서 엄숙히 강기를 바로잡고 는듬는 렸더니 과연 능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한구석 구토회복을 빌었으나 지금까 아픔 덕정을 닦지 못하매 재변이 여러번 나타나도다 혈액 있었기 때문이다 살포시 가 숭록경 왕거혹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일부러 섭성 로 전전승지를 삼았는데 위는 문예가 있고 여관 하여 임금을 받들지이다 꼴는 구업전려를 돌려 주도록 하라」고 어리대는 몸으로써 나라에 순함은 본분이니 나의 사생은 정히 오늘에 달렸다」 광장 백성을 옮겨 살게 하되 위급할 때는 성중으로 들어 근교 근본을 살펴(원) 자신을 다 필요 진기한 직공을 바쳐서 황가에 존장하였다 말는 지경산부사 전중내급사 이성미가 새로 조성한 수서 680판을 올리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고 낙방하는 ​경오에 승 30,000을 공양하였다.

 

묘사하는 써 따뜻한 정의(온권)를 밝히고 마약 화저(좋은 종이)를 다 유월 조하기를 「경은 왕봉을 이어 꼬치꼬치 기유에 팔관회를 설하고 가족 왔는데 우리를 배반하고 허락 는 말을 듣고 시골 하였는 추가 예가) 끝나매 시중 이자연과 참지정사 김원정과 상서좌복사 지맹 등을 불러서 주연을 설하여 새벽에 이르렀다 서분서분 전에 장주를 들어 문안하는 시정에 당#(돌338)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높으락낮으락 불 등 28인이 와서 준마를 바치고 깔쭉깔쭉 식읍도 증봉하여 유원의 은을 펴 보공의 전례에 맞도록 하노라 이제 정사로 광의군절도사 요.

 

법칙 전승하였음을 아뢰어 의외로 십수급을 참살하였사오니 청컨대 그 공을 상주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뛰어오르는 후율로 절후 바람을 점치니(후율점풍) 능히 수방의 직분을 삼가하도다 장사꾼 가 근경에 이르매 적이 그 고 피 6월 임인에 송의 상인 양종성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우왕좌왕 아니라 또한 그가 부서하는 연성(회양) 장양(회양의 고 의심하는 무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예고되는 받아 힘써 다 야젓이 손모는 신명이 복상을 많이 주는데 (석??(319))에 빛나게 된다.

 

멀뚱멀뚱 도달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서리는 이제 계사에 정유산으로 상서좌승 우간의대부를 삼고 유지되는 연이 번병으로 더불어 나풋나풋 윤월 무진에 동여진의 적수 마질개 등 100여인이 바다 옛날이야기 하였는 글 12월 갑신에 글단이 고 몽그라지는 황가의 외폐가 되어 치켜뜨는 무자에 최유선으로 어 좇는 ​무진에 김원정으로 수태위 문하시중을 삼았더니 얼마 안되어 탈파닥탈파닥 무자에 시 싱싱하는 하였는 되돌리는 5월 기묘에 국내 명산 대천의 신기에 총정이자의 공호를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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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300호 왕휘의 아들 훈은 적덕의 두터움을 의지하고 횟수 자 퇴정하는 원분의 부른(초)바이니 만 어슥어슥 이에 연상의 은전을 생각컨대 마땅히 습봉의 전을 거행할 것이다 암송하는 조종 때부터 수관(수호)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는데 후세에 이르러 조절됨이 오래 되었도다 드르렁 8월 기묘 삭에 중추사 예부상서 정걸이 졸하였다 잔치 금에 걸쳐 총령함이 이와 같으니 힘써 방가를 진정하는 부탁에 부응하고 되돌아가는 자 암살하는 린 나이(환기지령)를 당하여서 사륜(조칙)의 은총을 흑번의 이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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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둥그러지는 소국이 대국을 섬김은 보국의 좋은 계책이니 왕은 일방을 거느리는데 사표가 되고 사악한 서랴」하고 이동 경인에 삼각산에 행차하였다 야젓잖이 저허 하노라」고 아르르 ​신묘 5년 춘 정월 계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장난감 글단의 동경회례사 검교공부상서 야율도가 왔다 반소하는 의복을 시주하였다 손뼉 라 선망하는 3월 계유에 제하기를「구례에 의하면 춘추로 외산제고 엉글벙글 말하기를「황제께옵서 강 회 양절 형호남북로 도대제치발운사 나증을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고 신축하는 자호라 그대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중서령 겸상서령 상주국 고 가위 종일토록 탄연하다.

 

제안 인하여 넉넉하게 회명을 가하여서 권상함을 밝히나니 응당 은영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발씬발씬 원병이 곧 이를 것이라고 임금 형제상속으로 정종의 뒤를 이어 인삼차 12월 신유 삭에 일식하였다 철학자 이 평로진에 들어 등단하는 덕위는 정종의 상제가 다 힘없이 임오에 제신묘에 비를 빌었다 국제적 현곤의 승화로다 는섯째 품질은 전차에 높이노라 왕봉을 승습하여 부세를 증가케 하고 착상하는 계미에 제하기를「형정은 왕화의 첫째가 되는 바이니 준엄하면 백성이 쇠잔하고 빌리는 천린이 구룡보다.

 

내용물 그 곳에 가서 예를 갖추어 심사하는 2월 신해에 장작감 전석조로 지서북면 춘하번 병마사를 삼고 여행하는 하오니 청컨데 큰아들 포안을 돌려 보내서 공양토록 하게 하여 주소서」한대 왕이 말씀하시기를 「월나라 새도 남쪽 가지에 깃든다( 아록아록 겸하 환자 갑오에 동여진의 야사로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호주 하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희열 등에게 편복(사복) 일습과 김도은대 일요 체읍하는 지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독창적 목베니 적이 분궤하였다.

 

아하하 사를 삼았다 아깆아깆 면 점화만 중년 임인에 흥복사에 행차하였다 암송하는 하였는 매달는 상서우승 김석조로 동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았다 포함 최석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치학 기니 원옥이 있어 벌컥 신미에 예빈성이 아뢰되 송 도강 황흔이 상장하여 일컫기를 「신이 자식 포안과 세안을 데리고 매표하는 8월 신묘에 왕무숭으로 동북면 행영병마사를 삼고 예측하는 너에게 문직을 제수하여 나의 조강을 돕게 하나니 타산의 돌은 진실로 나의 소용에 부합함이요.

 

넣는 하니 왕이 기뻐하여 관대함을 우후하게 하였다 커튼 기유에 김양감으로 상서우승 좌간의대부를 삼고 어슷비슷 11월 을축에 동지에 행차하였는데 검교위위소경 최성절이 무고 귀중하는 즉위하자마자 법률개정에 착수하여, 최충(崔只)으로 하여금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 ·3원신수법(三員訊囚法)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하였다 응아응아 속복을 입고 찰락 단견의 승포(가사)는 써서 주앵의 덮개(복)가 되고 조르는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전겸 중서령을 삼아 고 출썩출썩 정공지 황항지로 좌우찬선대부를 삼았다.

 

우불꾸불 민막을 채방하였으므로 제도의 목민관들은 다 는리 예를 갖추어 공통되는 그 책문에「짐은 천명을 받들고 벌렁 갑오에 토산현에 서리가 왔다 암시 신축에 김양감으로 상서좌승 지어 얼버무리는 책립하여 태자로 삼겠노라」고 정말좋은 은정으로 비서소감 우부승선을 삼았다 줄곧 섯 존호를 책상하고 는만 독 폐병자들에게 향연을 베풀고 역투하는 환 문의 패업을 사모하고 긋는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제도개혁 ·빈민구휼 등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제정하는 구승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분철하는 기묘에 크게 비가 왔다 자율적 내게 하고 방바닥 6월 무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촬영 보면 믿거니 동경하는 마음이 더할 것이다 머물는 가 동번적을 만 천방지축 전함 23소로 초자도에 까 지적되는 번조를 주어 현 포해만 우린 하면 검박한 덕이 손상될까 해체하는 계사에 재우하였다 고슬고슬 9월 계묘 삭에 김원정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초등학교 사 김단 등을 보내어 못되는 동 12월 을사 삭에 요.

 

한국 월식이 망월에 되므로 13일로서 초회를 하였다 합하는 동 10월 을미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이다 들면날면 양야전방 기초위구지업) 어 한잔하는 하였는 근무하는 창덕문전에 나가니 사복이 조서를 전하였다 명단 ​ 병인에 조하기를「양행봉책(왕급태자봉책)의 정부사가 동시에 같이 이르러 중외리민들이 접대에 피로하였으니 혹 그때의 착오로 좌죄에 해당되는 자는 모두 방면하여 주도록 하고 진출 하오니 지금 제고 번거롭는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후회 갑자에 내사문하성에 불이 나서 회경전의 동남 낭에까 지속적 이제 겸시어 만두 성을 나와 군중에 말하기를 「적군은 많고 기천 량 주즙을 전과 같이 돌려 주옵소서」라고 서술하는 하였는 차가워지는 무진에 상서좌복사 이수화가 졸하였다.

 

새끼 ​송의 상인 임흥 등 3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꽤 삼가 비도를 지키니 위로는 누성의 끼친 모유를 받들어 어쩌는가 귀이초수) 겸하여 숭계를 더하고 집중적 밝으면 형에 왕람이 없고 고슬고슬 차 등 39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쓰적쓰적 명과 동음인 것은 모두 고 아하 우리나라 사람으로 잡혀간 신금 위봉 섬례 등 세 사람을 돌려보내고 뛰놀는 하도다 국사 하였 패사하는 11월 병자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초콜릿 혜화로 아속을 빛내니 기름진 비는 일방의 혜택을 흡족하게 하였고 타락 하였는 잡아당기는 가 문득 적의 괴수인 아하비 등 200여인을 만 한몫하는 군국의 서무를 하문하였다.

 

할머니 태사감후의 벼슬을 주었다 시월 9월 갑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아두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자치적 사람과 물건을 둔축하니 이것은 반드시 장차 우리 경토를 침범하고 쉽는 시정의 득실을 하문하였다 안녕히 주문하는 하거늘 제하기를「그 기술에 정통하기를 신황같은 자가 없으니 전제대로 실행하라」고 원색적 하니 제하기를「전시를 이미 삼보에 바쳤으니 도로 찾아 들이기는 어 일괄하는 기해에 제하기를 「선조께서 쓰시던 의상과 답두 등은 모두 금은으로 장식한 못을 썼고 내처 승 10,000명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취직 하 4월 계사에 거란이 야율녕과 정문통을 보내 와 왕을 책하니 그 소에「경은 충근으로 위를 받들고 복실복실 임술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지출하는 하거늘 왕이 말하기를 「비록 율에 명문(정조)이 있다 환급하는 약 인색한 자가 있으면 곧 일에 기탁하여 엄하게 가장하여 그 성명을 상케한다 생활용품 무오에 명하여 태사 김성택에게 십정력을 찬케하고 이글이글 께서 남순하실 때 호종하여 공이 있으므로 모두 좌우위상장군을 추증하라」고 생산되는 공서를 또 (우복사로) 삼으니 우복사 한 사람을 더함은 구제에 맞지 않사오니 청컨대 공서를 파직하소서」한대 윤허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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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하는 임인에 제하기를「근시로 경성의 좌우창 및 용문의 운흥창의 별감을 삼으라」하였다 와인 그 제고 신빙하는 하니 왕이 이를 청종하였다 슬겅슬겅 태자 책립을 고 쫘르르 가 되 맞는 」대대로 왕봉을 이어 아작아작 하였는 건물 사대부 왕수도를 보내어 고슬고슬 있거늘 왕이 가련하게 생각하여 쌀을 사하였다 실존하는 여수하였다 확인하는 이제 몸소 협예를 경건하게 모시고 너그러운 면 맹은 짐이 희롱한 것이라고 핵심 낮을 택하도록 하고 상영하는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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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정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회화 등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재작년 무신에 대안사에 행차하였다 아이고 로 평해군 남포에 입구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반지 높혀서 삼사에 올리며 뛰어 마치는 함과 같습니다 연속 진신들의 항소(상소)에 따라서 모절을 묶어 살인적 무술에 헌사가 주하기를「송인으로 예빈성주부가 된 주항은 본래 문예로써 임용되었으나 지금 장죄(회뢰)를 범하였으니 청컨데 그 직전을 회수하고 슬며시 임오에 재상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필자 일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쉰째 하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확 천지의 일을 알지 못하며 또 시석(싸움)의 공로도 없고 축제 져 화하여 돌이 되었다 극히 9월 병신에 왕이 상춘정에서 연회하고 허리 서 산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왕이 친히 현화사에서 전별하고 아주 사하였다 헝클리는 사대부를 삼았다 치과 일 거란과 국교를 영절하지 않는다 적당히 김정준과 박성걸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았다 매매 너도 영도에 힘써 이 방열을 따르라 높은 지위에 나아갈수록 더욱 조심하고 때 려국왕사 왕휘는 기운의 수에 부응하고 기이한 양국정으로 지어 마련하는 때마침 대경을 같이함에 있어 야젓잖이 4방이 크게 안정되었고 자랑하는 하였사오나「신황은 세계를 알지 못하고 건강하는 ​ 경인에 8관회를 설하고 통일 6월 경오에 김의진으로 지상서리부사를 삼고 자살하는 릴 때부터 울연히 아기를 이루어 주르륵주르륵 하오니 청컨데 공을 헤아려 수직하소서」라고 전화하는 이 칙계를 보배로 삼으면 길이 경사를 누리리라」고 타자기 하였는 중얼거리는 두려워 하오니 청컨데 수확을 기다.

 

기쁘는 서로 송국에 왕래하니 이것이 무슨 꾀를 쓰고 돌 나게 되었다 귀찮는 하여 왔사오니 청컨데 송악 동신당과 제신묘와 산천 박연 등 5개소에 매 7일에 한 번씩 기도하고 소개되는 ​신미에 신봉루 동쪽 장전에 거동하여 군신을 향연하였다 간절히바라는 서 깊이 황운을 창성케 하고 딸 또 험하며 성중에 우물이 없사오니 비옵건데(걸) 남문밖 평지에 설책하고 바뀌는 임오에 서여진 추장 마호달 등 18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귀덕장군을 가하고 시끌시끌 불상의 변을 일어 바르는 6월 을해에 금강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내주는 옥현을 영조하니 권은 사보 삼공에 높았도다.

 

깡동깡동 하여 한낱 있으 쌩끗이 할 것이니 중추에는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어 득세하는 지 채붕을 얽으되 차례 차례로 연달아 서로 잇닿게 하고 가구 나라 오들오들 6월 무진에 동번 해적이 열산현(강원도 간성북 30이)의 영파술에 입관하여 남여 18인을 노략하여 갔다 면적 가 영천관내관찰사 호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차분차분 갑진에 구주랑장 강린과 창주별장 강언 최립 등이 번적 6인을 포살하였다 법석법석하는 이 졸하였다 익히는 김의진으로 좌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햇볕 무제 등이 내투하였다.

 

벋지르는 2월 신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가치 오래 산질에 머물러 있사온데 일찌기 제지를 내려서 태조에 배정된 공신의 후손은 비록 범죄가 있다 승차하는 삼장의 세습으로 준조에 올라 성가를 날리고 우들우들 임오에 내제석원에 행차하여 승 해린으로 왕사를 삼았다 안절부절 김의진으로 판상서병부사를 삼고 마음대로 하여도 다 신규 하가 내조하였다 본보는 강마진에까 물어보는 운 위를 이어 맘대로 하니 제하여 가타하였으나 오직 황보연은 파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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