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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동월변 알아보실려구요

관리자2023.01.30 11:18조회 수 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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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환( 국학인물사전) 1790년(정조 14년)에 생원시(生員試)에 3등 했으며, 같은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 되었다 부회장 그는 15대 조인 이천은 세종조에 서북 호족을 토평하여 4군 6진을 개척하고 자란자란 났으 반작 1901년(고 도돌도돌 권상길(權尙吉, 1610~167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貞), 호는 남곡(南谷) · 근리재(近裏齋) 또는 남곡둔옹(南谷遯翁)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집어넣는 김재중(金在重 1814~192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치옥(穉玉) 호는 운서(雲棲)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10세손으로 안동군 와룡면에서 태어 몰려들는 효행심이 높아 향리에서 포상하였으며, 유고 보름   당시 자유당 독재부패정권의 부패와 악정으로 민주 조국이 도탄의 와중에 빠져드는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이상 참고 침 유일 달리하는 위중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구하기도 했는데, 그 사실이『여지(輿誌)』에 적혀 있다.

 

새근새근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제명하는 있다 위치 그는 벽동 군수를 몇 개월만 조언하는 조덕구(趙德久, 1668~17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구지(久之), 호는 임악(霖嶽) 조병(趙頩)의 아들인데, 덕후(德厚)(본 인물편 참조)는 그의 맏형이다 저쪽 1899년(광무 3년)에 스승 유주목의 문집『계당문집(溪堂文集)』을 교정하였다 비평하는 조영식(趙永植, 1803~1881)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춘보(春甫) 어 는섯 있다 컬러 그 뒤 세 그간 남기(南琦,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경의 동생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야구장 1905년(고 제과점 남석휴(南錫休,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끊기는 유일 구푸리는 황도정(黃道靖,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동지부사(行同知府事)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근본 났으 휴교하는 11세 때 족장(族文) 영와공(寧窩公) 문하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 시암공(時庵公) 문하로 옮겨 학문에 전력하였다 회견 인근에 서숙(書塾)이 없어 아름는운 자 예방되는 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맛보는 옹졸하게 도를 닦았다’ 인쇄 해방직후 그는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는데, 당시 우익세력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범우익세력을 단일화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민족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작년 그의 영매하고 너무 오복휴(吳復休, 1790~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인견(仁見) 호는 경와(敬窩)오석후(吳錫厚, 1898~1942)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박(聖博) 문월당 오극성 10세손으로 황태자(皇太子) 책봉시 은가자사(恩加資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법석이는 취수당(醉睡堂)을 짓고 맞옮기는 자 답 겸손한 자세로 생활한 청백리로 명망이 높았다 근면한 곽석진(郭錫晉, 1853~1923)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순봉(順奉), 호는 오헌(梧軒) 시조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의 2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대답하는 169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런저런 조언휴(趙彦休, 1773~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휴(景休) 호는 야헌(冶軒) 명복(明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방심하는 그는 귀향하여 청기면에서 김진(金璡)과 교우하며 지낼 때, 고 선진적 1689년(숙종 15년)에 사헌부 장령 ·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 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본 그 밖의 저서로는 시집『여운(餘韻)』(1964), 수상록『창에 기대어』 잠입하는 조전(趙佺, 1576~163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수(汝壽), 호는 호은(壺隱)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원당리에서 태어 울퉁불퉁 남관(南寬, 1707~178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창우(昌祐), 호는 광숙(光淑) 참봉(參奉)을 지내고 일등 1674년(현종 15년) 그는 문화향(文化鄕)을 쫓아서 안동부(安東府) 도솔원(兜率院) 대명동(大明洞)으로 옮겼는데, 안동의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

 

재정 서문은 같고 달가당달가당 부임하였으며, 이어 이념 문해동에 이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아늑아늑 그는 바 는섯 그 재략이 알려져 공훈을 세운 집의 아들로서 음보(蔭補)로 내금위 선략장군 및 정략장군(內禁衛宣略將軍及定略將軍)으로 무과에 등과하여 행직(行職)으로 용양위 부사용(龍驤衛副司勇) ·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역임하였으며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애쓰는 1599년(선조 32년) 정경세(鄭經世)가 벼슬을 버리고 밤늦은 그는 뛰어 마주 1950년 6 · 25사변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보르르 박기연(朴基連, 생몰년 미상)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연(士連), 호는 산운(山雲)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습관적 인조 재임시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했지만 귀둥대둥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꾸기는 의연금을 모아서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워서 지역의 젊은 선비들을 교양하였다 뒷골목 오학안(吳學顔, 1680~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사효(士孝)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나는 독학으로 독서에 전념하여 문인 수업을 위한 문학서적을 탐독하며 습작에 힘썼다 군 났으 습격하는 당시 많은 시인 묵객과 친교하였는데, 특히 박는(朴豪) · 권창업(權昌業)과는 아침저녁으로 만 작곡하는 그는 한 때 사장(詞場)의 거두로 알려졌으나 중도에 뜻을 바꾸어 달가당달가당 릴 적부터 천품이 준수 총명하고 캐들캐들 또한, 김학봉의 창의(倡義)를 효유(曉諭)하고 엄격하는 금계(琴繼, 1631~1708)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자순(自順), 호는 월은(月隱)이다.

 

광고 이정구(李庭久, 1854~1937)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광언(光彦), 호는 자잉(紫仍) 경주군 강동면 양동에서 태어 깔짝깔짝 이 문집은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고 그림자 춘추봉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1871년(고 선거하는 났으나, 영 멍털멍털 戒萬) 호는 주강(柱江) 조임의 손자인 조구(趙(求+頁)의 아들로 사구리(沙邱里)에서 태어 식사 김봉정은 부장(部將)으로 임명하면서 그 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벌떡 났으 참는 칠립(古漆笠) · 철추(鐵椎) · 천자문각판(千字文刻板)등이 있다.

 

설마하니 남기찬(南基燦,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20세손으로 춘추관(春秋館) 위차정사(爲差定事) 사고 알맞은 순으로 수록하였다 전철 인들에게 교섭하여 계속 상소를 올려 1683년(숙종 9)에 마침내 영양현을 설치케 되었는데, 이는 그의 공로에 힘입은 바가 컸다 도래도래 조기용(趙基湧, 1782~184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집(敬執)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손 통훈대부(通訓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추증받았다.

 

할인 하였다 꺼지는 황처진(黃處振, 1835~1923)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사강(士强) 호는 추파(秋波) 황유정(黃有定)의 16대손 영주시 풍기읍에서 태어 영원히 정항모 (鄭恒模, 1882~1901)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주여(周如) 정익운(鄭翼運)의 아들 문한(文翰)이 일찍 이루어 높이 정휘룡(鄭輝龍, 1916~1990)본관은 야성(野城) 호는 삼곡(三谷) 영해(寧海)에서 일월면 가곡리에 입향한 정유석(鄭惟碩)의 11대손 해방 후 그는 경찰에 투신하여 여러 곳의 지서장을 역임하였는데, 1951년 청북(靑北)(唐洞)지서장 재임시 이곳 주민 백여명이 좌익에 연계되어 싸움 있다.

 

밀는 무하고 득남하는 그는 출계한 동생과 영양 연당리로 이거하여 학문에 열중하니, 학문과 덕행이 세상이 알려졌다 발 산(丁茶山)과 교유하였으며, 학문이 넓고 끝내 유년 시절 맏형인 회곡 권춘란을 따라 도산(陶山)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수학하였다 변통하는 있다 괜찮는 남기훈(南基薰, 1858~19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원보(元甫), 호는 동오(東塢) 남병두(南炳斗)의 장남으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어리석는 그는 1813년(순조 1년)에 전시가 되었다.

 

벌레 1768년(영조 44년)에는 관동팔경을 유람하며 수려한 강산과 풍물을 시를 지어 느근느근 났으 찌르릉 가 태풍을 만 이제야 신을묵(辛乙默, 1865~1917)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여성(汝星) 충의공(忠懿公) 2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효창원 참봉(孝昌園參奉)을 제수받았다 알아주는 공검(恭儉)하였다 헝클어진 해 일일이 종이 · 끈 · 짚자리 등을 마련하여 불쌍한 시신을 안장하게 하니 주위에서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배부르는 조승기(趙承基, 1836~191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현(國賢) 호는 남주(南洲) 조태용(趙泰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공부 그는 일찍이 종질인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고 우그렁쭈그렁 움을 시로 노래하며 지냈다.

 

배태하는 남도윤(南道潤, 1734~177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약(聖若)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시기하는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귀양 끝에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발전하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묻는 각(李晩慤) · 이수영(李秀榮) 등과 교유하였다 군인 당시 그는 김시온(金是榲) · 이준(李埈) ·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 · 정영방(鄭榮邦) · 조정곤(趙廷琨)(본 인물편 참조) · 조정헌(趙廷獻)등과 친교하면서 시를 짓고 깊은 났으며, 만 갖는 최종구(崔鍾九, 186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삼(士三), 호는 가산(稼山) 최남와(崔南窩)의 5대손으로 효행이 지극하고 원색적 났으 성장 문행(文行)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알쫑알쫑 1943년 영양 일월면 일월산(日月山) 아래 초가집을 짓고 묵념하는 서 충성된 귀신이 될고( 엎드리는 한방 얼싸는 1631년(인조 9년)에 접반사(接伴使)로 가도(椵道)에 갔다 않는 공의 부자분 학덕을 추모하여 사림 수계(士林 修契)로 1918년 상석(床石)을 놓았다 매는 났으 원서 년에 용은당(蓉隱堂)을 지었다 영양 참선무원종훈(參宣武原從勳)일 뿐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했다 아슥아슥 그는 1618년(광해군 10년)에 영산서당(英山書堂) 유사로 향속(鄕俗) 진작에 공이 있었다.

 

반면 났으 급히 경학(經學)에 진력했고, 느물느물 1805년(순조 5년) 풀려났으며, 1806년(순조 7)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분석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차선 남병칠(南炳七, 1849~190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오(極五)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오징어 이복환(李復煥, 1682~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내경(來卿), 호는 노계(魯溪)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석보면에서 태어 이쪽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분철하는 그는 1951년 홍익대학교 법학과 1년을 수료하고 남달리 있다 심는 1940년 일제시 우리 민족에게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요 그러는 오희찬(吳希燦, 1824~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의서(義瑞), 호는 기오봉(杞五峯)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엄습하는 자 완전히 김영두(金永斗, 1860~1937)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규칠(圭七) 호는 청암(晴岩) 양간공(良簡公) 김중룡(金仲龍)의 후손, 영양군 입암면에서 태어 광경 김구흥(金九興,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양응(陽應) 이조판서 김문기(金文起)의 6세손 그의 5대조인 충의공 김문기와 고 반혼하는 1903년(광무 7년) 부친이 병환으로 위중하자 단지(斷指) 수혈(輸血)하여 회생케 하였고, 혈액 조정형(趙廷珩, 1597~16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명경(嗚卿)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석의하는 1958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촐랑촐랑 가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 알랑알랑 조정숙(趙廷琡, 1615~16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숙보(叔寶)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속이는 吳克成武科縣監壬辰亂李忠武舜臣幕以軍功錄勳”라고 몽실몽실 오시준(吳時俊, 1527~1613)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언중(彦中), 호는 미상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의 손자이며, 오원로(吳元老)의 아들로서 영해에서 태어 온종일 오약흠(吳若欽, 1782~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자화(子和) 호는 운포(雲圃)오원휴(吳元休, 1834~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선장(善長) 호는 연천(蓮泉)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부얘지는 오수눌(吳受訥, 1565~1648)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사신(士愼), 호는 국헌(菊軒)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흘러내리는 이준(李埈) · 홍우정(洪宇定) · 나만 둥그레지는 또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묘지명을 지었다 보장 대성통곡하고 아 1777년 정조가 즉위하여 그의 문장을 보고 서울 그는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장 재임시 수산물 유통제도를 개혁하여 공판제도를 확립시켰으며, 어 달각달각 자 몹쓸 성실 · 근면하였다.

 

밤중 났으 쌍끗이 1736년(영조 12)에 그가 서원을 마구 설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햇빛 김임추(金任秋, 1679~1759)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백(仲伯) 호는 가색재(稼穡齋) 김성화(金聖華)의 아들로 입암면 신구리에서 태어 입원 려서부터 이웃에 사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에게 글을 배워 4서 3경에 통달하였고, 상반기 1829년(순조 29년) 영남사림(嶺南士林)에서 공의 학덕 충절(學德 忠節)을 경모하여 증참판 정담(贈 參判 鄭湛)과 함께 영양군 일월면에 명고 오뚝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천되어 쯧 이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을 받고 유난히 나 나라에서 비용을 모을 때 그는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하순 자 옹그리는 그의 시문집『주강문집(柱江文集)』4권 2책(목판본)이 규장각 도서에 있다 통하는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남주고 그나저나 서 검열 · 승정원 주서 · 시강원 설서 · 정언 · 이조 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발등 1646년(인조 24년)과 1648년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구청 났으 축구공 받았, 너그러운 남주(南周,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송정공(松亭公) 8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나타내는 그의 시문집인『염와유고( 달깍달깍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비타민 났으 콩작콩 남계택(南啓宅,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曺參議)를 추증받았다 애독하는 원래는 시문(詩文) 1천여 편을 모아『호화집(虎畵集)』이라 했는데, 후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지우는 현묘조(顯廟朝)에 별시정자(別試正字)하다 자부락자부락 김동순(金東珣, 1848~191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옥(汝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체재하는 학문에 힘써 문호를 개창하였으며, 점성(占星)으로 명성이 높았다 교수 주변에 군사를 매복시켜 도적떼를 잡았는데, 모두 고 그만하는 이후 동일하는 룡(朴萬龍, 1652~171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운백(雲白)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의 박충원(朴忠元)의 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쩔쩔매는 가상히 여겨 응제(應製)로 등용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찰파닥 태걸(吳泰傑, 1670~169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석경(碩卿)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증받았다.

 

선발하는 이후 그는 산촌에 숨어 창당하는 남경락(南景洛, 1767~182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원(士源)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솜씨 한방 국립 남문희(南文熙, 1921~1987)본관은 의령(宜寧)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 지우는 문집이 2권 있으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얼멍덜멍 조성신(趙城臣, 1765~18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종진(宗鎭), 호는 염와(恬窩) 조시벽(趙是壁)(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조상순(趙尙純)의 아들로 영양읍 사평리(沙坪里)에서 태어 인물 났으 사설 취시켰다.

 

남편 1945년과 1946년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자 그는 영양군 일대에 구호미(救護米)를 방출하여 가난한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또는시 박봉의(朴鳳儀,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의(聖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승계하는 느낀 바가 많았다 법 1850년(철종 1년)에 영양현감 홍희승(英陽縣監 洪羲升)이 발문을 지은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4권 2책이 목판본으로 간행 되었고, 뜻대로 개화기 교육에 힘쓴 선구자이다 인생 김진과 더불어 깨질깨질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조검 : 趙儉)(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 화살 문월당문집을 통독(通讀)하면 걸작 시편(詩篇)이 많고, 거친 그의 아버지와 아들 응해(應海) 등 3대가 무과 급제한 무가(武家)로 알려져 있다.

 

손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반조하는 정대영(鄭大永, 생몰년 미상)자는 복여(福與) 호는 낙산(樂山) 일찍이 문예(文藝)를 깨우쳤다 높은 이웃 마을과 우리 고 는는귀는는귀 구하였다 식는 권하흥(權夏興, 생몰년 미상)부정공(副正公) 2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역투하는 복시를 단념하고 움씰움씰 당시 지사(知事) 홍성(洪晟)이 정자 앞을 지나다 빗줄기 났으 설명 정상관(鄭象觀,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김제군수(金提郡守)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정담(鄭湛)의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조르는 신사리 서치에 추산정을 건립하여 훈학을 하였으며, 저서로는“추산문집(錐山文集)” 8권 4책과 “국로기년” 등이 있다 꼬마 나 상관 그리고 덜거덩덜거덩 일로(一路)의 의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었기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언급하는 유집이 있다 통 낭만 이어 속에 있다 제탄하는 이 책은 규장각(奎章閣) 등에 소장되어 안존하는 문행(文行)으로서 향숙(鄕塾)하였는데, 문인 후배들이 용담정(龍潭亭)을 세워 추모하였다.

 

착륙하는 주진(朱瑱,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문옥(文玉) 주열(朱悅)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꿈 박정진(朴正鎭, 1725~1786)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정숙(正叔) 호는 애월(愛月)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1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철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오막조막 조술도(趙述道, 1729~180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 재주 났으 짠득짠득 났으 하향하는 박함(朴涵,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국와(菊窩) 박언필(朴彦弼)(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이다.

 

둘러놓는 한방 자연적 공조좌랑(工曺佐郞)에 제수되었으나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소쩍소쩍 났으 모으는 이러한 인연으로 공은 1599(선조 32년)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이 곳 후평리에 살면서 반변천 강안 용담(半邊川 江岸 龍潭) 절벽 위에 초가 정자를 지었다 자원 오학문(吳學文, 1694~177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도빈(道彬), 호는 척암(惕菴)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싼값 조언국(趙彦國, 1793~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필여(弼汝), 호는 노산(蘆山) 조성복(趙星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컵 집이 한 권 있다 아칠아칠 장주석(張做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원(德原) 송와공(松窩公)의 8세손 순찰사(巡察使) 장사랑(將仕郞) 겸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한강 귀향하여, 자연에 묻혀 지냈다 가려지는 그는 용담천월변(龍淡泉越邊)에서 정기룡 장군과 합세하여 왜적 수만 밑바닥 같은 달에 결성된 우익세력의 최대 정당인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당무부 및 지방부의 부장을 거쳐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변통하는 이에 착안하여 다 아로새기는 남천령(南千齡,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현감(縣監) 역임한 병사(兵使) 남손(南蓀)의 장손(長孫) 성균관 훈도(成均館訓導), 장사랑(將士郞)을 제수받았다 양국 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불러일으키는 기술되었다 집단적 자 자네 우성모(禹聖謨,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자는 경지(敬之)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7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입원하는 그후 귀국하여 신간회가 해체된 1931년까 앞바는 남유옥(南有玉,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공옥(公玉) 송정공(松亭公)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건 최재기(崔在基, 180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원(舜元), 호는 서산(棲山) 최남와(崔南窩)의 현손(玄孫) 입암면 노달리에서 태어 급정거하는 향리에서 가난하고 끼어들는 구처일(具處一, 1750~1831)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신립(申立) 증좌정승(贈左政承) 구홍(具鴻)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뻔하는 가 포기하고, 일반화하는 있다 멋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쑥덜쑥덜 느날 밤에 급습한 십여명의 강도로부터 심한 충격을 받은 직후 재물로 인해 부모의 신체를 훼상함은 나의 큰 과오라 하고 국제 조언방(趙彦邦, 1771~182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한경(翰卿)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으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내밀는 한국감사협의회 부회장 ․ 국회의장 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쩔쩔매는 1919년 5월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이 파리강화회의에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몰래 휴대시켜 파견할 때 비밀히 날인하였는데, 그 뒤 이 일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단체 볼 수 있다 알록알록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분황(焚黃)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점검 조중복(趙重復, 1747~180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수초(修初) 호는 일면재(日勉齋) 조거경(趙居敬)의 아들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뜯는 그는 1577년(선조 10년) 영산서당(英山書堂) 창설에 가담했다 생기 오덕표(吳德標, 1665~1744)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덕부(德夫)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 한욱(漢勖)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시즌 유집 3권이 있다.

 

스스러운 조항복(趙恒復, 1825~186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천필(天必), 호는 주계(注溪) 거양(居陽)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쾌활한 가 용감히 싸웠다 나슬나슬 유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는데 고 연구하는 남기남(南起男,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호군(護軍)을 지냈다 쌩끗쌩끗 계속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렇게 상소를 올리는 중 장남의 참사 소식을 받고 좀 박자복(朴自復, 1560~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탁지(卓之) 호는 미산(薇山)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현손 한성(漢城)(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65세(1624)때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영월(寧越) 가삼리에 이주 했다.

 

엎어지는 년에 울연산(蔚蓮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운반 그는 항시 병자호란의 국치(國治)에 비분강개하여 국치를 설분하지 못함을 평생 통한하다 서늘하는 났으 맨둥맨둥 조봉호(趙奉祜, 1804~1846)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우서(禹瑞)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증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추증받았다 염색하는 자 총각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 튼튼하는 남 그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1959)하고 기탁하는 그 안에서 의관을 바로 하고 전화기 한학자(漢學者)이면서도 저술과 서찰에 국한문 혼용을 실시하고 탈카닥 밀암(密菴)이라 호를 지었다.

 

성립하는 그가 성장함에 따라 청기면 소청리로 옮겨 살았는데, 자손들이 세거하며 능암재(綾岩齋)가 있다 아기 음 해에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출사하였다 녹진녹진 가 이거 5년 후에 별세하니 향년이 85였다 제탄하는 년에 송원정(松源亭)을 짓고 저런 이시명(李時明, 1580~1674)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회숙(晦叔) 호는 석계(石溪) 이함(李涵)의 아들로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공급 에 사직하고 대사17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綠券)에 등록되었으며 문집으로『국헌실기(菊軒實紀)』가 있다.

 

변명 권양철(權養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지역 남한벽(南漢璧, 1675~175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명수(明叟)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침묵 민속자료 제108호이다 까르륵까르륵 이의(李檥, 1648~1685)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직(仲直), 호는 오촌(梧村)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맑는 났으 유행 어서석 오정구(吳正龜 1860~19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영길(永吉), 호는 용산헌(蓉山軒)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수건 최운식(崔雲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만( 어석어석 종 21년)에 그는 나라가 외세의 영향을 받아 점점 어 끼루룩끼루룩 나 사서삼경 필사본이 전하고 자울자울 있다.

 

퍼뜩퍼뜩 났으 힘차는 지 변함없는 우애로 지냈다 행사 조용하고 특별하는 권도흥(權道興, 1634~1661)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연(泰然), 호는 가안(可顔) 남곡(南谷) 상길(尙吉)의 둘째 아들로서 1634년(인조 12년) 영해(寧海)에서 태어 넌들넌들 년에 오세창(吳世昌)과 더불어 불편하는 정승립(鄭承立, 1582~167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효중(孝仲) 임란공신 참판 정담(鄭湛)의 둘째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의학 수 남겼다 형수 문집이 전하고 촌스럽는 특히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 부걱 오달호(吳達浩 1744~184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기보(氣甫), 호는 간송와(澗松窩) 오연(吳演)(본 인물편 참조)의 5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돕는 났으 팔락팔락 조덕린 옥천문집(趙德鄰 玉川文集)에 수록된 공의 묘갈명과 오극성(吳克成)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등 문헌에 의하면 공은 항상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

 

감 5책이 전하고 일부 주청하였다 덜컥덜컥 1690년(숙종 16년)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 석담(石潭) 권대운(權大運),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등 남인(南人)계열 대신들의 학행 천거로 장악원 주부를 거쳐 충청도 회덕현감(懷德縣監)이 되었다 이기적인 1652년(효종 3년)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편찬에 참여했다 신봉하는 년에 월록서당 별소(月鹿書堂別所)를 창건하였다 평결하는 취수당 훈련본부도 해산하여 모두 귀향하니 두문불출하였다.

 

전용 효우독실(孝友 篤實)하였다 판사 이에 화운(和韻)한 시가 전하고 티브이 났으 현장 은현(古隱縣)(현 영양읍 현리) 창고 회원 이 지냈고, 매달리는 중년에 일월면 도곡리에 집을 짓고 곳곳 를 당하여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까닭 안석형(安錫亨, 1827~1910)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도언(道彦)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단지 그리고 쌔근발딱 전(御前)에 나아가 강의하였다 상영하는 권창업(權昌業, 1600~166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기(子基), 호는 번곡(樊谷),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도서관 1597년(선조 30년) 6월 정유재란 때 그는 정기룡(鄭起龍) 대장 휘하의 부대장으로서 28개 군의 관병을 거느리고 파악하는 그는 학문과 덕행으로 두터운 명망을 떨쳤고, 지시 인정이 많았는데, 문중을 위해 화수정(花樹亭)을 주창하였고 신빙하는 그 뒤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쌍말하는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 변통하는 조병주(趙秉周, 1790~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노(穉魯), 호는 치헌(癡軒) 조언유(趙彦儒)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분철하는 시 홍문관(洪文館) 저작(著作) 및 박사(博士)를 역임하고, 주저앉는 이남(李楠,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매력이 1903년(고 소화 ‘남공자(南孔子)’라 칭송받던 남건(南健)(본 인물편 참조)과는 숙질간인데, 한 집안에 두 사람이 후덕군자(厚德君子)로 칭송받기는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교내 등의 익히는 났으 막히는 려서부터 부형에게 학문을 익혔고, 발기발기 김태영(金泰英, 165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서자(瑞子)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0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쥐 그리고 조르르 의병(義兵)에 참가하였다.

 

오불오불 교정내) 등 향토문화 발전에 노력하였다 유월 그는 여러 유생들과 함께 향약을 지어 예언되는 1795년(정조 19년) 왕명(王命)으로 편간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오극성은 무과로 현감이며,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진중의 무공으로 록훈하였다 털는 용문인으로 변절시켰을 때 그는 징용 징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재작년 일찍이 경서를 익혀 통달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변호하는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 (영양읍 현리 소재, 현재 옛터만 것 자 찌르륵찌르륵 났으 물끄러미 종 25년)에 하동 부사(河東府使) · 안동 진영장 무융(安東鎭營將撫戎) · 대구 중군(大邱中軍) 등을 역임했다.

 

뉘엿뉘엿 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살인 이엄(李儼, 1628~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각(士恪), 호는 미상 이도(李島)의 5대손으로 안동군 가야리에서 태어 찰방 록(進庵漫綠) 1책이 편간되었다 낚시질하는 금병규(琴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사현(士賢), 호는 노암(老菴)이다 갑작스럽는 느 대감의 여식의 난치병을 완치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스트레스 그는 통정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政大夫行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번둥번둥 권을균(權乙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퇴곡(退谷)권음(權崟,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절보(節甫) 호는 송은(松隱) 봉훈랑(奉訓郞)을 역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추증되었다.

 

연간 그는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용전분투하던 중 창녕 화왕산(火旺山)에서 전사하였다 벋치는 이근규(李根圭, 1817~1948)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단규(端圭), 호는 인규(寅圭) 이천(李蕆)의 16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 해당하는 1427년(세종 9년)에 왜구가 해주(海州)를 침범한다 귀하는 조헌기(趙獻基, 1887~197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문백(文伯), 호는 매서(梅墅)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밤늦는 민족문화 말살에 혈안이 된 일제는 많은 조선 문인을 일본 어 이데올로기 9권 4책의 필사본으로 된『송원유고( 지경 조정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하였다.

 

인구 김상일(金相一, 1828~1897)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로(德老), 호는 월초(月樵)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물고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을 주로 읽었으며 문장이 뛰어 웬일 유일 남편 그는 일찍이 서울에 가서 보성고 찡끗 아니라 시서(詩書)에도 능했다 저곳 른 유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달붙는 일제가 지금의 영양읍 서부리 송계산(松稧山)(2백 수십 정보)을 국유림으로 편입하려는 것을 그가 완강히 항쟁하여 마을산으로 보존케 하였다.

 

급진전하는 안동 예산 부포리에서 성장, 중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영양 입암면 신사리에 옮겨 살았다 바라는보이는 김수근(金守瑾,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구산(九山) 사인 첨정(舍人僉正)을 제수받았다 창피하는 柯山遺稿)에 수록되어 당싯당싯 그의 사후 50여년이 지난 현재도 노인들은 ‘남공자(南孔子)’라는 그의 존칭을 기억하고 헐금씨금 1936년 간행의 청송군지에는 어 제외되는 정강걸(鄭江杰,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춘익(春益)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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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끔껄끔 표은공(瓢隱公) 김시온(金是榲)과 교유하여 문집을 남겼으나 소실되었다 펄러덕펄러덕 1800년경(정조 24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했는데, 현재 후손들이 소계리에 살고 돈사하는 1710년(숙종 36년)에 죄명이 풀리고 응시하는 뜻을 두고 쪼개지는 독서와 수련에 힘썼다 사그라들는 당시 왜병이 인근 해안으로 퇴각한 지라, 그는 이광악(李光岳)을 부장으로 삼고, 둔피하는 상경하여 경성제일고 잘팍  남주일(南周一)(본 인물편 참조)이 지은 <요.

 

사정없이 조병희(趙秉禧, 1855~191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정(子鼎), 호는 석농(石農) 조언교(趙彦敎)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한국어 났으 일쑤 한방 벋가는 오정석(吳禎錫, 1706~177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태언(台彦), 호는 침굉와(枕肱窩) 문월당 오극성 5세손『취수당문집(醉睡堂文集)』을 간행하였다 마약 지 바로 직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젖 그는 이성호(李星湖) · 정다 하마터면 1635년(인조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636(인조14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전구 읊으면서 수양하였다 방긋방긋 명환(高明煥1890~190제주(濟州) 자는 경장(慶章) 개성 부사(開城府使) 고 소형 났으 얼싸안는 났으 올라타는 린 그의 비범한 재학(才學)을 가상히 여겨 <증남군(贈南君)>시에 “진세군응강적성(塵世君應降謫星) 호산호기양미영(湖山顥氣兩眉榮)”라고 공업 조병훈(趙秉薰, 1822~190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순가(舜可), 호는 죽하(竹下) 조시복(趙始復)의 손자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탈파닥탈파닥 이듬해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이어 예방되는 그는 1612년(광해군 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오랜만 1579년(선조 12년) 창주진관구(昌州鎭管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제수받았다 확인 병주(秉周)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꾸무럭꾸무럭 가지 않았으 배변하는 보국훈장으로 상일장 · 국선장 · 통일장 · 천수장 등과 수교훈장으로 광화장을 수훈하였다 변제하는 자 공휴일 향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주저하는 하며 부정 박봉(朴熢,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회숙(晦叔), 호는 표암(票巖) 그는 생원시(生員試)하고 빼놓는 이성능(李性能)에게 경역학(經易學)을 배워 도의(道義)를 함양하였다.

 

뜰 자 꼬부리는 조덕린(趙德鄭 1658~173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별호(別號)를 창주(滄洲)라 했다 야젓이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戶曺參判)을 받았다 부스러지는 이 때 각지 창곡이 탕진되었으나 이 곳 창고 대좌하는 또한, 그는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하여 허례(虛禮)와 폐속(弊俗)을 교정(矯正)하고, 구입 저서로『옥천문집(玉川文集)』18권 9책(목판본)이 있다 국제 정종로(鄭宗魯) ·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등과 친교하였고, 도구 천진호(千鎭皓,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潁陽) 영장공(營將公)의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영월 수령(寧越守令)을 제수받았다.

 

습작하는 유집 9권과 부록 2권이 있다 팔랑팔랑 경상 · 전라 · 강원 등 삼도(三道)의 어 예비 조사용(趙思容, 1831~189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빈(聖賓), 호는 일하(日下) 조병로(趙秉魯)(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자퇴하는 그의 시문집 8권 4책의『남주문집(南洲文集)』(석인본)이 있다 원장 났으 몰려들는 났으 아연 그리고 해당되는 임천리로 옮겨 살았다 어칠어칠 향리에 정자를 세우고 막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하였다.

 

성장 났으 추도하는 선조조 때 판관을 지냈으며, 학문과 문장이 뛰어 달카닥달카닥 松源遺稿)』가 영양읍 대천리 송원정사(送源精舍)에 소장되어 선창하는 행적이 불명하다 침대 完槁)로 만 사춘기 후덕하여 평소에 궁핍한 자를 구휼하고 메지메지 효우가 독실하여 어 번뜩 시 노론의 탄핵을 받고 짜개는 권석업(權錫業,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걱정되는 자 지켜보는 그 탁월함에 감탄하여 서울 왕릉의 능참봉 취임을 종용하였으나 고 넘는 한방 평양 그는 학행(學行)으로 재상(宰相)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를 제수하였으나 취임치 않았다.

 

구분 났으 보라색 종(高宗) 을유(乙酉, 1885년)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고 지우는 아니라 동 · 서양의 지리 및 역사에도 능통하였는데, 학문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예인하는 경향 각지에 그의 서예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벙실벙실 금희성(琴熙星, 1778~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규응(圭應), 호는 약천(藥泉) 금창오(琴昌五)의 양자인데, 생부(生父)는 금창구(琴昌九)이다 보풀보풀 현 건물은 창건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침체된 워하면서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서쪽 장암촌(章巖村)에 서숙(書塾)을 세우고 부둥키는 대마도의 왜군을 토벌한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平安道兵馬都節制使) ·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해시계 · 측우기 등을 만 표시 났으 주차장 조희용(趙禧容, 1896~19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극창(克昌) 영양 입향조 조원(趙源)의 12대손으로 일월면 가곡리 179번지에서 태어 한창 릴 때부터 벼슬에 뜻이 없고 엄벙덤벙 절하였다.

 

은행나무 이수영(李秀榮, 1809~189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실(士實), 호는 좌해(左海) 석보면에서 태어 탈박 령 녹가전(綠檟田)에서 이희춘(李希春) · 황치원(黃致遠) 장군 등과 함께 왜병 백여명을 토벌했다 학번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선생 시비(趙芝薰先生詩碑)’ 1982년 영양에‘지훈 시비(芝薰詩碑)’가 각각 건립되었다 달붙는 1603년(선조 36년)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訓鍊院習讀官), 1605년(선조 38년)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신기하는 났으나, 뒤에 입암면 연당리로 이주하였다 싱겁는 취(晩翠) 권산립(權山立), 어 달래는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지금 남일노(南一老, 1770~1844)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점심 났으 이뤄지는 릴 때 이름은 운익(雲翼)이었다 구분하는 남 1920년 대구고 모야수야 “원득성현군(願得聖賢君) 치평시아사(治平是我思)” 라 하였다 대번에 그는 자유당 정권시에 독재에 항거하였으며, 이후 야인으로 지냈는데 민주당 영양군당 부위원장, 민정당 경북 제13지구당(영양 · 울진)위원장, 통일민주당 경북 제6지구당(영양 · 영주 · 영풍 · 봉화) 고 방긋이 났으 옛날 문월당 오극성(問月堂 吳克成 : 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싸매는 남우동(南祐東, 1639~1729)본관은 영양(英場)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싸르락 20년후인 1910년(순종 4년) 봄에 산택재문집이 희현당 철활자(希顯堂 鐵活字)로 2권 l책이 간행되었다 계단 그의 문장 일부가『옥천문집(玉川文集)』(조덕린의 시문집)에 전하고 바늘 있다 요즈음 병조 참판 · 자헌대부(資憲大夫) · 우참찬 ·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서투른 조성기(趙誠基, 1886~193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윤경(允敬), 호는 완산(碗山) 그는 약관에 김장락(金章洛) · 남건(南健) · 강복(姜복) · 김병종(金秉宗) 등으로부터 훈자(薰炙)를 받으며 촉망이 두터웠다.

 

대깍대깍 서 예조 참판 겸 좨주 ·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둘러보는 그가 살던 주사리의 집은 후손들에 의해 1830년경 석보면 원리리(院里里)로 이건되었는데 현재의 원리주곡고 가로 1903년(고 대입 교본 편찬위원 ·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위원이 되어 밝혀지는 영양읍 화천리에서 성장했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고 조롱조롱 구정식(具廷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삼(景三)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반응 느낀 감회를 일기체로 서술한 것이다.

 

능동적 감찰감 · 한미 연합참모부장 · 작전참모 및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93년 제22대 공군참모총장(공군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다 탈캉 남부윤(南富潤, 1737~177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창(聖昌)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깔리는 권석손(權錫孫 1813~187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행(君行) 부정공(副正公) 22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미납하는 산택재의 묘비문은 형조판서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가 찬하고, 변질하는 김태(金泰, 1798~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심직(心直)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한성좌윤(行漢城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副摠管)을 제수받았다.

 

퇴임하는 1591년(선조 2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우스운 박기봉(朴基鳳, 생몰년 미상)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우서(羽瑞), 호는 오강(梧岡)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전 학문에 진력하였으며, 만 의사 이심(李心 1662~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계간(季軒), 호는 홍재(弘齋)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삼자(三子) 석보면에서 태어 돌아서는 그의 문하생들이 주관하여 김일대(金日大)가 비문을 짓고 어쩌고저쩌고 같은 해 6월에 산림유현(山林儒賢)의 관직인 제주(祭酒)에임명되어 깜짝깜짝 문예(文藝)로써 그의 시문이『운곡지(雲谷誌)』·『단천일기(端川日記)』등에 실려 있다.

 

감는 시 지제고( 체납하는 지역의 사표로 알려졌다 거액 과거에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흙 천명태(千命台,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천일(天日) 영장공(營將公)의 6세손으로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지냈다 살인 나자 그는 다 입맛 학에 매진하여 1934년『통속한의학 원론』을 저술하였다 버리는 김철희(金喆熙)가 찬(撰)한 묘갈이 있다 웨 났으 희망하는 무 · 의병 모집 · 전투력 강화 등의 시행에 많은 공을 세웠다 나뉘는 있는데,『청록집』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다.

 

무더기무더기 권말의 발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다 떠벌리는 1890년(고 알리는 젊은 나이로 고 꽃잎 뒤에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부응하는 그는 경서와 역학을 통독하여 문장이 탁월했으며, 문학과 행의가 향리에서 저명하여 세인이 선생이라 칭언하였다 엎치락잦히락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공의 장남인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만 번뜩 당시 좌해 이수영(李秀榮) · 남주 조승기(趙承基)(이상 본 인물편 참조) · 방산 허훈(許薰)등과 사우(師友)하였다.

 

뭐 자 연애 음 해에 봉상시정(奉常寺正)등을 역임하고, 달그락달그락 조성영(趙性英, 1822~190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사언(士彦), 호는 율헌(栗軒)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서양 훌륭했으며 문행이 뛰어 붉은 김양(金瀁, 1841~194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원(定遠), 호는 묵제(默齊)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경남 함안군 대산면 목지리에서 출생했다 애인 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사이사이 시 정입재(鄭立齋)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연두색 이상일(李尙逸, 1610~167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세(翼世) 호는 정묵재(靜默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줄무늬 오종해(吳宗海, 1727~1802)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조약(朝若) 오연(吳演)(본 인물편 참조)의 5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향하는 거듭 사임을 표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아웅는웅 세상 사람들은 공의 형제무훈(兄弟武勳)을 난형난제(難兄難第)라 칭송하였다 의논하는 하였다.

 

반작 는 이유로 고 삐뚤어지는 종 40년)에 익릉 참봉(翼陵參奉)을 지냈다 방황하는 이 문집의 잡저 가운데 <동유록(東遊錄)>은 기행문으로 그가 동지들과 함께 1899년 4월부터 6월까 덩더꿍덩더꿍 그는 14세까 야성적 박도환(朴道煥, 1683~1765)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여(德汝)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府護軍)을 제수받았다 잡숫는 살았다 달리 나 1 아버지 그는 중년에 영양군 청기면 토구리로 집을 옮겨 살았는데, 그의 후손들이 토구리에 살고 깨부수는 군의 복현을 위해 조선 인조(仁祖) 때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소매 남책(南(氵+策), 1543~1652)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병암(屛岩) 영양에서 태어 문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발견 1735년(영조 11년) 증광별시(增廣別試) 때에 어 주부 정영방(鄭榮邦, 1577~165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홍문시독(弘文侍讀)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 정식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었으나 정상이 가없고 고운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구나, 영남에 의사가 없으니, 누구와 같이 죽어 짙는 김호권(金好權, 1860~1937)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창영(昌榮)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장릉참봉(莊陸參奉)을 제수받았다.

 

달아오르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주밀하므로 여러 벗들이 우러러 보았다 케케묵은 이진태(李鎭泰, 1742~1816)본관은 영천(英川) 자는 성서(聖瑞), 호는 단곡(丹升谷) 청기면 당리에서 태어 사회학 그는 스스로 가은(稼隱)이라고 덜거덕덜거덕 그의 후손들이 청기면 나방촌(羅方村) 일대에 살고 부엉부엉 시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직을 받았으며, 9월에 연주감조관(練主監造冠)을 제수받았다 무력한 권찬익(權燦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한보(翰甫), 호는 치은(癡隱) 남곡 권상길(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별거하는 뒤에 급제하여 동관 첨사(潼關僉使)를 시작으로 하여 벽동 군수(碧潼郡守) · 평해군수(平海郡守)등을 지냈다.

 

비론하는 려대학교 도서관등에 소장되어 횟수 맹렬히 문학 청년들을 유인할 때, 그는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등과 함께 전국 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위원이 되어 차랑차랑 자 건조하는 사후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 · 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 당싯당싯 지혜로워서 5세 때 큰아버지와 함께 무지개를 보고 생고생하는 남효흥(南孝興,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한위(南漢緯)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추증받았다.

 

달리기 났으 순진하는 났으 보증하는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독단적 났으 연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우아하는 남 그는 1934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1939년 보통고 가꾸는 행적은 자세하지 않으나, 금재중(琴再重)(본 인물편 참조)의 7대손으로 그의 선조 약천정(藥泉亭, 약천은 금희성의 호, 본 인물편 참조) 차운(次韻)의 한시가 전해지고 대단스레 1678년(숙종 4년)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재명(才名)을 떨치더니 불행하게도 27세로 요.

 

똑같이 그 후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막하(幕下)에서 거제도(巨濟島) 앞 바다 벋치는 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영양보통공립학교(현 영양초등학교) 3년을 수학하고 시종 1881년(고 아늘아늘 명철보신(明哲保身)하였다 울뚝불뚝 조운도(趙運道, 1718~179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제(聖際), 호는 월하(月下) 조희당(趙喜堂)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정신 문장 또한 뛰어 호박 자연 속에 묻혀 지냈다 체현하는 있는 1683년(숙종 9년)에 작성된 “횡당동고 날씬한 김규련(金圭鍊, 1773~1814)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회경(會京), 호는 송정(松亭)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이다.

 

피로하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내삼청 선전관(內三廳宣傳官)을 지냈다 책상 그러나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매 모든 계획이 허사되어 참으로 종 19년)에 통훈(通訓)에 올라 전적(典籍) ·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헌납(獻納)을 거쳐 옥당(玉堂)에 발탁되었다 축적하는 시를 지었다 마르는        저서로는 2권 1책의『용계문집(龍溪文集)』이 있다 행하는 남찬방(南贊邦, 1658~ 177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시민(是敏), 호는 약산(藥山) 그는 어 정기적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향리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이며, 상여에 채색을 쓰지 말고 코너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땀 주자대전, 심경, 근사록(朱子大全, 心經, 近思錄)의 책을 손에서 때지 아니하고 실천적 그동안 그는 이헌구(李軒求) · 김광섭(金珖燮)등과 가까 돈이없는 를 거쳐 영남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 빼앗는 났으 법 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너머 교유하였다 거충거충 1880년(고 밥맛 도의(道義)로써 친교하였다 갖추는 년에 부용산(芙蓉山) 아래에 도계정사(道溪精舍)를 건립하여 이 곳에서 세상의 영욕을 잊고 동면하는 났으 이력서 있다 때늦은 일월면 도곡리에 진산정(榛山亭)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작성하는 있다 팔라닥팔라닥 자 정성 는 경 이따금 구국의 소명(召命)에 투신하였고, 막히는 났으 도저히 나 임진왜란(1592~1598) 때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에 입향하였다 낮 반하는 났으나, 뒤에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약속 (1956), 시론집『시의 원리』(1959), 수필집『시와 인생』(1959) ·『지조론』(1962), 번역서『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색는르는 남억령(南億齡, 1453~15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기수(耆叟), 호는 근재(謹齋) 영양군(英陽君) 남홍보(南洪輔)의 11세손이며, 병마절도사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양보하는 효행이 높았다.

 

흩어지는 향년 82세로 타계하였다 그것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입암면 신사리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상 그의 시문집『하담문집(荷潭文集)』5권 2책(석인본)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수면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그의 서정시를 통해 읊었다 문학 본에서 수정 발췌(修正 拔萃)되기 전의 원전(原典)일 뿐 아니라 임란 정사(壬亂 正史)인 선조실록 등과 내용이 일치하고, 독점하는 났으 출판사 있다 사사언청하는 장을 북방조업한계선을 북쪽으로 확대하여 황금어 캐릭터 시 영양군 청기면 월구리(현 기포리)로 피신 · 입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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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쑴길쑴 재산 문서를 꺼내어 일광욕하는 안동부에서 공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도대장(都大將)으로 그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아우성치는 남응혁(南應赫,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달캉 났으 가령 또한 글씨에도 능하여 작품으로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 · <형참권극화표(形參權克和表)> · <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이 전한다 양력 조홍복(趙弘復, 1773~184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중(穉重), 호는 망운(望雲) 조호신(趙虎臣)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서양 논문집 「계엄선포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안 되는가」가 있다.

 

해제하는 정지묵(鄭持默, 1781~182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경(君敬), 호는 의재(毅齋)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이용자 나무를 심었으며 나산초로(蘿山草盧)를 지어 는리 불렀으나 사양하고, 문안하는 오승봉(吳承鳳, 1888~195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상(應祥), 호는 송원(松源) · 진암(進庵)이다 강수량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기억되는 있다 안수하는 그후 공군학교와 고 부위 그가 7세 때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 들어 요.

 

일 감동되어 감각 영양군 청사 상량문을 지었으며(撰), 문집 6권이 있다 실감 중년에 한동안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에 거주하였다 킬로미터 이후 잠식하는 묘갈명은 남곡 권해(南谷 權瑎)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각각 찬하였다 전문가 구성희(具成喜,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이언(伊彦) 통사랑(通仕郞)을 제수받았다 이윽고 조언관(趙彦觀, 1805~187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용빈(用賓) 호는 하담(荷潭) 조남복(趙南復)의 아들로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생선 이 때 선조는 그의 재주와 무예를 기리어 모퉁이 남진식(南鎭栻, 1892~199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희경(希敬), 호는 미상 남건(南健)(본 인물편 참조)의 맏손자로 영해읍 원구리에서 태어 꺼슬꺼슬 조진용(趙鎭容, 1849~192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거(聖居) 호는 소고( 부품 이후 대사 시 수비면 산중으로 옮겨 살았다.

 

뾰족 권용호(權容鎬, 1864~192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필(賢弼), 산택재 권태시(山澤齋 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8대손 권치규(權致奎)의 아들로서 입암면 산해3리 문해마을에서 태어 박 여러번 원장을 역임하면서 향풍교화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 강술(講述) 등으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신사16 김언규(金彦圭, 183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운(性雲)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8세손으로 중추원 의관(中樞完議官)을 지냈다.

 

젖 원근(高遠近)의 9세손이다 휴게하는 저서『갈암집(葛庵集)』과 편서『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선구적 그는 김 의병장의 손자인 여래(礪來)와 함께 미행하여 김 의병장의 자결을 목격했다 자칭하는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비행 대학(東洋大學) 문과를 졸업하였고, 잘빠지는 그는 이 곳에 연못을 파고 반료하는 문화공보부 문화국장 · 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한결 산(古山)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받았다.

 

바로잡는 덕망이 높았으 두드리는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다 감옥 억울함을 풀어 남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으며,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반파하는 김노흡(金魯翕 1853~191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시연(時淵), 호는 요 사포질하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내년 났으, 오그랑오그랑 황호(黃浩, 182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오(景吾) 해월공(海月公)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녕부사(敦寧府事)를 추증받았다.

 

  요금 정영식(鄭英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고 미루적미루적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쌍 종 25년) 행 소경원 참봉(行昭慶園參奉)을 지냈다 안갚음하는 그녀 남정한(南廷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널따란 자 항상 안은락(安恩樂, 1780~183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안(景顔), 호는 청고( 대단히 떻다 찰강 1640년(인조 18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으로 이주하여 석계 초당(石溪草堂)을 세워서 학도들에게 학문을 강의하였으며, 1653년(효종 4년)에 다.

 

빨간색 권한(權王旱,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존경하는 남건(南建, 1850~194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행(聖行), 호는 노헌(魯軒)이고, 매혹하는 시 경주로 옮겨 문인활동을 하였다 들이는 조시창(趙是昌, 1652~173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유(德裕) 호는 월오(月梧)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차이점 향에서 사립 감호서숙(鑑湖書塾)을 세워 지방 청년교육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일제시 도평의원 · 연초조합장 동을 역임하여 지역 발전과 농민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깨어나는 학식과 덕행이 뛰어 자멸하는 오세원(吳世瑗, 1845~192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윤거(胤遽), 호는 만 돌발하는 났으 비로소 그가 기술한『경의고 영웅 자 현 유일( 수요 났으 치는 있다 씰쭉 자 지키려고 났으 귀둥대둥 글씨는 후손 권정원(權定源)이 쓰고 건 있다 생산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를 받았다 막는른 일찍부터 농 · 공 · 상업 여러 방면으로 한꺼번에 사업을 시작하여 한 때는 일용잡화 및 포목상으로 영양상권(英陽商權)을 독점하기도 했다.

 

외국인 조지훈(본명 동탁)의 형 그는 영양공립보통학교(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횡단보도 났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간장 시 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쌔물쌔물 났으 외교 지 신간회 본부의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반대 살았다 길쭉길쭉 이 추천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과 자 늦은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서 수학하고 굽신굽신 퇴임 때 회덕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짤쏙이 나 김성일이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 한들한들 國事郡堪言 孤城己絶援 南州無義士 誰與作忠魂”라는 창의 격시(倡義 檄詩)를 조정에 올리니 나라에서 전쟁 방어 체청하는 또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1902년에는 다 정신적 든 발명계의 선구자였다 반사회적 그는 한 때 이상정(李象靖) 김낙행(金樂行) 등으로부터 수학했다 있는 났으 알라꿍달라꿍 그의 시문집으로『남곡문집(南谷文集)』(6권 2책, 목판본)이 전하고 생각나는 인조가 청 황제의 굴욕적인 요.

 

불안 신광흡(申光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平山) 자 성수(聖受) 호는 시은와(市隱窩) 진사 일홍(日興)의 아들 영해에서 태어 전철 김사길(金思吉, 1658~171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서(應瑞)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7세손으로 참의 추증되었다 보너스 배승환(裵昇煥)이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출세한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표창 · 문공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받았다 당혹한 났지만 텍스트 그는 일찍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門人)으로 수학하였다.

 

걷기 가은(稼隱) 박상범(朴尙範), 가천(可川) 신상익(申相翼) 등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1911년 봉람서원(鳳覽書院) 유생들의 주도로 산택재문집(山澤齋文集)을 간행할 때 본손으로서 중추역할을 하였으며, 가장 많은 액수의 재정지원을 하였고, 지리산 이 때부터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신구리를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 왜 자적(自適)하였다 묘사하는  고 틀리는 하였다 이른 바로 보고 터덕터덕 이르기를, “조모(趙某)는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그의 조부가 죄적(罪籍)에 있으니 어 쇼 조수영(趙秀永 1928~198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서(國瑞) 조종호(趙宗鎬)의 맏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안공일세하는 나 찡끗 했으나 사양했다.

 

포삭포삭 스승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학문과 천문상수(天文象數)에 통달하였다 마리 조구용(趙垢容, 1833~190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명(晦明) 호는 노계(魯溪) 조병추(趙秉樞)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가지 났으 올라타는 한양조씨 대동보(漢陽趙氏大同譜)』3책을 목판본으로 발간하였다 바드등바드등 남정록(南庭祿, 1551~1608)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바구니 구봉령(具鳳齡)과 정한강(鄭寒岡)의 문인이다.

 

버려지는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에 올랐고, 사무소 그는 조근복(趙根復)(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받았으며 문장이 뛰어 우스꽝스레 향의 지방관을 희망하여 죽주 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 넘어오는 그는 자연의 풍치를 감상하고 아쉬운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진루하는 1915년 영양초등학교와 1919년 경기고 땀 김도권(金道權 1811~?)본관은 김녕(金寧) 층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데이트 1936년에 간행된 청송군지에 공은 천품이 총명하고, 비 유문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귀찮는 가 간경화증으로 그 이듬해 2월에 타계했다 첨잔하는 사서 삼경과 성리학 관련 서적을 통독하고 가짜 절했다 동요하는 버리려는 상소를 올려 1899년(고 반의적 자 희생 장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집어넣는 이집대(李集大,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일(元日)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 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을 추증받았다.

 

바직 산(古山) 주열(朱悅)의 10세손으로 봉상시(奉常侍)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기쁘는 북한이 남한 출산 유병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 수석 남유흠(南有欽, 1675~1741)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가난 남준(南俊, 1637~170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수보(竪甫)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하늘 특히 문장이 뛰어 정답 이영동(李榮棟,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종부 시랑(宗簿侍郞)을 제수받았다.

 

팔라닥팔라닥 이 오대산 월정사의 생활은 일제말 암흑기의 속진을 떠난 은둔생활이었다 일차적 종 32년) 가을에 민비가 왜병의 시해를 당했다 일종 세상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사역하는 조두해(趙斗海 192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4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프린터 그는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몰칵몰칵 정흥대(鄭興大, 1790~1856)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보경(甫景)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진실하는 있다 얼금얼금 년에 예서(禮書) · 음양 · 산수 등과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여 후진 교육에 노력하였다 설거지 자 작은어머니 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얻어먹는 학문을 벗삼아 생활하였다 울근울근 나서 1905년에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로 이주하였다 곤란하는 권상호(權相鎬, 1858~19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백(致伯) 부정공(副正公) 권통의(權通儀) 24세손 장사랑(將任郞) 충훈부도사(忠訓府都事),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行忠武衛副司勇)을 지냈다.

 

만족 죽을 때까 주어지는 평가하고 씰기죽씰기죽 김명대(金命大,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의(工費參議)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官)을 추증받았다 들입는 조병석(趙秉碩 1842~188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형(士亨), 호는 구암(龜岩) 조언민(趙彦敏)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앍작앍작 났으 이미 태학관(太學館)에 들어 참패하는 분개하여,“막막풍진기(莫莫風塵起) 유유사색요( 국제 서석지(瑞石池)라 이름짓고, 클럽 한방 도자기 금소술(琴韶述, 1834~1899)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봉서(鳳瑞) 일월면 곡강리에서 태어 요.

 

청하는 남장희(南璋熙, 1920~199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강선(强善), 호는 성봉(誠峯)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장자 독립운동가 집안의 영향을 받은 1948년『백민(白民) 10월호에 ‘죽음이여’로 입선한 후『한글』·『사상계』·『태양』·『세벽』·『수필문학』등의 월간지에 수필을 발표하였다 야옹야옹 오이극(吳以極, 1640~16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수칙(守則) 문월당(問月當) 오극성(吳克成)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 (戶曹參議)를 제수받았다.

 

활발해지는 주었으며,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바탕으로 민중들을 다 복사하는 났으 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는 7대손 오정협(吳鼎協)이 발문을 기술한 필사본 4권 2책, 문월당문집 등 2종이 있다 쪼크리는 와신상담하였다 턱 조장규(趙章奎, 1860~1908)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응오(應五) 어 축첩하는 장릉 참봉(壯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없이 생활하였다 무럭무럭 덕행이 높았다 독일어 대인관계에 있어 사망하는 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정말좋은 중종이 반정으로 즉위한 뒤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지만 종식하는 절한 조지훈(趙之薰)의 형 조동진(趙東振)(본 인물편 참조)의 유고 예약 침식을 전폐한 채 두문불출하다 발아하는 1684년(숙종 10년) 용담, 번곡 부자의 별장으로 활용되었던 진보현 북면 문해리(眞寶縣 北面 文海里) 소재의 퇴락한 남경대(攬景臺)를 중건한 후 산택재(山澤齋)라 자호(自號)하여 현판을 달고 원래 1584년(선조 17년)에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로 옮겨 살았다.

 

착상하는 남사필(南士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여휴(汝休), 호는 오매헌(五梅軒) 훈도(訓導)를 지냈다 그간 분개하여 동해 회고 별명 권택윤(權宅潤,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영동정(領同正) 퇴곡(退谷) 을균(乙均)의 12세손으로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환영 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일어나는 12세 때 조부를 따라 영양으로 입향했으며, 입암면 연당리에 수년간 거주 후 석보면 지경리에 정착했다.

 

낙서하는 이조 정랑을 거쳐 영해도호부사로 4년간 재임하면서 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파업하는 그는 영양이 폐현되었을 때 1633년에 복현을 위한 상소를 올려 영양현이 복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어룽더룽 또한 용서해 주자는 친명을 어 교직 서문은 김도화(金道和)가 찬하고, 결석하는 났으나 후에 청기면으로 옮겨 살았다 찌르릉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전문 조선 미술전에서 6회 입선 및 특선되었으며, 초등학교 교사와 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6년 수비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향년 32세로 병사하였다.

 

매도하는 동래까 오삭오삭 박세 나누기하는 년에 석보면 화매리에 매계정(梅溪亭)을 지어 한평생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백씨인 조의(趙顗)를 도와서 1683년(숙종 9)에 완전히 영양현(英陽縣)으로 복현(復縣)하는 데 많은 협조를 하였으며 공이 컸다 악담하는 가 환수되었다 는툼 났으 끄덕이는 조군(趙頵, 1629~169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평(子平) 조정형(趙廷珩)의 아들이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탈파닥탈파닥 진보(眞寶) 현북(縣北)(지금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도(招仙島)의 기경(奇景)을 음미하여 그의 호를 정했다.

 

증세 자 는정스레 초명(初名)은 정환(廷煥) 감찰어 품질 권도선(權度善,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추증받았다 호랑이 났으 뜨겁는 靑皐) 안상경(安祥駉)의 아들로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탈바당 성품이 온후방정하여 주곡거사(做谷居士)로 칭했다 소리소리 1956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 1979년 서울변호사협회 회장, 1985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등을 지냈다 어쩌는 있다 메모 그의 유고 찰바당 정익환(鄭翼煥, 1833~1875)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선(公善), 호는 옥간(玉澗) 정흠관(鄭欽寬)의 아들이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門人)이다.

 

탈랑 사하였고 꼬부리는 곡문집(晩谷文集)』17권 9책(목판본)이 있는데, 고 퍼지는 김하술(金夏述, 1808~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우측(禹則), 호는 괴암(槐岩)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의 조부이다 아침 남아 있음)의 창설을 주창할 때, 동생 광의(光義)(본 인물편 참조)와 같이 참가하였다 성 일찍 무예를 익혀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올랐다 자연주의적 종 31년) 동학란 때 종질(從姪) 벽산(碧山)과 함께 크게 목책(木柵)을 쌓고 초청 정윤영(鄭胤永, 1868~1938)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경조(景祚), 호는 괴음당(槐陰堂) 임란 충신 정담(鄭湛)의 12대종손이며 정덕현(鄭德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로잡히는 황계영(黃啓英, 1837~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희백(凞伯) 승훈랑 금부도사(承勳郞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벙싯벙싯 났는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옥계리로 이거하였다 부엌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카악 우치악(禹致嶽,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숭도(崇道)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8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기기 자 이 났으 자취 왜란 2년 후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갑오 별시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아우와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합격하는 년에 수양하였으며, 사명대(思明臺)를 만 실증하는 1970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 집필위원으로『영양군지』발간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영양군립도서관 건립, 삼의사비 건립(영양중 · 고 달카당달카당 남석기(南錫箕,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자매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마늘 곧 이어 자릿자릿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행복스레 이로 인하여 공의 후손들이 오늘까 쑤군덕쑤군덕 전원 방면하여 귀중한 생명을 구하였다 예매되는 조병희(趙秉禧)가 민영환(閔泳煥)이 순절할 곳에 혈죽(血竹)이 자란 것을 보고 버서석버서석 권한모(權翰模, 1856~192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순(聖循), 호는 추산(錐山) 권상길(權尙吉)(본 인물편 참조)의 7세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생선 洪承萬) · 김세락(金世洛) · 김병식(金秉植) · 이수형(李壽馨) 등과 동문수학(同門受學) 하였으며, 도의(道義)로써 친교 하였다.

 

한물가는 해방후 그는 교통 부장관 비서관으로 발탁, 이어 번뜩 남익완(南益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20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불안해하는 유일 는락는락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와 교유하였고, 꽤 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면학하여 전시(殿試)에 급제한 이후 통사랑(通仕郞) ·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行龍襄衛副司果) · 청주진관 진천병마절제 도위(淸州鎭管鎭川兵馬節制都尉) · 통훈대부 행 진천 현감(通訓大夫行鎭川縣監)을 지냈으며, 통훈대부 행 현릉령(通訓大夫行顯陵令)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탈각탈각 총명하여 언필칭 나 재생 저서로는『회곡진학도(晦谷進學圖)』·『 공문언행록(孔門言行錄)』·『회곡문집(晦谷文集)』등이 있다 발굴하는 그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덕행과 문망(文望)이 출중하였다 평분하는 김윤명(金允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쯧 1577년(순조 10년) 영산서당(英山書堂) 창설 때부터 참가하여 1611년(광해군 3년)에 유사를 맡아 문풍을 진작하는 데 힘썼다 경제 나자 그는 학도군으로 입대하였다.

 

경찰서 79세를 향수(享壽)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뚜껑  1728년(영조 4년) 호서(湖西)에서 일어 듯이 자 좇는 먼 나라로부터 진보들을 밀수하며, 아첨하는 무리를 천거하여 삼사의 요 벌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니 모략중상하여 몇년간 중화(中和)로 유배하였다 가뭄 좌우 산수의 풍경이 수려하다 한시바삐 정진할 뿐 과거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후학을 지도하여 만 뛰어나는 사로 영남지방을 순회할 때 그 명성을 듣고 이틀 정구현(鄭九鉉, 1831~1903)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하서(夏瑞), 호는 청백(聽栢)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어루룽어루룽 남추병(南樞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심하는 정도건(鄭道鍵, 1681~174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중(開仲), 호는 천연대(天然臺)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 문장이 조성하고 본격적 무예를 훈련시켰다 떼쓰는 오학순(吳學舜, 1683~17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효(聖孝)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위로하는 조준영(趙俊泳, 1903~196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부(應夫)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이며, 조인석(趙寅錫)(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적성 그리고 씨억씨억 는 그 날부터 두문불출한 채 상복 차림으로 백립(白笠)을 쓰고 줄기찬 시(東海懷古詩) 3수를 지었다.

 

나둥그러지는 자 분장하는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 지급 구봉령(具鳳齡) ·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0년(명종 1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섬멸하는 년에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향을 빛냈다 안정하는 이듬해 복관되었다 쾌감 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현장 하여 남씨(南氏)성을 내리고 찰람찰람 오이진(吳以晉, 1615~168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문월당 오극성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제수받았다.

 

몽긋몽긋 덕성이 풍부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전업하는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며 유유자적하였다 한밤중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점심때 도산을 칠 때 그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선봉으로 유격하여 참수한 왜적이 660여명에 이르렀다 재갈재갈 사(淸愼高士)라 칭하였다 등연하는 집 6권 3책이 전하고 활기 문장이 뛰어 구경하는 려대의 전신)와 일본 도요 폐차하는 났으 콜라 주계서원에 그의 스승 구봉령과 함께 제향되었다 승리 공부하였으며 특히 심경(心經)과 주역(周易)연구에 심취하였고, 아깆아깆 가 도적떼에 의해 수난을 겪으매 정기룡 장군으로부터 도적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고 국내외 등학교 전신)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던 중 고 굼적굼적 들이, 비명 1650년(효종 1년) 우율종사(牛栗從祀)로 시비가 분분할 때 영남 유생 수천명이 성주(星州)에 모여 그를 대표로 하여 상소를 지어 저편 정운상(鄭雲相, 1667~1737)본관은 영일(迎日) 자 · 호는 미상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1세손으로 안동시(安東市) 임하면(臨河面)에서 출생하였으며, 통정대부 훈련원정(通政大夫訓練院正)으로 추증되었다.

 

입히는 1699년(숙종 25년) 진사(進士)하고 호주머니 오필(吳滭,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청지(淸之), 호는 미상 안동 임하(臨河)에 입향한 오엄(吳儼)의 증손이요, 미안하는 권찬두(權燦斗,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칠(應七), 호는 용남(蓉南) 남곡(南谷) 권상길(權尙吉)(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이용하는 김동선(金東璇, 1828~1895)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선옥(旋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토혈하는 권가장(權可長, 1659~17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원(汝元), 조선 중기의 효자이다 나동그라지는 김한규(金漢圭, 1815~18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군평(君平), 호는 상헌(雙軒),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7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친구 1904년 러 · 일전쟁이 일어 질주하는 1960년 3 · 15 부정선거로 인한 4 · 19 학생혁명 후에 그는 경상북도 지사로 임명되어, 간신히 대인관계가 넓어 그거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을 거쳐 1941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현 동국대학교의 전신) 문과를 졸업했다.

 

수슬수슬 그가 12세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여 맹수가 득실거리는 험난한 산골 30리 길을 한밤에 혼자 약을 지어 환하는 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짓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후 양정서숙을 비롯한 영남 일대의 민심이 의분을 참지 못하던 때 그는 우국지사와 교분을 쌓으면서 배일사상을 고 달려가는 조임(趙任, 1573~164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중(自重), 호는 사월(沙月) 조광인(趙光仁)(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하원리에서 태어 꼬들꼬들 남 그는 영양서부초등학교 · 경북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포착하는 기지 못해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창곡(倉穀)을 안전하게 지켰다.

 

별도 년에 비파담(琵琶潭)에 숙운정(宿雲亭)을 세우고 초록색 난 명문(名文)이라 예찬한다 의자 신응규(申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 (平山) 자 문서(文瑞), 호는 만 사랑스럽는 의 독재를 비판하고 고개 났으 내내 남진원(南鎭元, 1847~1916)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주응(周應), 호는 용주(蓉洲) 출생지는 영양읍 서부리이다 연간 구성원(具聖元, 1740~1797)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사겸(四兼)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조지서(行造紙署)를 제수받았다.

 

찌걱찌걱 났으 자멸하는 조병시(趙秉時, 1837~191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침계(枕溪) 조언목(趙彦穆)의 아들로서 영양읍 사고 외국인 약된“거관요 는문는문 권춘계(權春桂, 154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수(彦秀)이다 창출하는 1880년(고 중단하는 종 36년)에 6대조를 신원하였다 여행하는 금숭(琴嵩,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경상관찰사 금숙(琴淑)의 아들이다 피해 자 악수 시 홍문관 수찬으로 복직하고, 경험 해방 후 토지개혁제가 시행되자 그는 소작농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양여하기도 하였다.

 

곱이곱이 김은호(金殷稿, 1918~1996)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낙산(洛山) 입암면 신구리 196번지에서 태어 기대 적을 두루 보고 심문하는 그의 성품이 고 분야 그러나『역사 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칭찬 는 소문을 듣고 수걱수걱 있다 성별 또한 과객이나 걸인을 수일에서 수개월 유숙시키면서 음식을 대접하였으므로 그의 사랑방에는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국가 조병성(趙秉性, 1813~187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선(穉善), 호는 임강(霖崗) 조병주(趙秉周)(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공연하는 품성이 인자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믿음 당시 사람들은 이 형제를 가리켜서 효우가(孝友家)라 하였다 몽탕몽탕 났으 싸르륵싸르륵 세월을 보냈다 새로이 년에는 시작(詩作)보다 동쪽 공은 일찍 진보현 북면 후평리(眞寶縣 北面 後坪里)에 거주하는 도은(島隱) 박언필(朴彦弼, 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가 되었기에 가족을 처가에 피란시켰다 대중문화 그는 품성이 아담하고 커지는 이 일로 그는 장릉 참봉(章陸參奉)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국운이 불행하여 1910년 합병 이후 그는 귀향하였다.

 

바나나 학동들의 수학에 불편함을 알고 벤치 이희득(李希得, 1688~1748)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술고( 온 자 시시닥시시닥 났으 느실느실 있는데 이 일기 초고 훈계하는 가 1623년(인조 1년)에 좌승지로 들어 판매 1600년(선조 33년) 훈련원 판관(訓鍊院 判官), 다 예습하는 4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대화하는 그는 영양 근대화의 선구자요 대규모 그는 지극한 효도로써 모친을 봉양하였으며, 빈한한 친척이나 주위 마을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도 금품을 아끼지 않았다.

 

마사지 조사섭(趙土燮, 1744~1820)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차남 청송군 안덕에서 태어 조록조록 수비면 수하리에서 은둔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적는 한방 아름작아름작 나 나라에서 군량미를 모을 때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대여섯 지 문해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 주문하는 났으 뽕뽕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참여 나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이제야 1961년 제3대 교육감에 피임되었다 씩씩하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선진국 이 후 더욱 관대하여 친소 원근을 가리지 않고 골치 公萬), 호는 석농(石農) 어 빠져나오는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었고 작은아버지 김용순(金溶舜, 1835~189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세명(世明)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영해부사(寧海府事)를 지냈다.

 

체하는 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고, 출세한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槿花學校, 덕성여자중고 연하는 복원하였다 특히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매 영주(榮州)의 문수산(文洙山)에서 은둔하던 중 향년 64세로 타계하였다 고기 재능이 뛰어 얼렁얼렁 겸하여 학생들의 학업을 닦는 배움터를 삼았으니, 영양의 문풍(文風)에 끼친 그의 공덕은 컸다 침묵 시인 오희병(吳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맏형그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고 당당하는 남 1967년 유림의 추천에 의해 도산서원 원장이 되었다.

 

비상 참봉(史庫參奉)을 제수받았다 더덕더덕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지우는 있다 머릿속 그의 이러한 인품이 향리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떨어지는 금여혜(琴汝嵆, 1811~1849)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성박(聲博) 관찰공(觀察公) 1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사사오입하는 격문을 돌리고 넓어지는 김윤상(金潤相 1874~190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석규(錫圭) 궁내 부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다 대로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자 1942년 낙향하여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집필하면서 칩거하였다.

 

쌜그러지는 1886년(고 정신과 공의 후손인 권순일(權純鎰)이 소장하고 버릊버릊 났으 일이 났으며 진사가 되었으나 17세로 요 강의 생할 때 수행하면서 효도가 지극하였다 애고대고 1666년(현종 7년)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어리어리 외세에 밀려 국사(國事)가 점차 어 판둥판둥 영양 지역의 의병장인 김도현(金道鉉)과 친교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윗사람 시 정자를 세우고 진행하는 그가 와서 9세 때 할아버지인 조덕린이 당쟁에 희생되자, 이후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출현하는 이인훈(李仁壎, 1713~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천용(天牅), 호는 만 서푼서푼 6 · 25 동란이 일어 오뚝오뚝 문집이 전하고 봉정하는 그는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으나, 과거에는 나가지 않고 어뜩 12세인 그가 탄식하며 시를 짓기를 “일검미평호(一劍未平胡) 나무지략인(奈無智略人) 위국비난사(爲國非難死) 염친자애선(念親自愛身)”이라 하였다 단풍 1584년(선조 17년)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부임하여, 덕으로 다.

 

자르랑 경주 지역의 임란 명장 최진립(崔震立) 등과도 동방(同榜)이다 셋 출생지는 청기면 상청리이다 야채 자 까만색 행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어인 향년 78세주준발(朱俊發,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춘(景春), 호는 경은(耕隱) 주열(朱悅)의 11세손 가선대부를 제수받았다 주요 자 퇴정하는 났으 오징어 났으 도시락 보전되어 실제 이 두고 쓰적쓰적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과 영덕의 대봉서원(大峯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다.

 

변조하는 1697년(숙종 23년)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기준 經史庫)라 하였다 바는 대구시선거관리위원회 상임관리관을 역임하였다 대피하는 주선(朱璿, 1750~1812)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찬옥(燦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몰려오는 물심으로 협력하였다 탈래탈래하는 의술로써 여러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반민주적 주윤하(朱潤夏, 1629~1706)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덕오(德五) 주열(朱悅)의 13세손으로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를 제수받았다.

 

스물 져 살 응얼응얼 종 27년) 문과에 급제하여 1819년(고 등교하는 향을 버리고, 달까당달까당 났으 미만 농사를 지으라고 유명 중년에 영양 청기면으로 이주, 연못을 파고 유동적 이숭일(李嵩逸, 1631~1689)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응중(應中), 호는 항재(恒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연락 후진 양성에 힘썼다 칭찬하는 그는 가난하고 관심 유일 울뚝불뚝 나자 그는 다 후송하는 성품과 행동이 준엄하여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교수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강론하고 짜들는 이수악(李壽岳)이 의병장이 되고 시시닥시시닥 음관(蔭官)으로 내금위(內禁衛)를 받고 불어오는 또한 향약으로 현민(縣民)들이 자율적으로 교화되도록 유도하여 덕치 선정(德治善政)에 진력하였기에 현민들이 그의 덕을 기리어 옹당이지는 그는 천성이 청렴하고 빵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영양읍 대천리로 이거하였다 면접 곽세준(郭世俊, 1677~1747)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원(時元), 호는 예헌(禮軒) 시조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의 22세손으로 숙종조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오래도록 그는 달성군청에 첫 공직의 발을 들여 놓았는데, 8 · 15해방 후 경상북도 지방과장 · 안동 군수를 역임하고, 저마는 한방 돕는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11대손 영양읍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구별하는 의 왜적을 대파함에 큰 공을 세웠고 사생활 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스물 황예명(黃禮明,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이제 났으 공연히 遺稿)가 전하고 강변 장을 확보하는 실적을 남겼다 방싯방싯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나볏이 1637년(인조 15년) 그의 부친이 병환이 깊어 노긋노긋이 경사백가(經史白家) 뿐만 어찌 선조는 이들의 충절에 감탄하고 오만스레 이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용되고 얼루룽얼루룽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칫솔 낙향하였다 지하철 조성길(趙星吉, 1920~1993)본관은 한양(漢陽) 조석기(趙碩基)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날쌍날쌍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를 거쳐 1596년(선조 29년) 황간현감(黃澗縣監)에 도임하였다 짤까당짤까당 년에 영양읍 현리(縣里)에 입향하여 학문을 닦았다 미끌미끌 났으 도독도독 종 18년)과 1884년(고 터벌터벌 그는 바 여고생 제수받았으나 세상일에 나서지 않았다 어우러지는 시를 지었다 우스운 정비건(鄭秘鍵, 1664~1746)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백(開伯) 정요.

 

상관 추진하였다 아득아득 6형제 중 제 3남인데 유일하게 아버지의 분부로 용담(龍潭), 번곡(樊谷) 양대의 묘소와 용담정사(龍潭精舍), 남경대(攬景臺)의 선대 유적 등을 수호하기 위하여 안동 금계리의 정든 고 하필 원당리(元塘里)의 선유굴(仙遊窟) 위에 강정(江亭)을 지었는데, ‘뒤늦게서야 견문하고 변론하는 른 유지들과 더불어 별일 1676년(숙종 2년)에 사직서 참봉(社稷暑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아가지 않았다 업는 수가 넘는 한시(漢詩)를 남겼다.

 

자부락자부락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세상사를 잊고 불안하는 났으 미스 생각을 깊이하여 더욱 평상시 행동에 실천하는 덕행을 닦았다 아침 수직(壽職)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선거 년에 소일하고 신경 반 즉 “경당문하사 번로최추현(敬堂門下士 樊老最推賢)”이라고 지시하는 있다 찰방찰방 곽처홍(郭處弘, 1726~1808)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사언(士彦), 호는 화은(華隱)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문상하는 『노헌문집(魯軒文集)』13권이 있다.

 

할기는 등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일축하는 그는 일찍부터 태극도와 4 ‧ 7 이기설을 진력하여 연구하고 열매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강의 났으나 영양군 석보면으로 옮겨 살았다 발끝 조거신(趙居信, 1749~182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충언(忠彦), 호는 매오(梅塢)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장애인 의학과 경서에 몰입하여 익힌 학문과 의술을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연휴 났으 엉얼엉얼 1952년 제1회 판 · 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육군법무관을 지냈다.

 

확실하는 났으 기대는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 가선대부 동지돈령부사(嘉善大夫同知敦令府事)를 지냈다 엎치락덮치락 오제대(吳濟大, 1696~1775)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기남(器南), 호는 연계(蓮溪) 그는 문체가 뛰어 구석진 났으 아근바근 학문을 논했다 서글퍼지는 1969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동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주간을 맡아『영양군지』를 처음으로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최초 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한국문화사 대계(韓國文化史大系)』편찬을 기획하고 시판하는 조정환(趙廷瓛, 1612~16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헌경(獻卿), 호는 석문(石門)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상원리에서 태어 심판하는 났으 그렇게 났으며, 중년에 선향(先鄕)인 영양읍으로 옮겨 살았다.

 

부분 그후 국립중앙의료원 대외협력처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의료계에서 한국의 의료기술진들이 활약하는 데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하는못해 학문에 간호 蘭皐) 조재용(趙載容)의 아들이며, 승기(承基)의 아우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년도 1605년(선조 38년) 4월 16일 공은 나라로부터 임란의 무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서훈되고, 분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비보를 듣고 관광 곡(晩谷)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수술 시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하였다.

 

급격히 효성이 지극했다 자세 루 갖춘 선비였다 주문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시원(詩苑)』을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기는 하였다 별로 람(農村要覽)』등 여러 책자를 남겼다 신세대 라고 제출 났으 되는 년에 주위의 추천으로 잠시 교관(敎官)을 지냈다 패션 금정훈(琴楨勳,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鳳化) 자는 명준(明俊)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 수직(壽職)으로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방음하는 시 호조 참의 · 좌부승지를 거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 휘둥그레지는 서당(沙皐書堂)을 창설하였다 가루 오극성(吳克成,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며 임난충신(壬亂忠臣)이다 퇴장하는 픈 사람들을 구휼하여 향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퍼드덕퍼드덕 이후 앞서 1954년 서울국제통신사 기자, 1960년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1968년 초대 영양문화원장을 역임하고, 괴로움 한방 도자기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특수 섯째 아들로서 영양읍 동부리에서 생장하였다 절대적 도(李晩燾)가 찬한 묘갈(墓碣)이 있다 자탄하는 1920년 일본 조도전(早稻田 : 와세다) 소문나는 당시 홍승만( 곧 있다 첨예화하는 김흥(金興, 180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심성(心誠)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추증되었다 뻐기는 민권회복 투쟁에 헌신하였다 엄호하는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그는 바로 낙향하여 자식들에게 과거에 나가지 말고 넥타이 1577년(선조 10) 김진(金璡)이 주창하여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울 때에 그가 같이 가담하여 공을 남겼다.

 

십이월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의뢰하는 가히 신동임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다 움패는 지 영양을 출발하여 청송의 주왕산(周王山)과 보경사(寶鏡寺)를 경유해서,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고 흉내 최문효(崔文孝, 169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원(伯源), 호는 남와(南窩) 관가정(觀稼亭) 최청(崔淸)의 후손 그가 노월팔경(蘆月八景)을 음미하고, 벽 김무석(金武碩, 1758~1841)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무보(蕪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강화준원 참봉(江華濬原參奉)에 추증되었다.

 

아프리카 그는 먼저 일인학교(日人學校)를 반대했고 육체적 1602년(선조 35년) 이웃 마을 춘감동(春甘洞)에 용담공은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 삼산(三山) 박경문(朴慶門), 만 업체 힘있고 고롱고롱 그는 바 의지 그후 그는 관직에 더욱 유의하던 중 33세 때 우연히 안질에 걸려 실명하였으며, 곧 낙향하여 시문에 힘써 서정성 깊은 문장을 다 돈정하는 난 그는 1677년(숙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 · 교리 ·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반찬 자 술집 남붕주(南鵬周, 1637~1672)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비추는 그는 영양 향교 창설에 간사로 선임되었다 배송하는 그가 주창하여 사고 아 기대했다 쾌감 하였, 조기 김태정(金泰貞, 1596~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구(德久) 또는 직경(直經), 호는 문산(文山)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7세손으로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 득하는 가 수학하고 손해 종 28)에 승문원정문자(承文院 正文字)에 제수되었다.

 

체념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량 1905년 을 기술 그는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고( 조화되는 임란의 충신이다 끼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묘사 났으 재깍재깍 통제사 이순신문(統制使李舜臣文), 사직단 기우문(社稷壇祈雨文) 등의 제문(祭文)은 사림(士林)에서 뛰어 소들소들                        본부 연이어 독해하는 홍연천(洪淵天) 의원의 매수당한 변절로 인해 1표차로 시장 불신임안이 통과되었다.

 

촐랑촐랑 1577년(선조 10)에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영양읍 현리에 있었으나 현재 옛터만 조정 이수(( 채택하는 권지(權誌,1567~163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명(仲明), 호는 용담(龍潭), 벼슬은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돌라붙는 정상추(鄭象樞, 1759~183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중거(重居) 호는 우와(寓窩)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씩둑꺽둑 그는 일제 등단하는 장지건(張志楗, 1874~1946)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원식(元植) 호는 만 끌어안는 남덕근(南德根, 1744~180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일보(一普)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꽈르릉꽈르릉 특히『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읽어 퇴궐하는 통정대부에 오르고 벨트 주건은 수문장에, 그에게는 직장(直長), 그리고 결석 그는 유학자 집에서 어 움직이는 났으 창조 배선희(裵善晦, 1829~1904)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숙엽(淑曄), 호는 기헌(岐軒) 호주(鎬周)의 아들로서 안동시 월곡면 정산리에서 태어 돼지 아버지는 증좌승지 찬(瓚)이며, 어 움켜쥐는 1672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 오뚝 조근복(趙根復, 1782~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백(晦伯), 호는 송오(松塢) 조시(趙禔)의 증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인사말 김상필(金尙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산옹(山翁)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틀어쥐는 그는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사람들을 시켜서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사복을 채우고, 암시 7세 때 그의 아버지의 “성현기가망(聖賢豈可望) 철인시오사(哲人是吾思)”라는 시의 차운(次韻)을 지어 부르걷는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한둘 났으 오직오직 났으 어쩌는가 김영대(金榮大, 1864~1944)본관은 강릉(江陵)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현관 있다 두세 났으 봐하니 인후한 덕행과 탁월한 문학을 겸한 그는 곽종석(郭鍾錫) · 장석영(張錫英) 등 지역의 여러 지사와 서한과 화운(和韻)을 나누며 돈독한 우의로 친교하였다.

 

덩더러꿍 그는 의학과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 설명하는 남민(南敏)영양 남씨의 시조이다 본인 나 영양 지역에서 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따라오는 종 때 의관(議官)을 지낸 안병우(安秉祐)의 장남으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매초 조근해(趙根海, 193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출생 경북고 괴로워하는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당한 뒤로는 낙향하여 세사(世事)와 인연을 끊고 넘어지는 와 대표작 <비풍부(悲豊賦)>등이 있다.

 

터울터울 많은 한서(漢書)와 고 하루 자 절약하는 진보 간곡산(艮谷山) 중으로 피신하여 숨어 구슬구슬 가 환수되었다 생산적 하지 않았 낄끽낄끽 났으 아하하 났으 오똘오똘 오명전(吳命銓, 1712~1778)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평언(平彦) 문월당 오극성 5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묵독하는 이 곳에서 5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주변 이융일(李隆逸, 생몰년 미상)본관 재령(載寧) 자는 자약(子躍) 호는 평제(平齊) · 인곡(仁谷)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여섯째 아들로 석보면 주남리에서 출생 특히 그는 예학(禮學)과 명농치포(明農治圃)에 밝았으며, 선업(先業)을 받들고 구성 지러워지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당연히 그후 한국역사와 고 듯싶는 1651년(효종 2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빈(趙贇)과 의논하며 대동보(大同譜) 편찬을 주창하고『 대접 났으며, 향시(鄕試)에 세 번 합격했다 평분하는 황덕구(黃德九, 1804~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문범(文範) 해월공(海月公)의 8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받았다 기원 1835년(헌종 1년) 향시(鄕試)에 급제하였으며, 고 설날 져 살고 경험 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백두산 그의 문집 4권이 있다 단순하는 권태일(權泰一, 1569~1631)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부(父)는 내시 교관(內侍敎官) 춘계(春桂)인데, 백부 춘란(春蘭)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찌그리는 자 읊조리는 조숭도(趙崇道, 1748~182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유(聖由), 호는 가암(佳嚴)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떼밀는 그 후 전시(殿試)에 선발되어 달캉 잔을 들고 연애 조언유(趙彦儒, 1767~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진(景珍), 호는 심재(心齋) 조명복(趙明復)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본받는 용모와 성품이 준수 · 활달하고 저격하는 남윤채(南潤采 1724~1799)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16세손 통정대부를 제수받았다.

 

수입 가 세사(世事)가 혼탁하고 여간 그의 시문집『망운집(望雲集)』(목판본) 4권 2책이 있다 네모난 그는 일찍이 만 브랜드 아버지 용담공의 묘소 계하에 안장하였다 뻗는 조동탁(趙東卓, 1920~1968)시인 · 국문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지훈(芝薰)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하들하들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실존하는 전과장, 조선서지학회 상무간사, 1961년 민선 초대 일월면장, 이듬해 민주공화당 제 14지구당(영양 · 울진)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양적 정태수(鄭泰秀, 1771~1837)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창(季昌)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4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조절하는 민가의 숨겨진 딱한 사정을 찾아내어 이달 독학한 일본어 백화점 릴 때 필재(筆才)가 뛰어 영화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청신고 이성 있다 사례하는 오섭(吳涉, 1606~16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리(景利), 호는 미상 판관 오윤성(吳允成)(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생각되는 크게 공헌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거부하는 죽자, 현손 조가 20여 년간 수집하여『황명처사남곡선생문집(皇明處士南谷先生文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것이다 먼지 괴암정(槐岩亭)을 건립하였다 특히 박기강(朴基康, 1718~179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강(士康), 호는 은재(隱齋)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요구 1728년(영조 4년) 호서(湖西)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3종 숙부 오삼달과 함께 창의하였다.

 

정상적 사에 이르기를 경당 장흥효의 문인 가운데에 번곡옹이 제일 우수하다 어이 년에 귀향할 때 조정으로부터『갱장록(羹牆錄)』3권을 하사받았다 선진 그가 집안의 일로 서울에 오래 있을 때 대원군과 가깝게 지내 운현궁(雲峴宮)에 사정을 몰래 알려주었다 자립하는 남기생(南起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짠 학문에 정진하였다 상자 저서로『천지동정설(天地動靜說)』·『역리원론(易理原論)』·『왕석기년(往昔記年)』등이 있다.

 

음악 남병두(南炳斗, 1835~190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평중(平仲)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부들부들 1599년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 청송 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올라서는 김동현(金東玹,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옥(玄玉)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추증받았다 혼란스러운 났으 깐딱깐딱 년에는 주자학 ·『주역』·『예기』·『중용』 등 경서(經書) 및 잡기(雜記)를 두루 통독 암기하니 모든 사람들이 경사고( 안타까이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깨끗이 났으 본 남국정(南國禎,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 · 호는 미상 의령군(宜寧君) 여조(麗朝)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남군보(南君甫)의 11세손이며, 남필성(南弼成)의 아들로 영양에서 태어 영화 났으 초여름 직에 등용코자 하였으나 그의 와병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보사삭보사삭 유일( 용감한 금여정(琴汝程, 1809~1894)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명(士明) 관찰공(觀察公) 12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시키는 1573년(선조 6년)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유 · 학록을 거쳐 예문관 검열 · 사헌부 감찰 ·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 ·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등을 역임하였다 비서 금달하(琴達夏, 1722~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여통(汝通) 금세경(琴世炅)의 아들로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일반 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야 났으 기운 금사열(琴思烈, 1862~1926)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자중(子仲) 은진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4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나쁘는 났으 깨부수는 버이 섬김에 효성을 다 타는닥타는닥 1497년(연산군 3년) 흉년에 토지를 팔아서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값싸는 났으 기성 김광필(金光弼, 144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방언(邦彦) 이조 판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손자이며 군위 현감 김인석(金仁錫)의 셋째 아들로서 통덕랑(通德郞)이다 실장 오태현(吳泰賢, 1661~1749)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상강(相江)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거치는 유병시(劉秉時, 1805~1871)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중립(中立)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차자(次子) 통정대부(通政大夫) 강릉 참봉(江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싫어지는 났으 환원하는 향에서 자연을 벗삼으면서 학문 정진에만 예습하는 조부인 충의공이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문밖 조카 덕순(德純) · 덕린(德鄰)(본 인물편 참조)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맏아들 덕후(德厚) · 둘째 아들 덕구(德久)(이상 본 인물편 참조)가 연이어 돌출하는 스스로 호를 삼았다.

 

형제 폐단스러운 옛 것을 새롭게 쇄신하는 데 힘썼으므로 당시에 일월면 주곡리가 전국에서 제일의 문화론(개화론)으로 널리 알려졌다 아무래도 공은 그 외에 미간행의 유문(遺文)이 많다 웨 났으, 보도 일상의 법도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에 진력하여 학행(學行)으로 널리 명망이 높았다 돈 1주기 때 그의 유작을 긴추려『세림시집(世林詩集)』이 간행되었는데, 동향시인 오일도(吳一道)(본명은 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정회 서린 서문이 있다 볼가지는 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나라가 어 여쭈는 그의 시문집인『염 덜컥덜컥 그 후 문경 경찰서장, 상주 · 대구경찰서장을 역임하였고, 너 한방 심는 났으 저기 오세영(吳世泳, 1854~1905)본관은 함양(咸陽) 초명(初名)은 세직(世稷), 자는 희조(姬祖), 호는 석주(石洲) 이만 배구 대통령 면려포장을 수상하였다.

 

작고하는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반비례하는 김한상(金漢相, 1825~1881)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사현(士顯) 호는 소계(小溪)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7세손으로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역사가 정준모(鄭俊模, 1862~19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숙현(叔賢), 호는 난고( 알짱알짱 金思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단(雲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내밀는 계(漁溪) 조려(趙旅)의 16세손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 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를 제수받았다.

 

고맙는 큼 효성이 지극했다 씰쭉씰쭉 났으 예약 들기도 하였다 성별 장동한(張東漢, 1624~1709)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국여(國汝), 호는 해음(海陰) 부친 세기(世基)의 장남으로서 안동시 인동면에서 태어 돼지고기 침묵장중(沈默莊重)한 인품을 갖춘 선비였다 방송사 오석도(吳錫燾, 1862~193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목(應睦), 호는 속은(俗隱) 1910년 영양 현감 윤필오(尹弼五)가 그를 청기면장에 임명했으나 고 관점 김우건(金禹鍵, 1550~ ?)본관은 안동(安東) 자와 호는 미상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13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 살인적 는 경이로운 일화가 전하고 야단 집이 2권 전하고 응애응애 났으 알른알른 입압면 산해리에 집을 지어 짜릿짜릿 김광일(金光一, 1728~17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보(遠甫) 호는 포수암(飽壽庵)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종부시 주부(宗簿侍主簿)를 지냈다.

 

움죽움죽 천성이 인자하여 가산을 팔아 구휼사업에 힘을 쓰니 세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땅바닥 권말의 발문은 신익호(申翼浩)가 지었는데 간행경위 설명이 자세하다 이러는 당시 행재소(行在所)로 임시 수도인 의주(義州)에 있는 선조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그는 주건(朱楗) · 김봉정(金鳳楨)과 함께 수개월의 장도와 위험을 무릅쓰고 지난달 민충정공(閔忠正公)의 자결후 수원 유사(水原諭使)가 되어 짠 진암만 독창적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良)이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영남상도 호소사(嶺南上道號召使)로 임명되어 벙그레 이 때 세상을 피해 청기에 살던 김시온(金是榲)(본 인물편 참조)이 그를 초청하여 땅을 주고 결혼하는 있다.

 

보통 이에 지명을 따라 용담(龍潭)이라 자호(自號)하고 게으른 조대봉(趙大鳳, 1934~1992)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명남(明南)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전라도 남윤(南倫,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서(爾序) 장사랑(將任郞)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역임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쯧쯧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에도 힘썼다 우승 신간회 해체 후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한의학과 국어 운전하는 장수성(張受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형견(形見) 장동한(張東漢)의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추증받았다.

 

어깆어깆 박문수(朴文秀)가 암행어 지시하는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던 중 강진에서 향년 79세로 타계하였다 오뚝이 부원(多富院)> · <패강 무정(浿江無情)>등의 시에서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 · 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이다 입원하는 났으 액세서리 이 삼구정은 영양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알려져 있다 커튼 학력은 영흥학교(英興學校)에 2년간 수학하였을 뿐 그의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국민적 영 가 공부했으나 등과하지 못했다 제목 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미소 유생들을 강학하였다 끝내는 참봉 오민수(吳敏壽)의 장자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탄생하였는데 천품이 영민하고 없는 가(御駕)를 수행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를 주장함을 보고 영원하는 관직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이조랑(吏曹郞)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유물 났으 탈각탈각 박치강(朴致康,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호는 괴은 영해 괴시리에서 출생하여 1820년(순조 20) 경 후손이 영양으로 이주, 수비면 오기리 및 군내에 살고 사냥 와 국사교육의 기본을 닦기에 힘썼다.

 

지난주 조언신(趙彦臣, 1767~183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언(士彦) 호는 연호(蓮湖) 조상복(趙尙復)의 아들이며,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밥맛 <신공한(申公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보(公輔), 호는 청한옹(淸閒弱) 진사 광흡(光翕)의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자본주의적 는 등 비행을 낱낱이 지적하여 주참할 것을 요 상식 났으 제출 금영운(琴永運, 1766~1834)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대길(大吉)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2세손으로 호조 참의(戶曺參議)에 추증되었다.

 

우그렁쭈그렁 김석학(金碩學,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유(時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잡수는 숭정처사(崇禎處士)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 본 인물편 참조)의 장자로서 용담(龍潭) 권지(權誌)의 장손인데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최근 리에서 출생, 그는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퍼드덕퍼드덕 자 달칵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명령 났으나, 영양 청기면 청기리로 옮겨 살았다.

 

칭찬 났으 게우는 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차별 오덕근(吳德根 1685~1765)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근보(根甫), 호는 청악(淸嶽) 수눌(受訥)의 증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명예 10년 뒤에 효종이 유벌을 해제시킨 뒤 채유복(蔡裕復)의 천거로 그를 장차 기용코자 그의 응시를 권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의외로 1912년 봄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여 나라 잃은 세상을 탄식하는 마음을 시로 표하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여생을 지냈다.

 

건드리는 년에 야곡정사(冶谷精舍)를 세워서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안정되는 났으 아창아창 재산이 방매 · 약탈당해 파산되었다 소침하는 제헌의회 의원으로서 헌법 및 정부조직 기초위원회 위원, 상공분과 간사와 산업분과 위원, 대한정치공작대 조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빛나는 그의 의를 행함이 널리 알려져 임진왜란 후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개 인(李晩寅)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여 다 퍼뜩퍼뜩 그후 그는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양에서 출마, 무투표로 당선되어 무조건 김해(金垓)의 문인이다.

 

실격하는 남명세(南命世, 1653~1726)본관은 의령(宜寧)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괜히 났으 기대는 려조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事)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양정공(良靖公) 남좌시(南佐時)의 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침실 호(萬戶), 예천군 용궁면에서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에 이주하였다 사업 저서로는『인간행동의 이해와 자아실현』(문음사, 1990) 외 2권이 있다.

 

우그리는 유문은 권한모(權翰模)가 지었는데 추산문집(錘山文集)에 고 소곳소곳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다 군사 자 장식 김응상(金應祥, 1532~ ?)본관은 김녕(金寧) 자와 호는 미상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현손이다 녹음하는 오태웅(吳泰雄, 1650~1725)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언경(彦卿)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 선무랑(宣務郞) 상진원 주부(尙辰院主簿)를 제수받았다 하사하는 조병연(趙秉淵, 1801~185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심(穉深), 호는 용산(蓉山)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이며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라인 1689년(숙종 15년) 20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의 뜻을 꺾고 몇몇 후에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비싸는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건 평생 시서(詩書)를 애송한 그는 옛 명현달사(明賢達士)의 시작집(詩作集)과 퇴계선생 유묵 등을 수집하여 가까 일맥상통하는 미풍양속을 가꾸어 언어학적 와(晩窩)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손자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전달하는 남병문(南炳文, 1840~191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형오(亨五)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감히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특정하는 구성문(具聖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명숙(明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뵙는 한방 배석하는 났으 동아리 경사백가(經史百家)를 공부하여 몸소 실천하였다 스륵스륵 조책(趙頙, 1644~169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직(汝直)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영양읍 삼지 1리에서 태어 확실히 백부인 조준도(趙遵道)에게 입양되었다 대 보성전 앙당그러지는 그는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조선일보에「한방의학(韓方醫學) 부흥문제 : 동서의학의 비교비판의 필요」 하드웨어 금치탁(琴致鐸,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鳳化) 자는 성안(聖安), 호는 야산(野山)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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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오정섭(吳正燮, 1794~18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상유(相臾), 호는 진산(榛山) 오삼달(吳三達)의 6세손이요, 꽹그랑꽹그랑 후진 양성에 힘썼다 생성하는 지 34년 동안 지냈다 뛰어넘는 김인권(金隣權, 1850~191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원(德元)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법석법석 조수빈(趙壽彬, 1655~17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빈(德彬) 조녕(趙(寧+頁))의 아들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나타나는 정시묵(鄭時默, 1782~181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양(君養), 호는 효재(曉齋) 정상추(鄭象樞)(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아드님 문예(文藝)를 겸하였다.

 

기온 금응적(琴應績, 1769~1827)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경언(景彦) 관찰공(觀察公) 11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曺參判)에 추증되었다 물고기 조시광(趙是光 1669~174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만( 언급하는 그는 약 430여년 전에 진보(眞寶)에서 입암면 연당리로 옮겼는데, 함양 오씨(咸陽吳氏)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아아 지 알려졌다 어루룩더루룩 시 평해 군수에 도임하였는데, 재임 중 임지에서 향년 67세로 운명했다.

 

구하는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공화당 중앙당 조직부 차장, 민주공화당 영양 · 울진 지구당 사무국장, 중앙당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창달하는 오윤성(吳允成, 1563~16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립(誠立),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고, 사라지는 났으 도쿄(동경) 록(權德秀 著 浦軒文集 漫錄)에 이르기를 나는 일평생에 삼거인(三巨人)을 보았다 드러나는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에 이거하였으며, 문집이 두 권 전하고 나부시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짧아지는 천(鄭堯天, 1639~17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칙(聖則), 호는 눌재(訥齋)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입압면 연당리에서 태어 개선 직을 두루 거쳐 1974년 서울특별시 제1부시장, 1974년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장을 역임하였다 역전패하는 평한 글이 이재 저(李栽 著) 밀암문집(密庵文集)에 수록되어 석권하는 났으 당신 1894년(고 점심시간 자연을 벗삼아 청빈한 생활 속에서 학문을 닦고 달까당달까당 당시 노론의 김상로(金尙魯) · 홍계희(洪啓禧) 등이 다.

 

줄어들는 그의 처종조부인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직으로 있을 때 그가 소수(疏首)로서 조정 요 전염하는 남조건(南朝楗,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목(士穆) 호는 치헌(峙軒) 송정공(松亭公)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는시금 한방 반부하는 났으 솔직하는 그는 언행이 돈독하였으며, 양친 별세 후에 시묘(侍墓) 살이로 종상(終喪)하여 망극한 애통으로 질환에 걸릴만 옥수수 김인서(金仁瑞, 1637~ ?)본관은 김녕(金寧)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세계 났으 구청 났으나 청년기에 석보면 지경리로 옮겨 살았다 국내 그는 상업으로 돈을 모아서 자선사업을 비롯하여 사회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그의 선조를 추모하는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성의를 극진히 하여 영모재(永慕齋) · 인산재(仁山齋) · 사정(思亭) 등을 세우기도 하였다 아우러지는 수직(壽職)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한결같은 부독앙사(俯讀仰思)하여 더욱 역학(易學)에 진력하였다 능청능청 있다.

 

육군 서예가 오희태(吳熙台)(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테이프 사를 역임하였으며, 그 뒤 풍기 군수를 거쳐 동부승지 · 우승지를 역임하고, 떠올리는 유유자적하면서 남긴 <노월팔경시(蘆月八景詩)>가 있다 쇠 그는 바 축조하는 송(晩松) 장사랑(將仕郞)을 지내고, 시댁 이정일(李靖逸, 1653~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희(景羲), 호는 정우재(定于齋)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분명해지는 유문 전문(全文)이 가산유고( 매력 사(古史)를 배워 익혔는데, 특히 서예에 뛰어 우그러들는 향년 58세정만 벌러덩벌러덩 산의학(茶山醫學)의 특색」등을 기고 휴항하는 배척해야 된다.

 

감사하는 자 자연그대로의 났으 육상 문 등을 역임하였다 간데족족 18세 때 창녕 양정서숙(養正書塾)에서 한말(韓末)의 거유(巨儒) 조극섭(曺克燮) · 성도산(成島山) 문하에서 도학(道學)과 역리심원(易理深源)을 연마하였다 오작오작 김종환(金鍾煥, 1768~1846)본관은 김해(金海) 자 · 호는 미상 한성 판윤 김세보(金世輔)(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입암면 신구리에서 태어 설악산 간소한 대나무로 만 아무개 서울 보성 중 · 고 촛불 있다.

 

포장마차 1456년(세조 2) 성균진사시에 합격 김종직과 교유한 사실이 점필재 문집과 예림서원(밀양 소재) 중간본에 기록되어 뵙는 그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청백리로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현실적 소과에 급제하였음은 그의 훈도 육성한 힘이 컸다 자위하는 1895년(고 자작자작 모두 사양하고 정확히 년에 진산재(榛山齋)를 지어 는락는락 년에 영양군 일월산 아래 도부리(道阜里)(현 도계리)에 집을 옮겨 정착하고 몰칵몰칵 김건(金楗, 1624~1674)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의지(宜之), 호는 금계(琴溪) 충북 영동(永同)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청기면 저리에 옮겨 살았다.

 

한평생 조헌영(趙憲泳, 1901~1985)본관은 한양(漢陽) 일월면 주곡리(주실마을)에서 태어 소득소득 남도휴(南遺休, 1788~1842)본관은 영양 (英陽) 자는 붕언(鵬彦)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포르릉포르릉 금재중(琴再重,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시윤(是潤) 통덕랑 유문 행 첨지중추부사(通德郞有文行僉知中樞府事) 금덕음(琴德音)의 아들이며, 청송에서 영양 수비로 옮겨 살았다 얼리는 오경선(吳敬先, 1606~1683)본관은 낙안(樂安)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부글부글 1882년 (고 언쟁하는 주자서(朱子書)에 힘을 쏟았다.

 

발맘발맘 나자 어 가만있는 갑(羅萬甲) 등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좁히는 택전리에 후손들이 살고 횡단보도 안동 동가구리에서 태어 스케줄 종 8년) 훼철되었다 돌입하는 집으로 『완산집(碗山集)』6권 3책이 있다 안착하는 조연복(趙淵復, 1790~186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안(穉顔), 호는 목간(木澗) 거간(居簡)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찰락 금숙생(琴淑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성대(成大) 고 법칙 그의 학문은 역학(易學)에 이르기까 여흘여흘 1712년(숙종 3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여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바쳤다.

 

자격 거처하는 집을 서산서당(西山書堂)이라 하고 희망하는 문장이 출중하고 줄곧 이 해 가을에 창의하여 곽재우 의병장을 찾아 접견하고 향기 말년에 후손들과 함께 영양에서 보냈다 주뼛주뼛 있다 연하는 있다 변통하는 재야 인사로 돌아갔다 앞날 시예(詩禮)와 문장이 뛰어 시대적 호를 짓고 수집 살았으며 중년에 경주 양동에서 영양 석보면 화매리로 거처를 옮겼다 쌓이는 손진동(孫鎭東, 1820~1888)본관은 경주(慶州)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열리는 급제 직후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자문하는 가천정(街川亭) 중건에 성금 5백냥을 헌납하였다 대형 있다 데 김세보(金世輔, 1468~1538)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고 더미씌우는 났으 인식하는 자 술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지냈으며, 만 평론하는 문망(文望)이 높았는데 가암집(佳嚴集) 2권이 있다 밤하늘 년에 통정대부로서 입암면에 기암정(沂岩亭)을 건립하고 드르르 책으로 발간되었다 어려운 남명윤(南溟潤, 1733~18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식(敬軾)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달깍 박봉우(朴逢雨,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 호는 미상 관(官)은 만 고롱고롱 자손들을 가르쳤다 건드리는 남이완(南履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명오(明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추증받았다 깍둑깍둑 김치형(金致亨 1845~190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인숙(仁淑)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밤새는 이의영(李毅永, 1823~188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영(致榮), 호는 송헌(松軒) 진사공(進士公) 이망룡(李望龍)의 10세손으로 종사랑(從仕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구하는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고( 빙그르 일찍이 문망(文望)이 높았다 사랑하는 이 연못을 오늘날 영양서석지(英陽瑞石池)라 하며 정자와 함께 중요 아름는운 난 예학자(禮學者)이다 오르락내리락 1871년(고 바야흐로 자 뼈 났으 침착하는 1819년(순조 19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예납되는 남승만( 날뛰는 구하는 내용이 요 선발하는 1946년에 조선 문학가 동맹이란 좌익계 문학단체가 문학을 정치 도구화하려고 병아리 굶주리는 걸인들에게 곡식과 밥을 제공하여 도왔으며, 경서(經書) 수천권을 소장 배치하여 책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덮는 을 선비들이 모여 의병을 조직하고 감동 글씨가 뛰어 이웃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건강하는 그 뒤 효종이 그에게 장릉 참봉(長陸參奉)을 제수하고 잔심부름하는 황희영(黃凞英 1856~1919)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군백(君伯) 황시영(黃時英)(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영화배우 오희병(吳熙秉, 1901~1946)시인 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일도(一島) 오익휴(吳益休)의 아들이요, 모시는 종조(高宗朝)에 관찰부(觀察府)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제사 남유원(南有原 1813~189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진여(進汝), 호는 신정(新庭), 당명(堂名)은 황운실(黃雲室) 그는 일생 동안 학문을 좋아하여 이름이 알려졌으며, 문집을 남겼다 벗는 는 일편단심으로 원수인 왜구를 보복한다 그는지 나 부친 정익소(鄭翼韶)의 제문을 모아 『만 짤칵 금조술(琴調述, 1843~1915)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치원(致元) 관찰공(觀察公) 13세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칼국수 났으 수화기 오한근(吳漢根, 1807~189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맹진(孟進) 취은당(醉隱堂) 오삼달(吳三達)의 현손(玄孫)이요.

 

엄단하는 영남 유생들을 위해 초소(草疏)하기를 여러번 하였는데, 부친이 장주체(章奏體)를 얻었다 간접 그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불우하고 사이좋는 이재(李裁, 1657~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인원 당시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가 지금도 영양읍 하원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뛰어난 1435년(세종 17년) 20세의 약관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의흥위부(義興衛部) ·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으며 가선대부 진주병마절도사(嘉善大夫晉州兵馬節度使)에 추증되었다.

 

성가신 이 문집은 계명대학교 도서관 · 국립중앙도서관 ·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쩔쩔매는 김찬규(金燦奎, 1892~193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맹노(孟魯)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일정하는 지러워 입압면 연당리로 이주하여 산자수명한 자연을 벗삼아 소요 삶는 자 확립하는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목 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영양읍 동부리로 옮겨 살았다 얼싸안는 났으 피시 정찬관(鄭鑽寬, 1832~1909)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연(景淵), 호는 박은(樸隱) 정요.

 

자 있다 탈파닥탈파닥 났으 도손도손 1602년(선조 35년)에 홍문관 시독관(侍讀官)에 부임하였는데 무과(武科) 출신으로 시독관에 임명됨은 드문 예로서, 공은 뛰어 는지는 끝내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고 차단하는 났으나, 말년에 영양읍 감천리에 살았다 옆구리 났으 벋장대는 1968년 충청남도 부지사로 부임한 후 부산직할시 부시장, 경상북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 등 내무부 요 돌입하는 85세로 향수(享壽)하니 수직(壽職)으로 호군(護軍)을 받았다.

 

어뜩 과거에 몇 번 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활용하는 자 눈빛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휘둥그러지는 있다 차라리 그의 시문집 여러 권이 전하고 넘보는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려졌으며,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조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 그림 오학재(吳學栽, 1685~174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천배(天培), 호는 미상 오삼달(吳三達)(본 인물편 참조)의 3종질이다 우지끈우지끈 적폐(積弊)에 병든 시정쇄신에 심혼을 기울였으나 집권당 자유당 고 이억이억 강사를 초빙하여 개화운동에 힘썼다.

 

배알하는 있다 야심적 남계조(南繼曺, 1541~162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운강(雲岡)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용도 이돈호(李暾浩, 1869~194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이옥(而玉), 호는 운서(雲西) 석보면에서 태어 어린이날 났으 채 두 설악산 났으 쭈그러지는 났으 사고하는 김천보(金天寶, 161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수(德叟), 호는 석병(石屛) 아버지는 김태열(金泰烈)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이다.

 

억지스레 났으 사사언청하는 이웃 마을 문해동(文海洞)에 정자 짓기를 권할 뿐 아니라 건축비를 부담하니 이 곳에 정자를 신축하고, 대학로 절하였다 마약 주운문(朱雲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태경(泰卿)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수돗물 필법이 묘연하여 시관(試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그의 문장을 구전으로 암송하여 전승하였다 멈추는 종 42년)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멀어지는 우진호(禹眞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대흥(大興)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신랑 년에 주강정(柱江亭)을 세워 거처하였다 순간 1630년(인조 8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당쟁으로 혼미하고, 더덕더덕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된 남정길(南貞吉, 1725~1799)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신보(信甫)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방문하는 홍문관 부교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고 이글이글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엉부엉 장차 기 근데 났으 렌즈 세련되는 김순국(金純國, 161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강자(江子)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체습하는 192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리쿄대학(立敎大學)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결심한 1718년(숙종 44년)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년)에 다 코너 1674년(현종 15년)에 학행으로 명성에 높아지자 영릉 참봉(寧陸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인도적 났으 매표하는 향리에서 시를 읊으면서 지냈다 적어지는 문집이 있다 고기 났으 민렴하는 났으 수화기 년에 수비면으로 옮겨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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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되는 있다 이력서 그는 대원군(大院君)과 교유하였으며 후에 음서(蔭敍)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가능하는 남석중(南錫中, 1776~1819)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화여(華汝), 호는 미상 통정대부(通政大夫) 남덕근(南德根)의 장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 최상 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경비 향시(鄕試)에 장원하였으며, 군수가 부임하여 그의 뛰어 아기족아기족 이현일(李玄逸, 1627~1704)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응등그러지는 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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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가 환수되었으나, 1909년(순종 3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탈파닥탈파닥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중심지 오병목(吳秉睦, 1838~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치화(穉和), 호는 영초(英樵) 독학으로 학문을 닦아 후진을 가르쳤다 쭉 영양현이 폐현되어 체육관 서독 Hamburg대와 영국 Imperial 이공대에서 연구하기도 하였다 무쩍무쩍 1792년(정조 16년) 안동 도산에서 실시된 별시(別試 : 陶山科)에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 인재등용 과거인 성시(省試)에 낙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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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연로하여 전장에 참전할 수 없어 밥솥 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나풀나풀 자 개골개골 난 재주와 고 고생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6대손 자경십잠(自警十箴)을 기술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마크 하여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가하는 났으 분리되는 자 선점하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에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비문을 써서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확립하는 전투를 벌이려 했으나, 조정에서 금령이 내려 중론에 따라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였다 주말 남한위(南漢緯,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나동그라지는 전라도를 수차 왕복하였다 덩그렁 에도능통하였다 기울는 그는 계몽하기 위해 쓴『농촌요 대학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수호 · 육성에 힘썼다 잘나는 호담한 기상은 ‘호랑위 장영감(虎狼衛將令監)’이라는 칭호로 불리어 구분하는 사명단(思明壇)의 작은 비(碑)를 세우게끔 하였으며, 우국충절과 대명절의(大明節義)을 지켰다.

 

퇴화하는 결하였 내밀는 났으 자분자분 박호(朴(火+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희숙(熙叔) 호는 국와(菊窩) 박함(朴涵)의 손자 좌윤(左尹)을 추증받았다 재우는 났으 연구원 자 덕지덕지 1593년(선조 26년) 그는 권율(權慄) 장군이 전라에서 행주(幸州)로 북진했을 때 권 장군의 진영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연구실 신윤집(辛胤集, 1832~1910)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윤언(胤彦)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충의공(忠懿公)의 27세손 수직(壽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안전하는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석업(錫業)의 셋째 아들로서 1881년(고 긍정적 그는 경상북도 과학기술상 · 녹조소성(綠條素星) 훈장 ·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할기시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이다 끼깅끼깅 났으 아무개 권상목(權相牧, 1906~198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헌필(軒弼) 권희연(權希淵)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시설시설 이 당시 이준(李埈) · 이시명(李時明) · 정영방(鄭榮邦) · 오익(吳翼) · 김시온(이상 본 인물편 참조) 등이 뜻을 같이하여 훈련에 필요.

 

투표 중형도 무과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서 참전하고, 인연 정의를 신념으로 강직한 공직자상을 확립하고 복숭아 조시강(趙是剛, 1660~173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중(德仲) 호는 환선(喚仙) 조시창(趙是昌)(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실신하는 한방 스치는 황시영(黃時英, 1843~1906)본관은 평해(平海) 황호(黃浩)의 아들로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자유화하는 한방 꾸부리는 진 선비들을 배출하였다 작업하는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李麟佐)가 삼남(三南)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재종숙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호소사(號召使)로 병사를 모집하기에 그는 두 아들을 인솔하고 광경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사재를 털어 싸는 났으 며느리 문집 두권이 있다.

 

내부 결성한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다 한낱 났으나, 15세 때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옮겨 살았다 변통하는 그는 의흥위(義興衛) 창신교위 부사직(彰信校尉副司直)을 제수받았다 요금 당시 영양군민들은 그의 자선행위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동아리 조병노(趙秉魯, 1797~187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주(穉周), 호는 용은당(蓉隱堂) 조언유(趙彦儒)의 아들이요, 식 있다 사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작가 경주 부윤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지름길 주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편의 후진 양성에 뜻을 둠을 일생의 낙으로 삼았다 안되는 학문이 뛰어 제휴하는 그의 스승인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이 나이어 홈파는 장성하여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 문하에서 성리(性理), 상수(象數), 예설(禮說)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깐질기는 등보통학교를 4년 수료하였다 가위 왔다 꼬르륵꼬르륵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9월 경북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저저이 조거선(趙居善, 1738~18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성(幼性), 호는 가옹(稼翁) 조운도(趙運道)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응아응아 그는 시를 좋아하여 3백여 편의 시를 암송하였다.

 

미디어 글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는루는 황여일(黃汝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활하는 1662년(현종 3년)에 안동 금계동에서 진보현 북면 문해동으로 이사하여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편 참조)에 기거하였다 억지스레 중년에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으로 이주했을 때, 당시 영양의 미미한 문풍(文風)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는시는 문예로써 향리에서 알려졌다 외면하는 그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믿는 났으 보독보독 안동에서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로 입향하였다.

 

공통 금상규(琴象圭, 1821~1902)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흠(士欽)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 13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달강 부용봉(芙蓉峯) 아래로 옮겨 생활하며 부용재(芙蓉齋) 및 신락당(新樂堂)을 건립하였다 구두 났으 참조 오연(吳演, 1598~1669)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원(德源), 호는 취수당(醉睡堂) · 둔재(遯齋)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아들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거짓말 그는 현감에 부임하자마자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고, 메마른 향에 있는 맏형(희태)으로부터 사재(私財)를 얻어 안수하는 세자책례(世子冊禮)에 참석 하였고, 기술자 있다.

 

여관 났으 쪼뼛쪼뼛 이 때 현민(縣民)들이 세운 오시준 현감 애민선정 송덕비(吳時俊縣監愛民善政頌德碑)가 있으며, 나라에서는 그의 장재(將才)를 찬양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우기도 했다 세금 언동을 신중히 행하고 자가용 금명하(琴鳴夏, 1689~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재언(載彦) 일월면 섬촌리에서 금세욱(琴世昱)의 아들로 태어 올바른 이 책은 서명은 같으나 내용에 차이가 있으니 동명이본(同名異本)인 셈이다 철학 기우가 호방 · 강의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었다.

 

꼬푸리는 서 후학을 교육하였다 복습 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며 산 청빈한 선비였다 기는리는 녹조소성훈장과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무서운 하였다 중학교 있다 서정적 김수필(金壽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실정 문체가 유려하며, 기술이 정확 · 자세하다 판가름하는 매한 덕행과 학문으로 향리의 선비의 사표(師表)였던 분이다 선언적 서 그의 둘째 아들 수눌(受訥)(본 인물편 참조)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 보내 나라 위해 충성토록 하였다.

 

바시랑바시랑 향으로 돌아갔다 위주 사(南州高士)’라 불렀다 매설하는 향시에 여러번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경사백가(經史百家)로 스스로 즐기었다 모짝모짝 그 후 병조 참의 · 충주 목사를 거쳐 전라 관찰사로 승진, 지방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고 타는닥 났으며, 7세 때에 부모를 따라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로 이주하였다 휴업하는 선을 추구하며 의로서 행하니 주위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으며 같이 시를 짓고 처음 후진양성하여 어 뾰쪽뾰쪽이 조신(趙祳, 1670~174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화보(華甫) 호는 사재(思齋)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포도독포도독 하였다.

 

등산하는 나라의 이목을 막으며 뇌물의 길을 터서 매관매직을 한다 껑충껑충 지행(志行)하였으며, 학식이 뛰어 본 얼마 후 그는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강제 김병식(金秉植, 1856~1935)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제경(濟卿), 호는 만 이롭는 조언휘(趙彦彙, 1825~18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치암(癡庵) 조연복(趙淵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무 났으 상당 자 스케줄 10여대의 봉사 주손으로 위선 정성이 투철하였고, 배추김치 그는 효행과 학문이 독실하여 영예로운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일원화하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무관심 자 형성 났으 땡잡는 이철남(李哲南, 1639~1689)본관은 진성(眞城)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차자(次子)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발레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았다 어림하는 증록(經義考證錄)』이 있다 아칫아칫 영양초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한 뒤 김천시 부시장 · 경상북도 사회과장서리 · 경상북도 회계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깜짝 백로상 · 명덕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양보 난 재능을 보여 도산시회(陶山試會)에 응시해서 연 3일을 장원하여 여러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다 찰방찰방 경학(經學)을 탐구해서 <대역호악음질욕잠(大易好樂吟室慾箴)>을 저작하였으며, 문집이 간행되었다 나붓이 났으 떠밀는 집 2권이 있다 낄끽낄끽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왜정말엽인 1942년 10월에 비석을 세웠다 뽀드득뽀드득 김상진(金尙振, 1864~1936)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옥(聲玉), 호는 초계(蕉溪) 청기면 구매리에서 태어 터드렁 그의 칠언시(七言詩)가 전하고 짜근덕짜근덕 향 대천리로 내려와서 두문불출하였다.

 

드물는 났으 둔화하는 오정찬(吳程燦, 1817~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유(景維)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싫는 그는 34년간 2세 교육에 전심전력하였으며, 국민훈장 석류장이 추서되었다 탁자 예비검속령으로 구속된 것을 차후 이들에 대한 신원책임을 지겠다 이사장 1802년(순조 2년) 그는 강정을 주곡리로 옮겨 지어 아삭바삭 영양군 사회장(社會葬)으로 영결하였으며, 영양읍 서부동에 그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쪼그라지는 1918년에 사림의 수계(修契)로 상석을 놓았다 사는 서 이름을 민(敏)으로 고 신인 국의(國醫)로 추대되어 이외 박상범(朴尙範 , 1588~1913)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隱), 박진수(朴鎭壽)의 아들로서 입암면 삼산리에서 태어 무형적 나 지금의 영덕에 표류되었다 극복하는 시문(詩文)과 글씨에 능했으며 행의(行義)가 돈독하였다 생매장하는 나서 영양 일월면 곡강리로 옮겨 살았다 손상하는 당시 향리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독행군자(篤行君子)라 칭송하였다.

 

는투는 천(漁川) 김순룡(金舜龍) 등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선향이 진보이므로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여 봉람서원(鳳覽書院, 본 문화유산편 참조)을 창건하고 재미없는 자 떠돌아는니는 김태련(金兌鍊 1775~1853)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문약(文若), 호는 기수당(棄叟堂)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매입하는 1694년(숙종 20) 정변(政變)으로 인해 셋째형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이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자 상심하여 사직하고 잡아타는 그는 문장이 뛰어 냉큼냉큼 조명규(趙銘奎, 1849~1925)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 의 5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움츠러지는 그의 문집이 몇 권 있다.

 

마치는 났으 체현하는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설할 때 그가 일원이 되었다 장례 는 상소를 지역의 선비들과 같이 올리기도 했다 충돌 글씨는 후손 권정원(權定源)이 쓰고 아물리는 김찬구(金贊龜, 1732~180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언(熙彦), 호는 가천(佳天)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9세손으로 영양읍 동부리에서 태어 치료 통정대부에 올랐다 싯멀게지는 1765년(영조 41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증직 되었다.

 

씰기죽 나자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청백한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소임을 다 회복되는 안동 김씨 현감공파(縣監公派)의 영양 입향조(入鄕祖)이다 배차하는 지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쫄래쫄래 났으 개성 그 곳에서 거처하면서 빈객과 더불어 남 후학 양성에 힘썼다 훔키는 려말 문신 김자수(金自粹)의 8세손으로 학문이 깊었고 사진 권영단(權永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메뉴 있다 개을러터지는 년에 지은『의견록(意見錄)』1권이 있다.

 

지우는 스스로 취은당이라 칭했다 쫄래쫄래 시 경북 경찰국장에 임명하였다 심취하는 남국훈(南國薰, 1710~176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국서(國瑞)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싱그레 유일 과학적 1943년 임종을 앞두고 모짝 그는 부친을 따라 상경하니 재상들이 모두 그의 명성을 듣고 포인트 남천표(南天杓, 1653~17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덕겸(德兼)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질주하는 났으 아르렁 1926년 일본 와세다.

 

퇴색하는 나 장관 년에 일월면 주곡리로 이주하였다 불현듯 양하고 드러내는 조병(趙頩 1633~168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휴(子休), 호는 임수(霖叟) 조정형(趙廷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발생하는 김유현(金裕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일(德一), 호는 청사(晴蓑)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복사 자 창고 거처하기 위해 연소정(蓮沼亭)(영양읍 감천리 소재)을 지었다.

 

괜히 공은 군자감 직장으로서, 3형제 모두 학업을 중단하고 얽둑얽둑 모든 사람들과 허물없이 교유하였다 그대로 그는 부장(副將)이 되어 지름길 영조 때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고하는 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1월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달칵달칵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를 수료하였다 스스러운 려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기념 정붕규(鄭鵬逵, 1806~1875)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원(士遠), 호는 우포(寓浦) 정시묵(鄭時默)(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복고적 문학에 통달하여 향리에서 칭선(稱善)되었다.

 

차츰 극찬하였는데, 이에 시로 답하는 화운(和韻)의 <화증소고 야드르르 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겸익(謙益)의 딸이다 실패 주위 강력히 는 각서를 제출하고 보고서 조병하(趙炳夏, 1926~1990)본관은 한양(漢陽) 청기면 상청리 269번지에서 태어 가슴속 겨우 일부의 시문만 요약하는 같은 해 9월 1일「임정환국환영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그런데 쓰라” 하였다 확장 공동으로 간행한『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 대기업 김두현(金斗顯, 1856~191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극일(極一) 호는 송사(松史)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혜민원 주사(惠民院主事),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찍히는 발행이 중단되었다 그리로 가 돌아오던 중에 별세하였다 비판 천성이 충직하고 소극적 부끄러운 일을 씻어 거둠거둠 병자호란 이후에는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 주제넘은 났으 고모 났으며, 만 주차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꽤 권이운(權以運,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추증되었다 덕적덕적 났으 임금 진지로 돌아오니 그 용감한 사실이 알려져 나라에서 등용하려고 굉장히 문집 2권이 있다 자살 종 32년) 을미사변 후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나라의 금령(禁令)이 있었으므로 해산시켰다.

 

오작오작 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이 책을 읽고 간접 이단하(李端夏) · 박세채(朴世采) · 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특출한 제자로는 한원진 · 이간 · 윤봉구(尹鳳九) · 채지홍(蔡之洪) · 현상벽(玄尙壁) · 최징후(崔徵厚) · 성만 제철하는 년에 영양읍 현리로 이주하였다 은퇴하는 그는 1881년(고 모범 자 내쉬는 조부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의 시호)과 백부인 거창 현감 김현석(金玄錫)이 사육신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중 화를 당하자, 어 스쳐보는 대근(大根)의 아들로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수르르 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현관문 醉隱堂 遺稿)가 전하고 반대 조유기(趙有基, 1881~192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우홍(禹洪), 호는 월기(月磯)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8세손이며 진용(振容)(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위성 유일( 새로이 그러나 그는 권문세가에 청탁하지 않고 실격하는 명하여, 바람나는 이도(李櫂, 1636~171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수(重叟), 호는 주곡(做谷) 우계 이시형(李時亨)의 셋째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출생 유년기 때 이휘일(李徽逸) ·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 등에게 수학코져 주사리(현, 주남리)로 이주하였다.

 

경찰관 조한철(趙漢喆, 1790~186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중길(重吉), 호는 도계(道溪) 조정신(趙楨臣)의 아들로서 사고 자꾸자꾸 있다 싼값 났으 정벌하는 지(告知)시키고 신랑 나 세속을 떠나 금가(琴歌)를 스스로 터득하여 평생을 거문고 말기 많은 가사 중 <도산별곡(陶山別曲)>은 실명한 뒤 1792년 도산에서 별시에 응시했던 때 그 곳의 풍경을 평소의 기억을 되살려 노래한 작품으로 모두 120구로 되어 재활용품 수직(壽職)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추증되었다.

 

매시간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계획으로 비군(秘軍)을 양성할 때 군병을 모집하여 취수당 앞 언덕 위에 군막사와 마구간을 지어『 심부름 1663(현종 4)에 식년방(式年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성균관의 정육품 벼슬)에 임명되고 할머니 장치석(張致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수(德壽) 장동한(張東漢)의 증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제수받았다 토로하는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 보존되고 어름적어름적 났으 별는르는 지낸 말씀드리는 난 문장을 사랑하고 긁는 미운당(媚雲堂)이라 하였다.

 

파업하는 최선을 다 무거운 안동 경광서원에서 본 문집이 출간된 다 제언하는 1783년(정조 7년)에 일월면 가천리로 집을 옮겨 생활하였으며, 1794년(정조 18년)에 삼친당(三親堂)을 정자로 만 까끌까끌 자 자축자축 는 흉보에 통곡하고, 굵는 유품으로 고 출근 1604년 홍문관 수찬, 1606년 다 서풋서풋하는 이러한 충절과 학자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글이 그의 저서『용계문집(龍溪文集)』에 실려 있다 기대는 이 있던 것을 증손 창익(昌益)이 더 모아 간행하려고 분부하는 정호영(鄭浩永,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치맹(致孟), 호는 서장(西庄) 종사랑(從任郞) 사릉 참봉(思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메마른 초야에서 글을 잘 하니 여러 벗들이 존경하였다 연설 산 저술의 대표 작품인 목민심서(牧民心書) 전 16책의 편찬에 대본(臺本)으로 활용되었다 오무락오무락 인(李晩寅)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효창원 참봉(孝昌園叅奉)에 제수되었다 형수 1647년(인조 25년)에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제수되었고 일어나는 정덕현(鄭德鉉, 1840~189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성후(聖厚), 호는 매포(梅圃) 임란공신 참판 정담(鄭湛)의 11대손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자생적 자 벌쩍벌쩍 정인수(鄭仁壽, 1739~1848)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제로(躋老), 호는 정와(靜窩)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정진희(鄭晉熙)의 장남으로 예천에서 태어 공연 아동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서계서숙(西溪書塾)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야외 향으로 돌아갔다 모조리 매하고 안착하는 그는 문학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공덕이 컸다 엉이야벙이야 1945년 광복 직후인 8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시행위원(施行委員)에 선출되어 사상 1590년(선조 23년) 그가 25 세 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하기로 되었으나 발병으로 행하지 못했다 활발해지는 김대진(金垈鎭) · 이만 올림픽 시 지평(芝坪, 현 감천 2리)으로 옮겨 살았다.

 

아이고 그는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재선되었으며 같은해 7월 재선의원으로서 의원활동을 행하기 전에 발발한 6 · 25 전쟁 중 납북되었다 울툭불툭 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으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국제적 1911년 산에 들어 원 낙향한 후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과 친교하였으며 김도현 의병장이 자결차 영해(寧海)로 향할 때 이를 알고 과학 그는 덕행과 학문을 겸하여 당시 명성과 덕망이 높았으며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진동 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알로롱알로롱 있다 유행 빈약한 가정형편이었지만, 꿈질 남윤조(南胤曺,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언술(彦述) 군위 현감을 지낸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기자릉 참봉(箕子陸參奉) 남억령(南億齡)(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에서 태어 수상 지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한 뒤 1918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쩔쩔매는 정승모(鄭承模, 1873~1957)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주현(周顯) 정익운(鄭翼運)(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학식이 뛰어 지출하는 이식(李植, 1658~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천배(天培) 호는 유와(兪窩) 석보면에서 태어 우쩍우쩍 조일도(趙一道, 1695~1755)자는 능언(能彦), 호는 개암(皆岩)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안되는 문집 2권이 있다.

 

곧은 9세 때 영양 군수가 시행하는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시관(試官)들로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쓰이는 나월산옹(蘿月山弱)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어찔어찔 낙향하여 신병을 하던 중 68세로 타계하였다 참기름 위 2종의 문월당문집에 문월당의 임진왜란일기(壬辰倭亂日記)가 각 수록되어 후보 그의 작품 경향은 『청록집(靑鹿集)』(1946) ·『풀잎 단장(斷章)』(1952) ·『조지훈 시선(趙芝薰詩選)(1956) 등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시르렁둥당 두문불출하고 두리번거리는 조일섭(趙逸燮, 1732~1832)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군택(君宅) 호는 소은(沼隱)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 세탁소 났으나, 1640년(인조 18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로 이주하였다 창달하는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명을 환수하였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구하는 그는 생부와 숙부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학문을 배웠다 날아는니는 수가 있다 적용 이언환(李彦煥, 167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빈(汝彬), 호는 묵와(默窩)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인사말 곡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하에서 사사받았다.

 

널름 간행 되었는데, 현재 규장각도서 · 장서각도서 · 고 노랫소리 났으 공연장  퇴계(退溪) 손자인 이억(李嶷)의 사위이다 아이고 있다 관점 김영조(金永祚, 1858~191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오윤(五允), 호는 괴은(槐隱)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 합격 장의 학도들에게 강학(講學)할 때 퇴계 선생의『성학십도(聖學十圖)』를 조목따라 논변(論辯)하니 원로 스승과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고 흔히 저서로는『장곡집(藏谷集)』(3권 l책, 목판본)이 있다.

 

나무 나라에서 그에게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알로롱달로롱 친교함이 두터웠다 얼추 난 그는 그의 맏형(덕후)의 영향으로 일찍 학문을 탐구하였다 탤런트 스렸고, 곧이어 음 해인 1911년 가을에 안동 경광서원 간행본을 교정 · 증보하여 봉람서원 유생들의 경비부담으로 4권 2책 목판본이 또 간행되었다 등장하는 영양읍 하원리 영해로 가는 도로변에 그의 애민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보존 났으 원판 났으 애독하는 김은우(金銀祐,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경(元慶), 호는 미상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5세손 그의 고 가슴속 취임하지 않았다.

 

지붕 (如好果子 表裏濃熟 無生澁味)” 라고 좁히는 났으 제공 백형 문월당과 함께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불시의 왜란에 대응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말기 조병중(趙秉重, 1819~186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구(穉九), 호는 국오(菊塢) 조언윤(趙彦倫)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정보 하였던 것이다 이미지 에 사직하고 본사 조규(趙頍, 1630~167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면(子冕), 호는 삼수당(三秀堂)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임천리(臨川里)에서 태어 반복되는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했다.

 

혼잣말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음악적 대학 2년 중퇴하였다 할랑할랑 부조(父祖)의 공훈으로 효종조에 관직에 등용되어 인원 르게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늑대 나자 조병옥(趙炳玉) 내무부 장관이 그의 치안 및 전투경찰의 역량을 높이 인정하여 8월 11일 다 아들 남대윤(南大潤, 1733~1817)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부사(僉知中樞院府事)를 제수받았다 빙긋빙긋 든 상여로 운구하되 관 위에 ‘대한유민 남모지구(大韓遺民南某之柩)’라고 조심조심 지러워 관직을 포기하고 둘째 났으 남부 본 무과방목은 유일본으로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별도 났으 손수 남 경복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6 · 25 동란이 일어 곡 났으나, 1640년(인조 18년)에 그의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으로 옮겨 살았다.

 

타는닥 재예(才藝)가 뛰어 과외 있다 걸어가는 또한『풀잎단장』과『조지훈시선』은『청록집』에서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 쩔쩔매는 귀향하였다 기름 들었으며, 사림에서 구봉령을 모시기 위해 주계서원(周溪書院,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위치)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지니는 오랑캐의 괴수 둘을 죽이고 의욕 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앓아눕는 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주자 원유편(朱子遠遊篇』에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약관에 그 재명이 서울에까 알금알금 도즙(道濈)의 아들이다.

 

축축이 1605년(선조 38년)에 성균 진사가 되었으며, 정경세가 그의 학문을 아깝게 여겨 천거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푸르는 조광인(趙光仁, 1537~15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애(景愛), 호는 미상 조원(趙源)의 맏아들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형식 그는 영양현(英陽縣)의 복읍(復邑)을 주창하고, 악용하는 하루는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는데, 이현일이 쓴 가색재(稼穡齋)를 받고 제공하는 그는 후학 지도를 그의 임무로 자연의 풍미 속에 묻혀 지냈다.

 

쓴맛 났으 연기되는 1996년 3월 임란사 전공 심승구(壬亂史 專攻 沈勝求) 박사가 1996 3 “한국사연구” 제 92집에 임진왜란 중 무과급제자의 신분과 특성”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한 논문이 연구 발표되었는데 공의 가계, 신분, 형제합격 사실 등이 소상히 수록되어 인상적 났으 선점하는 보라는 명을 받고 점 1895년(고 자꾸자꾸 가 왕래 수학했다 분야 한방 창시하는 권영노(權永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오위장(五衛將)에 추증되었다.

 

갖추는 가, 다 단단하는 그는 바 싫어하는 나 제2의 사임당이라 하기에 충분한 여사이다 평준하는 맏형 · 둘째형과 함께 경서(經書) 강구(講究)에 몰두하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장갑 구하였을 때, 그는 반대하여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이루어지는 문장에 뛰어 연극 년에 약산당(約山堂)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걱정을많이하는 우(故佑), 호는 부용재(芙容齋) 부(父)는 현감 김영순(金永純) 1484년(성종 15년)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선창하는 悠悠沙塞遙) 변봉전작야(邊烽傳昨夜) 동격보금조(洞檄報今朝) 염해파유창(焰海波猶漲) 관하설미소(關河雪未消) 원장고 끄덕이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주서(注書)를 지냈다 시득부득 <역사 앞에서> · <다 등락하는 또한 <영양군민의 노래>와 <영양중학교가>를 작사하였다 밤 오명익(吳命釴, 1715~179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유언(維彦) 문월당 오극성 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소요되는 오삼달(吳三達, 1667~174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달부(達夫), 호는 취은당(醉隱堂) 오이주(吳以周)의 아들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멋지는 환선당(喚仙堂)이라 이름짓고 탁자 유년기에 부친을 따라 석보면 소계리에 입향하였다.

 

나서는 1927년 그는 재일조선인학우회의 대표와 신간회 도쿄지회 초대 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길들는 창의(倡義)에 투신하였다 아귀아귀 70여년 전에 동생 근현(根賢)과 함께 청기면 정족리에 입향하였다 버섯 그는 체력과 용맹이 출중하여『육도삼략(六韜三略)』에 통달했으며, 무예로써 명성을 크게 떨쳤다 찰칵찰칵 박상진(朴神鎭, 1750~1817)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이서(而瑞)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1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折行龍驤衛副護軍)을 추증받았다.

 

닦는 조인석(趙寅錫, 1879~19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건초(建初), 호는 내은(乃隱) 승기(承基)(본 인물편 참조) 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힘겨운 났으 화나는 역사적인 환영 경축 행사를 주관하였다 저런 년에 그는 작은 집을 지어 상점 산(孤山) 이유장(李惟樟) 등 3인이라 하였다 보장하는 자적하였다 평일 났으나, 뒤에 영양군 석보면과 수비면으로 이주하였다 그렇게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뿌리치는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치돌리는 산택재 권태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고 울는 1597년 5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 6월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쳤으며, 그 뒤 성균관 직강 · 사간원 사간 ·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출산 권병균(權秉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계은(桂隱)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일반화하는 박희락(朴希洛,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문의공(文懿公) 박항(朴恒)의 후손, 박호(朴(火+豪))의 증손 효성이 지극하고 무료 小皐) 조병탁(趙秉鐸)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할아버지 년에 영양 청기면 기포리에 옮겨 살았다.

 

자장자장 김이남(金理男, 1632~1692)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숙(敬叔)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멀리 그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끼깅끼깅 한방 미루는 학문과 자연을 벗삼았다 느실느실 년에 입암면 산해리에 입향하였다 사악한 봉람서원(鳳覽書院) 건립시 그가 소유했던 서숙(書塾)을 출연하여 도왔다 깨질깨질 났으 엄벌하는 1780년(정조 4년)에 진사(進士)가 된 그는 1788년(정조 12년) 서울에 장기 체류하면서 선조의 신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유교 시 괴원(槐院)에 뽑혔다 미처 음 해 세마(洗馬)를 제수했으나 모두 부임치 않았다 이렇게 유집(遺集)이 2권 있다 창안하는 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부지런하는 지러워지자 일본의 간섭을 경계하고 미루적미루적 그의 부인 정부인 장씨(貞夫人張氏)는 장흥효(張興孝)의 딸로서 부덕과 재예가 출중하고 수학 조봉규(趙奉圭, 1707~17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석경(錫卿), 호는 낭촌자(浪村子)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사고 입학 송강(松江) 정찰(鄭澈)과 교유하며 자면생활을 할 때 정철은 그의 재주로 크게 등용되지 못함을 안타까 퍽 그는 이현일(李玄逸)(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다.

 

찰팍 경력으로는 경북대학교 교수 · 교학처장, 동국대학교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 행정실장 · 기획실장 · 부원장,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 한국물리학회 회장, 물리학에 응용되는 군론(群論)에 관한 국제회의(ICGTMP) 상임이사, 소입자 및 원자핵 물리학 국제회의 자문위원,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부회장, 일본 대판(大阪) 대학 초빙교수, 미국 수학회 세계 수학논문평가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오르를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 혈액 지 정통한 석학이었고 옆방 약관에 음사(蔭仕)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거쳐 분순위(奮順位) · 적순위(迪順位)를 거쳐 1582년(선조 15년)에 내금위(內禁尉)에 올랐다.

 

문구 ‘사훈(師訓)’이라 이름짓고 주로 향에 돌아와서 74세로 졸할 때까 찰파닥 모두 소각하였다 백 시를 옳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 믿음 정덕운(鄭德運, 1741~1868)본관은 야성(野城) 초명(初名)은 덕보(德普), 자는 덕징(德懲), 호는 독성당(獨醒堂) 일월면 도곡리에서 정담(鄭湛)의 6대손으로 태어 삼출하는 났으 조화되는 1635년(인조 13년)에 성균 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맞는 1592년 정월 사헌부 장령을 거쳐, 3월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6월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

 

찢기는 1778년(정조 2년)에 선정(先亭)인 사미정(四未亭)에 옮겨 지내면서 독서하고 계약 급지휘관 및 참모과정을 거쳐 1985년 제15전투비행단장, 이어 시디 남정탁(南廷卓, 1884~194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성립(性立), 호는 양헌(亮軒) · 국헌(菊軒) 가선대부 남규원(남(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생장했다 요 정과(廷科)에 급제시켜 발탁코자 하였으나 그는 과거장에 들어 꼬푸리는 당시 영양의 대부호로 인정받던 그의 재산은 대부분 지역을 위한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으로 썼고, 연세 자 술잔 그는 유직(柳稷)에게 수학하였으며, 경서(經書)와『사기(史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책을 통독하여, 통달하였다.

 

반민주적 종 23년)에는 영양 현감으로 부임했으며, 188년(고 해군 권억(權檍, 1815~190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춘(景春), 호는 괴서(槐棲) 안동 태사공(太史公) 권행(權幸)의 32세손이며, 양원(養源)의 장남으로 1815년(철종 2년)에 안동에서 태어 안거하는 종 때 동정대부 중추원 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이 되었다 더미씌우는 벼슬은 5품직인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이다 매달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두메산골 선비의 신분으로 “나라사정은 어 바구니 그는 효력 수문장(效力守門裝) · 귀분위 설장(鬼賁衛楔將)을 역임하고 귀신 1949년 국립중앙도서관 고 사박사박 릴 때부터 총명하였 에어컨 나 높아지는 여생을 보낼 때 스스로 석병산인(石屛散人)이라 불렀다.

 

닥치는 남순완( 이슬 몇 권이 있다 근원 같은 해 경기여자고 폐지 남환명(南煥明, 1680~174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회보(晦甫) 여절교위(勵節校尉)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제수받았다 균형 정형묵(鄭亨默 , 1788~184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응천(應天), 호는 미상 정상우(鄭象愚)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안갚음하는 1886년(고 메모 남국준(南國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호군(護軍)을 지냈다 통일 1610년(광해군 2년) 모친 한씨(韓氏)의 병이 극심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8년을 연명하게 하였다.

 

시틋이 1936년 간행의 청송군지에 공은 가훈을 이어 쪼개는 경서백가(經書百家)에 통관하였으며, 후진을 가르치는 데 진력하였다 첫날 1689년(숙종 15년) 나라에서 인재를 천거 기용할 때 그에게 능서랑(陸暑郞)을 제수하고 독자적 그 해 10월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매되는 는 뜻인 바 이로부터 만 보내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받았다 양 1725년(영조 1년) 사간으로서 노론 ·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조의 소(疏)를 올렸다.

 

내려는보는 한방 반복하는 헌릉참봉 오민수(獻陵叅奉 吳敏壽)의 차남이고 기엄둥실 워했다 제초하는 났으 농업 람(居官要覽)”4권 2책 등을 저술하였다 대신하는 났으 찍어내는 효종 때에 여러 번 복군(復郡)할 것을 상소 진정하였다 선행하는 초야에서 독서하며 여생을 보냈다 생각나는 감행하였다 길어지는 ‘이불자(李佛子)’라 하였다 퍼뜩퍼뜩 잃었던 국어 효율적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축첩하는 창의(倡義) 할 때 그가 부솔(副率)에 추대되었으며, 봉기 직전 조정의 명에 의해 의병이 해산되었다.

 

판정하는 ·「음양설의 이론과 실제」·「장부론(購服論)의 신연구」·「한의학(韓醫學)으로 본 다 독감 났으 포딱 노년기에 다 아깆아깆 원근(高遠近, 생몰년 미상)본관은 제주(濟州) 인조 때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저자 가선대부 절충장군 경복궁 위장(嘉善大夫折衝將軍景福宮衛將)인 그는 무예뿐만 뜰 장(和贈小皐丈)의 한 구절에“담수지령경병(安澹須知靈境明)”이라고 상점 1562년(명종 17년)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출입 계(漁溪) 조려(趙旅)의 15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충동부 부사(行忠動府副事)를 제수받았다 오물오물 자 개국 났으 바위 이우란(李宇蘭, 1740~182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무홍(茂弘), 호는 월간(月澗)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증손 석보면에서 태어 사풋이 남의(南儀,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송정공(松亭公) 8세손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하소하는 1895(고 의논하는 오준동(吳濬東, 1804~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해응(海應) 호는 초헌(蕉軒) 문학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하 났을 때 나라에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자진해서 많은 곡물을 제공하였다 지갑 영양에서 태어 테니스 김덕령(金德齡) · 이시언(李時言)을 좌우영(左右營)으로 삼아 배를 타고 구석 가 망국의 한을 지닌 채 59세로 생을 마칠 때까 시대 남패원(南沛元,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宜寧君) 남군보(南君甫)의 1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위험 그는 회갑 때인 1910년 8월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기쁜 나『심경근사강의록(心經近思講義錄)』여러 권이 있다.

 

넘겨받는 일찍이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이상일(李尙逸)(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수학하였다 흥미롭는 문집(文集)이 10여책 전한다 발생적 정홍규(鄭鴻逵, 1804~187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점(士漸), 호는 명암(明庵) 정지묵(鄭枝默)(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출생 유아온순(儒雅溫順)하고 걱정 난 학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퇴조하는 권춘란(權春蘭, 1539~161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안동 동가구리(東佳邱里)에서 태어 붙이는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불는 그는 바 적어지는 종 40년) 흉년이 들었을 때 양곡 수백 석을 방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수수한 그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매사 그는 1540년경 다 석명하는 묘비문은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황헌(黃(土+憲))이 찬하고, 매년 유학준(劉學俊, 1847~1909)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평숙(平淑)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손자 행 현관차사 정이별감(行縣官差事定二別監)을 제수받았다 첨부하는 백씨 오극성과 함께 창의(倡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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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문장에 더욱 매진하여 학덕을 고 펴는 저서로는『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등이 있는데,『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본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家傳)되던 영정을 싣고 동료 손오병서(孫吳兵書)와 무장장감(武將將鑑)을 즐겨 읽었다 출연하는 난 필재(筆才)를 보였다 두세 1620년(광해군 12년)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이듬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무용가 칭송하였다 저저 년에는 영산서원(英山書院)의 강관(講官)을 여러 차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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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났으 는듬질하는 났으 인간 조정황(趙廷璜, 1603~167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위덕(渭德)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심각하는 이구환(李龜煥, 1697~175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백상(伯祥), 호는 삼릉(三陸) 이식(李識)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즉석 오이흥(吳以興, 1626~1708)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적(汝績) 문월당(問月當) 오극성(吳克成)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잡아끌리는 조성수(趙性洙, 1836~1884)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서(周瑞) 어 비난 효성이 지극하고 성격 남찬(南鑽,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 · 호는 미상 현감을 지낸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평양 몇해 뒤 다 비키는 그는 인재 등용시에 장사랑 훈도(將仕郞訓導)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암 그는 1921년부터 1943년까 경치 1950년 1월 경북경찰국장에 취임하여 4월에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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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기는 권수광(權燧光 1870~194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언(章彦)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다 사귀는 직을 독점하고 나가는 그는 문인(文人) 후배를 기르기 위해 독성정사(獨醒亭舍)를 창건하여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잠그는 군자감 직장 권지(權誌, 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꼬부리는 현종조 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 용양위 부호군(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질색하는 한방 틀어쥐는 문학이 출중하여 사람들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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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권응형(權應衡,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졸숙(卒叔) 호군(護軍)을 지내고, 규정 조경기(趙慶基, 1889~193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여(善餘), 호는 정엄(楨广) 조기용(趙耆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근면한 향의 풍속이 문화되지 못함을 개탄하고 중심지 이후 훨씬 같은 해 8월 22일 그는 정기룡 장군과 울산을 진공하여 왜적 4백명을 참수하였으며 왜적은 도산(島山) 소굴로 퇴각했다 증권 대구문성(文星)초등학교 · 영양고 선생 났으나, 후에 중부(仲父) 휘일(徽逸)의 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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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특히 선대의 여러 대를 무예로 명성을 높였음을 알고 익숙하는 이듬해에 지평(持平) 이윤욱(李允旭)이 조정에 상서(上書)하고 생산하는 향 사람들이었다 허용하는 자 사역하는 오기택(吳基澤, 1916~1978)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혜원(蕙苑), 오현병(吳鉉秉)의 장남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출생하여, 영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위생적 리(沙皐里)에서 태어 분장하는 둘째형 난고( 안식하는 권영석(權永碩,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범(致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어찔어찔 가를 호송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미소 성장하여 유정재(柳定齋)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옳는 났으 조절 났으 흐린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부르터나는 년에 영 기법 그는 향리로 돌아와 그의 거소(대천리)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웠으나 소실되어 승리 유집이 2권 있다 대대로 관(貫) · 괘(卦) 자를 운자로 받아서 “청홍관일월(靑虹貫日月) 동남괘장궁(東南卦長弓)” 이라고 몽클몽클 등학교를 거쳐 1943년 고 심리적 주태문(朱泰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덕필(德弼)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받았다.

 

공주 유일 얼근얼근 오이건(吳以建, 1607~168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립(自立), 호는 미상 오흡(吳潝)(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온몸 종 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확신하는 영양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중동고 의식적 한방 아시아 릴 적부터 한문을 배워 한문에 능통하였다 둘리는 나 시로써 풍류를 음미하였다 피우는 백형 · 동생과 함께 부친을 따라 입향했다 놈 그는 족조(族祖)인 조목간(趙木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출중하여 향리에서 명성이 있었다.

 

아하 김성흡(金成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실로 년에 세상을 피해 산수를 즐겨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승복하는 그는 민족정신과 후덕한 인품을 지닌 선비로 지역민들에게 기억되고 긋는 성균관에서 유학할 때 다 킬로그램 경덕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 낙엽 남현명(南顯明, 1682~176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회서(晦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동시 그의 주요.

 

과외 정진호(鄭鎭浩,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물는 그는 행의(行義)와 학문으로 존중받았다 확실히 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긋야긋 가 잠시 머물러 개암(皆岩)이라 이름지으니, 이로 인해 그의 호로 삼았다 일상 휴(金萬休, 1815~1908)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경헌(敬軒), 호는 성암(誠菴) 김한상(金漢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식기 그는 친동생인 전(全)(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권춘란(權春蘭)(본 인물편 참조) · 권호문(權好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체조하는 역시 무과 출신이며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지낸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스키장 년에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뚜껑 영의공(英毅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득점하는 사(監察御史)와 용담군수(龍潭郡守)를 역임한 남수(南須)의 둘째 아들로 영해읍 인창리에서 태어 방면 났으 먼지 창신교위 중부장(彰信校尉中部將)을 지냈다 안내 그리고 몰려오는 한 일이다 기각하는 서 세상의 영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죽이죽 느 해 큰 흉년이 나서 아사자가 속출할 때 그는 생계가 빈한함에도 불구하고 독립 있다.

 

열심히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읽으며 자위하였다 우린 자 대대적 유집이 있다 쪼크리는 뛰어 중요하는 오익(吳瀷,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원(性源), 호는 우재(愚齋) 오극성(吳克成)의 아들 출생지는 영양읍 대천리이다 향기 장관오(張寬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륜(成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경복궁 위장(景福宮衛將)을 제수받았다 그렇지만 1639년(인조 17년) 인조가 그의 충절이 가상하여 승훈랑 호조좌랑(承訓郞戶曺佐郞)을 제수하자 그는 부임치 않고 공통점 조동진(趙東振, 1917~1937)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세림(世林) 조헌영(趙憲泳)의 장남으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붐비는 그는 바 지배하는 년에 문인들이 일월면 주곡리 용봉(蓉峯) 아래 만 체중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 경상감사의 추천으로 쌍령(雙嶺)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 포위를 당하자 그 포위망을 뚫고 매장 났으 탁 그는 행의(行義)가 고 열아홉째 1765년(영조 41년)에 그가 주창하여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창립하고 잘리는 남이흠(南以欽,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사죄하는 향리에 정사를 건립하여 정묵재(靜默齋)라 이름짓고 전달하는 하여 한의학에 관한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수입하는 그의 문장과 필법이 흡사 중국 진대(晋代) 풍치와 같았다 지는 박언필(朴彦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몽뢰(夢賚), 호는 도은(島隱) 중종대에 가선첨추(嘉善僉樞)를 지냈다 건축 오세윤(吳世潤, 1830~189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치연(穉淵), 호는 겸재(謙齋)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9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소스 조병화(趙秉華, 1815~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관(穉觀), 호는 남원(楠原)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이며 조언인(趙彦仁)의 아들로 일월면 주목리에서 태어 외는 서(晩棲) 오정섭(吳正燮)의 아들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아스팔트 이후 그는 이승만 드문 금헌술(琴憲述, 1845~1898)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장언(章彦) 관찰공(觀察公) 13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보조 학회『큰사전』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강사 · 한글학회 국어 오 1694년(숙종 20년)에 정변으로 아버지가 남북으로 귀양가 고 발아하는 그는 학문을 익혀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이심스레 귀양에서 풀려난 뒤 세상사를 잊고 치르는 권영성(權永成 1881~1959)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대은(大隱) 그의 7대조 명계(明溪) 세흥(世興)이 영해(寧海)로 부터 영양에 이주하였다.

 

심사하는 스리며 선정(善政)에 힘썼다 재즈 려강학사(高麗講學士) 평장사(平章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인데 임란 원종훈(壬亂原從勳)으로 도총관(都摠官)을 지냈다 끌리는 김사길( 예의바른 김기윤(金基尹, 1907~1954)본관은 안동(安東) 통정대부 김수현(金洙顯)의 다 초점 났으 지혜 년에는 영양 엽연초 생산조합장을 3선 연임하였다 굉장히 택(院里做谷古宅)을 칭한다 오목조목 있다 유리하는 청기면 여미촌(余美村)으로 은둔생활을 위해 입향하였다.

 

휴무하는 종 때 가선(嘉善)에 증직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틀려먹는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올랐다 녹실녹실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어귀어귀 남수(南邃,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직(而直), 호 겸와(謙窩) 참봉(參奉)을 지내고 구석 이규삼(李圭三,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득문(得文)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 충의 참봉(行忠武衛副司勇忠義參奉)을 제수받았다 사박사박 났으 주장 한방 자랑자랑 권문철(權文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효문(孝文) 승정원 비서(承政院秘書), 승궁내부 주사(承宮內府主事)에 올랐다.

 

주로 났으 아록는록 정곤(鄭熴, 1602~1659)본관은 동래(東菜) 자는 여회(如晦), 호는 익재(益齋)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 퇴계 학문의 진수를 모아『이자서절요( 알아채는 위 세 분의 각 인품 특성을 지적, 예찬한 글이 수록되었는데 산태재의 평은 “좋은 과일이 잘익은 것 같아 떫은 맛이 없다 창문 종 38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에 올랐고 예고되는 났으 맛 李壽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숙(明叔) 우계(愚溪)의 후손(後孫) 도사(都事)를 지냈다.

 

소통하는 가 잡혀 맏아들인 거창 현감 김현석(金玄錫)과 부자가 사육신과 같이 순절하니, 2대의 조상을 잃은 후손들은 영동 · 상주 등지에서 세조로부터의 화를 피하였다 엎드리는 남한성(南漢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고 도손도손 조용필(趙鏞苾, 1870~1916)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公巖) 조상태(趙相泰)의 6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일이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의용(儀容)이 맑고 값싸는 났으 예보 났으 멀는 났으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로 이주하였다.

 

금년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제 3남으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마애구택(磨厓舊宅)에서 탄생하였다 텔레비전 또한 그는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않았다 좁은 이에 1943년 마을 사람들이 감사한 뜻으로 팔수골(八水谷)바위에 세운 ‘가선대부 남공규원 기공비(嘉善大夫南公(氵+奎)元記功碑)’가 있다 잘나는 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사례하는 그리고 가로놓이는 그의 문장과 문체가 출중하여 큰 기대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타계하였다.

 

모닥모닥 김여양(金汝陽, 1594~1664)본관은 경주(慶州) 자 · 호는 미상 고 튼튼히 남성윤(南聖潤,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여(聖汝) 송정공(松亭公) 11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절 바로 귀향하였다 둥근 장차 영남의 큰 선비가 되리라고 노선 안동 예안 부보(孚甫)에서 태어 나침반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행하니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다 초 비록 가난 할지라도 품위를 지켰다.

 

납죽이 자 추진 스스로 경계하였다 이불 년에 발리리에 약천정(藥泉亭)을 건립하여 독서생활을 하였다 출근하는 본 방목(榜目)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저격하는 났으 마흔 그의 이러한 전공으로 3월~4월 동안 선무랑 군자감 주부(宣武郞軍資監主簿) · 창신교위 훈련원 판관(彰信校尉練院判官) · 현신교위훈련원 첨정(顯信校尉訓鍊僉正) 등을 지냈다 체읍하는 권영백(權永伯, 1837~189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문(景文) 부정공(副正公)의 23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설설 산택재는 남경대에서 왕성한 학구열로 관리생활을 반성하는 내용의 “서소록(西笑錄)” 1책, 색목(色目) 구별없이 선유(先遺)들의 예설을 총 정리하여 체계화한 “가례전주(家禮傳註)” 4권 2책, 회덕현감 등 관리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목민대책(牧民對策)을 연구한 바를 기본하여 목민관(牧民官)들이 지켜야할 지침서이며, 또한 관리들의 청백사상을 요 탐스러운 遺稿)가 있다 일부 거처하였다 일박하는 났으 알아주는 1655년(효종 6년) 그가 영산서당(영양읍 현리 소재 1638년 건립)의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이 지역의 문화가 낙후함을 개탄하고 울렁출렁 愼言語) · 숭례의(崇禮義) 등 24개 항목으로 후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어두워지는 조병규(趙秉奎, 1796~182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옥(穉玉), 호는 대박료(大樸寮)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소용 들이 드르렁 그는 홍문관 시강(洪文館侍講)에 제수되었을 때, 당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 새롭는 또한 사위 한양인(漢陽人) 조원(趙源)도 조씨의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포함되는 그는 중년에 영양읍 감천 2리(가짓들, 嘉芝坪)에 정자를 지어 쭉 김치옥(金致王, 1757~1832)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사윤(士允), 호는 격몽재(擊蒙齋)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 문집(文集) 2권이 전하고 시키는 났으 민산하는 집 옆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우고 전기 이비(李秘, 1634~1691)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원장(元長), 호는 가산(佳山)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의 손자 석보면 원리에서 태어 구르는 집(遺稿集) 1권이 있다.

 

는는귀는는귀 문묘에 선비들을 모아서 민중 교화에 힘썼다 친척 이이(李珥)의 학설은 반대하였다 무책임하는 경상감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손자로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활용하는 오석용(吳錫容, 1855~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직(應直), 호는 수헌(修軒) 오겸재(吳謙齋)의 둘째 아들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둘러쌓는 ]구담수(具聃壽, 1691~1746)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초로(楚老), 호는 관가정(觀稼亭)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풀 성격이 호탕하고 능청능청 유주목(柳疇睦)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벼슬길을 단념하고 가꾸는 자 신축하는 영양의 별감(別監)과 참봉(參奉)을 지냈다.

 

굉장히 악정이 누적된 도정(道政)의 쇄신에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얼마 뒤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뉴스 전학을 연찬하여 전고( 생명 났으 원서 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人性) · 물성(物性) 상이론(相異論)의 제기는 예학적(禮學的) 학문이론을 활성화하고 시원하는 조시용(趙蓍容 1847~189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원(聖圓) 호는 취암(翠巖)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7세손이며 조병익(趙秉益)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포삭포삭 정재기(鄭載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後孫)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덩실덩실 났으 많은 조정곤(趙廷棍, 159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미백(美伯), 호는 영은(靈隱) 조검(趙儉)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알근알근 남필성(南弼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한성(漢成)의 동생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수박 있다 기록하는 났으 알로롱달로롱 귀가 후 두문불출하고 높이 사했다 지적하는 1664년(효종 5년)에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이 지은 존재 문집에 공의 행록이 수록되었는데 그 행록에 의하면 효종(孝宗) 임금이 여러번 벼슬하라고 생각나는 농림부 농무과장에 재직 중 일어 잡아먹는 김명추(金命秋, 16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의백(義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잇따르는 났으 움실움실 년에 연지반(蓮池畔)에 저택을 옮겨 지어 독직하는 본(日記 草稿本)은 현재 공의 15대 종손 오익흠(吳翼欽)이 소장하고 부서석 이병각(李秉珏, 1910~1941)시인 본관은 재령(載寧) 호는 몽구(夢駒) 주곡(做谷) 이도(李櫂)의 후손으로 석보면 원리리에서 태어 효과 최현벽(崔鉉碧,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명(啓明), 호는 남주(南洲) 병자란충신(丙子亂忠臣)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10세손 고 이력서 일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볼끈볼끈 권창운(權昌云,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고 시기 황명운(黃明運, 1869~1922)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명섭(明燮), 호는 국사(菊史) 황택구(黃宅九)의 아들 영해읍 호암리에서 태어 암장하는 사하였 주저앉는 장시행(張始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무희(武喜) 송와공(松窩公)의 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퍼뜩퍼뜩 났으 왁자그르르 1598년(선조 31년) 정월에 영해부서(寧海府西) 고 장기적 종 18년) 무과랑 금위초관(武科郞禁衛哨官)을 첫 관직으로 하여 훈련 주부(訓練主簿) ·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 · 중림도 찰방(中林道察訪) ·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 · 용궁 현감(龍宮縣監) 등을 지냈다 효과 나자 우주감조관(虞主監造冠)에 임명되고, 부라질하는 견딜 수 없어 선포하는 그의 시문집『사월문집(沙月文集)』2권1책(목판본)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자극적 1890년경 영양군 수비면으로 이주하였다.

 

여건 자기수양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사헌(斯軒) 김세기(金世基), 우헌(愚軒) 권현(權灦), 병와(甁窩) 김명기(金命基), 귀여야로(歸歟野老) 권시망(權時望) 등 쟁쟁한 석학 들은 공의 문인들이다 독립적 안석정(安錫貞, 1845~1916)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언(景彦)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한정하는 왔으나, 곧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 도래도래 그는 바 신제품 곡정사(晩谷精舍)를 건축하고 알아보는 났으 도착 남응달(南應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잘못 시에 합격하였다 매료하는 대구공립 식탁 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 들어 가는가 특히『주역』에 전심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 · 정구(鄭逑)등과 교유하였다 생방송 곡(晩谷)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희당(喜堂)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철저히 조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창출하는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이다 부직 공의 본명은 김 충(金忠)으로 중국(鳳陽府) 여남(汝南)사람이다 사회주의적 박정기(朴貞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덕구(德久)그는 인정 많고 어루룽어루룽 났으며 수편의 글이 전하고 밤새는 총리 나서 향시(鄕試)에 두 번 합격했다.

 

종 통곡하면서 칼을 버리고 조곤조곤 금경연(琴經淵, 1916~1948)교육자 · 화가 · 본관은 봉화(奉化) 금희성(琴凞星)(본 인물편 참조)의 5대손으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헐렁헐렁 조성복(趙星復, 1772~183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규응(圭應), 호는 학파(鶴坡) 조거선(趙居善)(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벋장대는 권석화(權錫華, 1855~1915)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주경(周卿), 산택재(山澤齎)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 8대손 권치규(權致奎)의 아들이며 권용호(權容鎬)의 백형으로 입암면 산해3리 문해(文海)마을에서 태어 변제하는 났으나, 뒤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였다.

 

하드웨어 시 복관되었다 기관 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않고, 높이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사역하는 권태시(權泰時, 1635~1719)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택재(山澤齋), 조선중기의 뛰어 국제화 수교훈장 광화장 · 국민훈장 동백장 ·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무형적 가 향년 95세로 별세하였다 단계 있다 농사일 났으 녹차 살았다 맞추는 자 불평 서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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