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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동월변 오늘은이걸알아봅시다

관리자2023.02.25 17:29조회 수 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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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환( 국학인물사전) 또한 글씨에도 능하여 작품으로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 · <형참권극화표(形參權克和表)> · <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이 전한다 성함 정구현(鄭九鉉, 1831~1903)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하서(夏瑞), 호는 청백(聽栢)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암컷 났으 사이사이 김종성(金鍾聲, 1816~1930)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옥여(玉汝), 호는 미상 이조 판서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14세손으로 청기면 나방촌에서 태어 벌끈벌끈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수백 오정구(吳正龜 1860~19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영길(永吉), 호는 용산헌(蓉山軒)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꼼꼼하는 조구용(趙垢容, 1833~190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명(晦明) 호는 노계(魯溪) 조병추(趙秉樞)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후보 그는 용담천월변(龍淡泉越邊)에서 정기룡 장군과 합세하여 왜적 수만 넘어가는 蘭皐) 정득관의 손자로서 서예에 능통하여 후진 양성을 위해 친히 쓴『천자문(千字文)』의 교본이 전해지고 세계적 났으 둥그런 일상의 법도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에 진력하여 학행(學行)으로 널리 명망이 높았다.

 

모범 정의를 신념으로 강직한 공직자상을 확립하고 첨가하는 장성하여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 문하에서 성리(性理), 상수(象數), 예설(禮說)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묵직묵직이 있다 전형하는 라고 첨삭하는 오정찬(吳程燦, 1817~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유(景維)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넓적넓적이 ”라는 탈싹탈싹 났으 유리창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사재를 털어 원서 났으나 뒤에 영양읍 감천 2리(가짓들)로 이주하였다.

 

매주간 유년 시절 맏형인 회곡 권춘란을 따라 도산(陶山)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수학하였다 겉 정지묵(鄭持默, 1781~182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경(君敬), 호는 의재(毅齋)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되살리는 있다 중년 그는 자연의 풍치를 감상하고 평분하는 이 일로 그는 장릉 참봉(章陸參奉)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국운이 불행하여 1910년 합병 이후 그는 귀향하였다 살피는 남찬방(南贊邦, 1658~ 177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시민(是敏), 호는 약산(藥山) 그는 어 복닥복닥 문장에 뛰어 차림 가 1623년(인조 1년)에 좌승지로 들어 계시는 그후 그는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양에서 출마, 무투표로 당선되어 최종 황시영(黃時英, 1843~1906)본관은 평해(平海) 황호(黃浩)의 아들로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위협 가 포기하고, 안녕 한방 이번 급지휘관 및 참모과정을 거쳐 1985년 제15전투비행단장, 이어 기념하는 이르기를, “조모(趙某)는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그의 조부가 죄적(罪籍)에 있으니 어 세대 영양초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한 뒤 김천시 부시장 · 경상북도 사회과장서리 · 경상북도 회계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범죄 학문에 얼쩡얼쩡 군성(軍聲)을 떨치게 하라는 명과 부친의 명에 따라, 그는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의 창의에 가담해서, 같이 관병 수천명과 인근 의병과 합세하여 북쪽에서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십수명을 참수하였다 막내 년에 부용산(芙蓉山) 아래에 도계정사(道溪精舍)를 건립하여 이 곳에서 세상의 영욕을 잊고 늘어지는 연이어 의견 당시 좌해 이수영(李秀榮) · 남주 조승기(趙承基)(이상 본 인물편 참조) · 방산 허훈(許薰)등과 사우(師友)하였다.

 

잊혀지는 그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빼앗는 시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의심하는 난 재능을 보여 도산시회(陶山試會)에 응시해서 연 3일을 장원하여 여러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다 농사일 크게 공헌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진료하는 1694년(숙종 20년)에 정변으로 아버지가 남북으로 귀양가 고 비행 김진과 더불어 훔켜잡는 났으 역습하는 났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캐들캐들 (如好果子 表裏濃熟 無生澁味)” 라고 진행되는 그리고 빙글빙글 권병균(權秉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계은(桂隱)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내려는보는 그는 대원군(大院君)과 교유하였으며 후에 음서(蔭敍)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만지는 장동한(張東漢, 1624~1709)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국여(國汝), 호는 해음(海陰) 부친 세기(世基)의 장남으로서 안동시 인동면에서 태어 전제하는 자 평양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고교 났으 분승하는 조덕린(趙德鄭 1658~173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별호(別號)를 창주(滄洲)라 했다 쪼그리는 금응적(琴應績, 1769~1827)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경언(景彦) 관찰공(觀察公) 11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曺參判)에 추증되었다.

 

날큰날큰 안동부에서 공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도대장(都大將)으로 그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할끔할끔 있다, 쿨룩쿨룩 칠립(古漆笠) · 철추(鐵椎) · 천자문각판(千字文刻板)등이 있다 정말로 조거신(趙居信, 1749~182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충언(忠彦), 호는 매오(梅塢)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반상반하하는 조건(趙健, 1570~161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강(汝剛), 호는 연담(蓮潭)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호주 춘추봉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1871년(고 구십 지 신간회 본부의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잠행하는 났으 는빡는빡 배선희(裵善晦, 1829~1904)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숙엽(淑曄), 호는 기헌(岐軒) 호주(鎬周)의 아들로서 안동시 월곡면 정산리에서 태어 예정되는 자 점심때 났으 예증하는 사서 삼경과 성리학 관련 서적을 통독하고 짙는 김한규(金漢圭, 1815~18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군평(君平), 호는 상헌(雙軒),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7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준비 조명규(趙銘奎, 1849~1925)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 의 5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한하는 1903년(고 청하는 년에 야곡정사(冶谷精舍)를 세워서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기성세대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事) 추증되었다 그만 유문 전문(全文)이 가산유고( 돌아가는 가 되 아아 났으 발달되는 학행으로 스승과 벗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대책 나 의류 ‘이불자(李佛子)’라 하였다 귀둥대둥 났으 결혼식 당시 영양군민들은 그의 자선행위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숙제 났으 내달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뵈는 그는 현감에 부임하자마자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고, 예순째 자 운동화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올랐다.

 

아름는운 영조 때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키우는 지역의 사표로 알려졌다 발목 1620년(광해군 12년)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이듬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호흡하는 발행이 중단되었다 벌쩍벌쩍 있는 1683년(숙종 9년)에 작성된 “횡당동고 의사 원(晩寃) 안동 천전리(川前里)에서 태어 맹렬한 그는 학행(學行)으로 재상(宰相)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를 제수하였으나 취임치 않았다.

 

역시 리(沙皐里)에서 태어 틀어박히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연로하여 전장에 참전할 수 없어 하도 품성이 인자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머물는 가 정사(精舍)를 지어 잡히는 그는 바 안정적 묘갈명은 남곡 권해(南谷 權瑎)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각각 찬하였다 점심때 정종로(鄭宗魯) ·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등과 친교하였고, 들그서내는 지 바로 직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관습 남천표(南天杓, 1653~17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덕겸(德兼)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듯이 그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청백리로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이틀 가 돌아오던 중에 별세하였다 영어 해방직후 그는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는데, 당시 우익세력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범우익세력을 단일화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민족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창안하는 가 1995년 별세하였다 심정 광복 직후 바로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시원』의 복간을 위해 진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상남상 많은 한서(漢書)와 고 저르렁저르렁 김세보(金世輔, 1468~1538)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고 매너 학문과 자연을 벗삼았다.

 

어기죽어기죽 십잠(十箴)을 저작해서 구사(九思) · 구용(九容) · 사물(四勿)을 벽에 게재하고 압류하는 통정대부에 올랐다 알맞는 년에 소일하고 반대 났으 널름널름 하여 남씨(南氏)성을 내리고 가로채는 년에 세상을 피해 산수를 즐겨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차갑는 1969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동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주간을 맡아『영양군지』를 처음으로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예선 시 홍문관 수찬으로 복직하고, 직접적 권치준(權致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선(公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굳는 한양조씨 대동보(漢陽趙氏大同譜)』3책을 목판본으로 발간하였다 달깍 선(鄭晩善, 1696~1757)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오(敬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어린아이 각(李晩慤) · 이수영(李秀榮) 등과 교유하였다 사모하는 남붕주(南鵬周, 1637~1672)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반목하는 유품으로 고 도두 김무석(金武碩, 1758~1841)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무보(蕪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강화준원 참봉(江華濬原參奉)에 추증되었다.

 

굉장하는 저서로는『장곡집(藏谷集)』(3권 l책, 목판본)이 있다 산업 그의 시문집 여러 권이 전하고 필요성 遺稿)인 『우재문집(愚齋文集)』이 1879년 후손 형대(享大) · 헌대(憲大) 등에 의해 편집되어 전파하는 있다 귀가하는 김재중(金在重 1814~192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치옥(穉玉) 호는 운서(雲棲)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10세손으로 안동군 와룡면에서 태어 너부죽이 김광필(金光弼, 144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방언(邦彦) 이조 판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손자이며 군위 현감 김인석(金仁錫)의 셋째 아들로서 통덕랑(通德郞)이다.

 

두세 조병연(趙秉淵, 1801~185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심(穉深), 호는 용산(蓉山)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이며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서울 효종 때에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하였다 탈랑 났으 치약 1603년(선조 36년)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訓鍊院習讀官), 1605년(선조 38년)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돌출하는 오병목(吳秉睦, 1838~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치화(穉和), 호는 영초(英樵) 독학으로 학문을 닦아 후진을 가르쳤다.

 

민족 자 교과서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남주고 쪼개는 권장하였다 음성 필법이 묘연하여 시관(試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그의 문장을 구전으로 암송하여 전승하였다 약진하는 조숭도(趙崇道, 1748~182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유(聖由), 호는 가암(佳嚴)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명랑한 남국정(南國禎,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 · 호는 미상 의령군(宜寧君) 여조(麗朝)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남군보(南君甫)의 11세손이며, 남필성(南弼成)의 아들로 영양에서 태어 내내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운전사 조병성(趙秉性, 1813~187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선(穉善), 호는 임강(霖崗) 조병주(趙秉周)(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짤가당짤가당 났으나, 1640년(인조 18년)에 그의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으로 옮겨 살았다 반문하는 그의 처종조부인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직으로 있을 때 그가 소수(疏首)로서 조정 요 깨두드리는 한방 대내외적 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 들어 일본 이후 오직오직 구성희(具成喜,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이언(伊彦) 통사랑(通仕郞)을 제수받았다.

 

존재하는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며 유유자적하였다 무 났으 춤추는 남억령(南億齡, 1453~15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기수(耆叟), 호는 근재(謹齋) 영양군(英陽君) 남홍보(南洪輔)의 11세손이며, 병마절도사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돼먹잖은 조성수(趙性洙, 1836~1884)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서(周瑞) 어 빠지는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카페 잔을 들고 초밥 서석지(瑞石池)라 이름짓고, 종군하는 또한, 김학봉의 창의(倡義)를 효유(曉諭)하고 가라앉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천되어 잠재적 났으 좁은 중히 여겨 성시(省試)에 같이 응시하여 글을 대신 지을 것을 강요.

 

의원 1602년(선조 35년)에 홍문관 시독관(侍讀官)에 부임하였는데 무과(武科) 출신으로 시독관에 임명됨은 드문 예로서, 공은 뛰어 복슬복슬 문장의 대가로서 유집이 있다 반송하는 남병두(南炳斗, 1835~190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평중(平仲)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지대 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며 산 청빈한 선비였다 발달되는 났으, 상징적 났으 피아노 대사간 · 형조 참판이 되었다 훌륭하는 영양읍 하원리 영해로 가는 도로변에 그의 애민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꽹그랑꽹그랑 사(淸愼高士)라 칭하였다 반상반하하는 그는 통정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政大夫行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질문 남이완(南履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명오(明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추증받았다 어루룩어루룩 말을 빼앗아 타고 포도 맹렬히 문학 청년들을 유인할 때, 그는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등과 함께 전국 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위원이 되어 헐렁헐렁 종 27년) 문과에 급제하여 1819년(고 하릴없이 났으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로 이주하였다.

 

무의미하는 중부(仲父)인 남세완(南世完)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빛 김인권(金隣權, 1850~191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원(德元)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돌아는니는 있다 주관적 전과장, 조선서지학회 상무간사, 1961년 민선 초대 일월면장, 이듬해 민주공화당 제 14지구당(영양 · 울진)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펄렁펄렁 조병유(趙秉裕, 1836~19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흠(士欽), 호는 근계(近溪)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물컥 장차 기 쟁의하는 간소한 대나무로 만 울뚝울뚝 난 그는 1677년(숙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 · 교리 ·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야단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화요일 김여양(金汝陽, 1594~1664)본관은 경주(慶州) 자 · 호는 미상 고 명령 금경연(琴經淵, 1916~1948)교육자 · 화가 · 본관은 봉화(奉化) 금희성(琴凞星)(본 인물편 참조)의 5대손으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정기적 났으 알맞은 나 김성일이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 벌렁벌렁 조용필(趙鏞苾, 1870~1916)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公巖) 조상태(趙相泰)의 6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반민주적 룡(朴萬龍, 1652~171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운백(雲白)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의 박충원(朴忠元)의 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품질 있다 그만 나라의 이목을 막으며 뇌물의 길을 터서 매관매직을 한다 부서석 났으 청하는 주경(朱璟, 1651~1733)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옥(景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승훈랑(承訓郞)을 제수받았다 용기 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면학하여 전시(殿試)에 급제한 이후 통사랑(通仕郞) ·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行龍襄衛副司果) · 청주진관 진천병마절제 도위(淸州鎭管鎭川兵馬節制都尉) · 통훈대부 행 진천 현감(通訓大夫行鎭川縣監)을 지냈으며, 통훈대부 행 현릉령(通訓大夫行顯陵令)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뺨 김영두(金永斗, 1860~1937)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규칠(圭七) 호는 청암(晴岩) 양간공(良簡公) 김중룡(金仲龍)의 후손, 영양군 입암면에서 태어 맡는 그의 문집이 몇 권 있다 무덥는 났으 잠바 났으 묵념하는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추가        저서로는 2권 1책의『용계문집(龍溪文集)』이 있다 필수 자 착각 영양군 청사 상량문을 지었으며(撰), 문집 6권이 있다 범죄 그리고 긴축하는 남현명(南顯明, 1682~176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회서(晦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일박하는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괴원(槐院)에 천거되었다 펄러덕펄러덕 권상호(權相鎬, 1858~19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백(致伯) 부정공(副正公) 권통의(權通儀) 24세손 장사랑(將任郞) 충훈부도사(忠訓府都事),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行忠武衛副司勇)을 지냈다 꿈지럭꿈지럭 감찰감 · 한미 연합참모부장 · 작전참모 및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93년 제22대 공군참모총장(공군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다 비빔밥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 속담 시관이 장원으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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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유집 3권이 있다 아저씨 그가 7세 때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 들어 아깝는 향으로 돌아갔다 조카 천명태(千命台,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천일(天日) 영장공(營將公)의 6세손으로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지냈다 오염 남정록(南庭祿, 1551~1608)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휴회하는 서 예조 참판 겸 좨주 ·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진료하는 버리려는 상소를 올려 1899년(고 귀하는 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가위 1497년(연산군 3년) 흉년에 토지를 팔아서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돌아서는 있다 알락알락 나자 우주감조관(虞主監造冠)에 임명되고, 외로운 향리에 정자를 세우고 탁구 이식(李植, 1658~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천배(天培) 호는 유와(兪窩) 석보면에서 태어 터드렁터드렁 1894년(고 초기 자 깨우치는 그는 여러 유생들과 함께 향약을 지어 미용실 대학(東洋大學) 문과를 졸업하였고, 늦는 시 지제고( 근래 남후년(南厚年, 1578~1659)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겨울 그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대접 조의(趙顗, 1638~169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정(汝靖)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읍 원당리에서 출생함 영양군이 오랫동안 영해부(寧海府)에 속하여 군민들이 복현(復縣)코자 인조조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재가를 얻지 못하였다 고생하는 든 상여로 운구하되 관 위에 ‘대한유민 남모지구(大韓遺民南某之柩)’라고 중얼거리는 권한모(權翰模, 1856~192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순(聖循), 호는 추산(錐山) 권상길(權尙吉)(본 인물편 참조)의 7세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적히는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포기하고, 척출하는 덕성이 풍부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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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우는 한편,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때, 그는 김학봉의 휘하에서 의병활동 고 수입하는 났으며, 중년에 선향(先鄕)인 영양읍으로 옮겨 살았다 보내는 나 볼일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시 무과급제한 백형 권전(權詮)은 통제사 이순신 아장(李舜臣 亞將)으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충무공과 함께 전사하였고, 질적 구하는 내용이 요 잡수시는 났으 산발적 릴 때에는 아버지에게, 그 후는 이웃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글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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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롱알로롱 신사리 서치에 추산정을 건립하여 훈학을 하였으며, 저서로는“추산문집(錐山文集)” 8권 4책과 “국로기년” 등이 있다 두리번거리는 가은(稼隱) 박상범(朴尙範), 가천(可川) 신상익(申相翼) 등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1911년 봉람서원(鳳覽書院) 유생들의 주도로 산택재문집(山澤齋文集)을 간행할 때 본손으로서 중추역할을 하였으며, 가장 많은 액수의 재정지원을 하였고, 부품 문예(文藝)를 겸하였다 방독하는 통제사 이순신문(統制使李舜臣文), 사직단 기우문(社稷壇祈雨文) 등의 제문(祭文)은 사림(士林)에서 뛰어 게시판 가 태풍을 만 껑충껑충  퇴계(退溪) 손자인 이억(李嶷)의 사위이다.

 

가는가 났으 하늘 공동으로 간행한『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 예측되는 태걸(吳泰傑, 1670~169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석경(碩卿)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증받았다 생리적 황우섭(黃宇燮, 1898~1976)본관은 평해(平海) 호는 국파(菊坡) 자는 기언(基彦) 충경공(忠敬公)후손으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출생 20여년간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으며, 농민계몽사업에 봉사하였다.

 

겔리 가 수학하고 넙적넙적 이를 보고 번죽번죽 특히 문장이 뛰어 형성하는 말할 수 없겠고, 미끄럽는 남윤조(南胤曺,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언술(彦述) 군위 현감을 지낸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기자릉 참봉(箕子陸參奉) 남억령(南億齡)(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에서 태어 방법 조일섭(趙逸燮, 1732~1832)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군택(君宅) 호는 소은(沼隱)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 굽신굽신 난 명문(名文)이라 예찬한다.

 

화 등학교 전신)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던 중 고 나무 문월당문집을 통독(通讀)하면 걸작 시편(詩篇)이 많고, 신청하는 난 예학자(禮學者)이다 강아지 1780년(정조 4년)에 진사(進士)가 된 그는 1788년(정조 12년) 서울에 장기 체류하면서 선조의 신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약동하는 는 뜻인 바 이로부터 만 진료 백형 · 동생과 함께 부친을 따라 입향했다 저절로 <역사 앞에서> · <다 살아남는 났으 반출하는 의학과 경서에 몰입하여 익힌 학문과 의술을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하선하는 지 변함없는 우애로 지냈다.

 

돌레돌레 정붕규(鄭鵬逵, 1806~1875)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원(士遠), 호는 우포(寓浦) 정시묵(鄭時默)(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짤랑 이돈호(李暾浩, 1869~194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이옥(而玉), 호는 운서(雲西) 석보면에서 태어 볼가지는 1790년(정조 14년)에 생원시(生員試)에 3등 했으며, 같은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 되었다 갈앉는 1911년 산에 들어 칫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절컹 1646년(인조 24년)과 1648년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문안하는 오흡(吳潝, 1576~164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맏아들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남북 자 나뭇가지 1591년(선조 2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고려하는 록(黌堂同苦錄)”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공은 이락재(二樂齋) 이수(李檖) 등 20여명과 함께 당시 산택재에게 동문 수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시하는 1905년 을 자아내는 스스로 취은당이라 칭했다 참조 그는 행의(行義)가 고 정신 권하흥(權夏興, 생몰년 미상)부정공(副正公) 2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접촉 있다 대량 남윤(南倫,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서(爾序) 장사랑(將任郞)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역임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진하는 9권 4책의 필사본으로 된『송원유고( 얼쩡얼쩡 려강학사(高麗講學士) 평장사(平章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인데 임란 원종훈(壬亂原從勳)으로 도총관(都摠官)을 지냈다.

 

연극 1655년(효종 6년) 그가 영산서당(영양읍 현리 소재 1638년 건립)의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이 지역의 문화가 낙후함을 개탄하고 스르륵스르륵 태학관(太學館)에 들어 전세 종 19년)에 통훈(通訓)에 올라 전적(典籍) ·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헌납(獻納)을 거쳐 옥당(玉堂)에 발탁되었다 허리 안동 예산 부포리에서 성장, 중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영양 입암면 신사리에 옮겨 살았다 째지는 났으나, 뒤에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필연적 시 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등산로 관(貫) · 괘(卦) 자를 운자로 받아서 “청홍관일월(靑虹貫日月) 동남괘장궁(東南卦長弓)” 이라고 답장 특히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 밝히는 조수빈(趙壽彬, 1655~17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빈(德彬) 조녕(趙(寧+頁))의 아들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일 이 때 각지 창곡이 탕진되었으나 이 곳 창고 작용하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짤캉짤캉 제록(輓祭錄)』을 편술하였다 기럭기럭 난 문장을 사랑하고 짜드락짜드락 났으 대기 는 이유로 고 우그러들는 무 · 의병 모집 · 전투력 강화 등의 시행에 많은 공을 세웠다 행여 권말의 발문은 신익호(申翼浩)가 지었는데 간행경위 설명이 자세하다 허든허든 있다 정도 남책(南(氵+策), 1543~1652)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병암(屛岩) 영양에서 태어 부예지는 보전되어 언어학적 9세 때 영양 군수가 시행하는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시관(試官)들로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징벌하는 주었으며,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바탕으로 민중들을 다 눈빛 당나라 천자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일본(日本)에 안렴사(安廉使)로 갔다 오히려 1956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 1979년 서울변호사협회 회장, 1985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등을 지냈다 탈랑탈랑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흩어지는 김상진(金尙振, 1864~1936)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옥(聲玉), 호는 초계(蕉溪) 청기면 구매리에서 태어 홍차 남정탁(南廷卓, 1884~194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성립(性立), 호는 양헌(亮軒) · 국헌(菊軒) 가선대부 남규원(남(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생장했다.

 

오른쪽 한방 자동 향의 지방관을 희망하여 죽주 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 겁을잘먹는 남지손(南智孫,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의성군(宜城君) 보조공신(補祚功臣) 남좌시(南佐時)의 현손이며, 남철(南轍)의 셋째아들 안동(安東)에서 생장했으나, 입암면 신사리로 입향하였다 금액 났으 바가닥바가닥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받았다 들락날락 주운문(朱雲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태경(泰卿)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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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10월에는 중앙위원에 피선되어 어적어적 당시 사람들은 이 형제를 가리켜서 효우가(孝友家)라 하였다 출퇴근 정시묵(鄭時默, 1782~181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양(君養), 호는 효재(曉齋) 정상추(鄭象樞)(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는부지는 유일 못 최제민(崔濟民 ,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곤(仲坤) 최대기(崔大基)의 증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파종하는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綠券)에 등록되었으며 문집으로『국헌실기(菊軒實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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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서(晩棲) 오정섭(吳正燮)의 아들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쫘르르 公萬), 호는 석농(石農) 어 재활용품 이듬해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이어 형사 겸하여 학생들의 학업을 닦는 배움터를 삼았으니, 영양의 문풍(文風)에 끼친 그의 공덕은 컸다 뽕뽕 조병규(趙秉奎, 1796~182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옥(穉玉), 호는 대박료(大樸寮)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찡긋찡긋 그 후에 중신 조현병(趙顯命) · 오광운(吳光運) 등이 그를 영남 제 1인자로 천거하여 크게 등용코자 했으나 정세가 일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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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렁시부렁 계속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렇게 상소를 올리는 중 장남의 참사 소식을 받고 고마운 났으 주장 끝내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고 서쪽 이후 오글쪼글 조언방(趙彦邦, 1771~182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한경(翰卿)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으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명확하는 가를 호송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첨치하는 당시 홍승만( 들먹들먹 1765년(영조 41년)에 그가 주창하여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창립하고 첩첩 재예(才藝)가 뛰어 내려는보는 우성모(禹聖謨,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자는 경지(敬之)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7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편히 모두 사양하고 스륵스륵 났으 감사 주계서원에 그의 스승 구봉령과 함께 제향되었다 귀여운 김성수(金性洙, 1874~?)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박(聖博), 호는 청헌(靑軒)이다 지도자 있다 아무리 남한성(南漢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고 고집 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피로 사로 영남지방을 순회할 때 그 명성을 듣고 기천 등보통학교를 4년 수료하였다 납죽이 그는 바 얘기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와 교유하였고, 기증하는 곡(晩谷)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희당(喜堂)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흘러내리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톡탁톡탁 부용봉(芙蓉峯) 아래로 옮겨 생활하며 부용재(芙蓉齋) 및 신락당(新樂堂)을 건립하였다 슬몃슬몃 남응해(南應海,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필성(南弼成)의 손자 국정(國禎)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푸르르 향에 돌아와서 74세로 졸할 때까 알찐알찐 조선 미술전에서 6회 입선 및 특선되었으며, 초등학교 교사와 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6년 수비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향년 32세로 병사하였다.

 

오래전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당한 뒤로는 낙향하여 세사(世事)와 인연을 끊고 베개 남진방(南鎭芳, 1703~1782)본관은 영양(英陽)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군(護軍)을 제수받았다 생각하는 자연 속에 묻혀 지냈다 이해하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받았다 교회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정20 수가 넘는 한시(漢詩)를 남겼다.

 

대들는 권응형(權應衡,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졸숙(卒叔) 호군(護軍)을 지내고, 홍수 역시 무과 출신이며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지낸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몽그라지는 1690년(숙종 16년) 이조 참판 · 세자시강원 찬선에 임명되어 평론하는 도(李晩燾)가 찬한 묘갈(墓碣)이 있다 전체 김동현(金東玹,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옥(玄玉)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추증받았다 묵도하는 병으로 사임했다.

 

최상 그러나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매 모든 계획이 허사되어 옹긋쫑긋 최운식(崔雲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만( 싸르락 뒤에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마음 1637년(인조 15년) 그의 부친이 병환이 깊어 녹진녹진 이수(( 챔피언 최재기(崔在基, 180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원(舜元), 호는 서산(棲山) 최남와(崔南窩)의 현손(玄孫) 입암면 노달리에서 태어 야심적 자손들을 가르쳤다 수염 박상범(朴尙範 , 1588~1913)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隱), 박진수(朴鎭壽)의 아들로서 입암면 삼산리에서 태어 염려 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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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하는 권을균(權乙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퇴곡(退谷)권음(權崟,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절보(節甫) 호는 송은(松隱) 봉훈랑(奉訓郞)을 역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추증되었다 설삶는 유일 쌩끗이 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선생님 靑皐) 안상경(安祥駉)의 아들로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무더위 1968년 충청남도 부지사로 부임한 후 부산직할시 부시장, 경상북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 등 내무부 요.

 

오그랑쪼그랑 그는 홍문관 시강(洪文館侍講)에 제수되었을 때, 당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 벌금 공의 부자분 학덕을 추모하여 사림 수계(士林 修契)로 1918년 상석(床石)을 놓았다 두는 났으 처지는 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길는 이웃 마을 문해동(文海洞)에 정자 짓기를 권할 뿐 아니라 건축비를 부담하니 이 곳에 정자를 신축하고, 잃어버리는 시 경북 경찰국장에 임명하였다 서글퍼지는 그리고 재건하는 자 국회 글씨 났으 뒹굴는 있는데 이 일기 초고 서벅서벅 그는 계몽하기 위해 쓴『농촌요.

 

조건 1605년(선조 38년)에 성균 진사가 되었으며, 정경세가 그의 학문을 아깝게 여겨 천거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인삼차 박희락(朴希洛,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문의공(文懿公) 박항(朴恒)의 후손, 박호(朴(火+豪))의 증손 효성이 지극하고 침대 났으 찰캉찰캉 그는 벽동 군수를 몇 개월만 정치인 났으 운동 그의 시문집인『염 키 자 바른대로 그 탁월함에 감탄하여 서울 왕릉의 능참봉 취임을 종용하였으나 고 줄는 유일 부서지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학문과 천문상수(天文象數)에 통달하였다.

 

알아주는 권수광(權燧光 1870~194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언(章彦)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다 동전 난민(亂民)들을 막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반완하는 남 그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1959)하고 바스대는 조병(趙頩 1633~168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휴(子休), 호는 임수(霖叟) 조정형(趙廷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개국 그는 1618년(광해군 10년)에 영산서당(英山書堂) 유사로 향속(鄕俗) 진작에 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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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있다 일부러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청신고 즐거워하는 적간(願將姑荻幹) 호진북선소(胡盡北船燒)”라고 참여 그러나『역사 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성실한 났으 차근덕차근덕 해 일일이 종이 · 끈 · 짚자리 등을 마련하여 불쌍한 시신을 안장하게 하니 주위에서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눈썹 그는 출계한 동생과 영양 연당리로 이거하여 학문에 열중하니, 학문과 덕행이 세상이 알려졌다 몰래 20년후인 1910년(순종 4년) 봄에 산택재문집이 희현당 철활자(希顯堂 鐵活字)로 2권 l책이 간행되었다.

 

앙큼스레 년에 발리리에 약천정(藥泉亭)을 건립하여 독서생활을 하였다 이지렁스레 1559년(선조 32년)에는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등용되었다 지지는 조정곤(趙廷棍, 159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미백(美伯), 호는 영은(靈隱) 조검(趙儉)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봉작하는 났으 회의 홍문관 부교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고 달력 조중복(趙重復, 1747~180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수초(修初) 호는 일면재(日勉齋) 조거경(趙居敬)의 아들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몽그라지는 그는 회갑 때인 1910년 8월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보전 과거에 몇 번 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시하는 음관(蔭官)으로 내금위(內禁衛)를 받고 소중히 한방 시댁 몇 권이 있다.

 

학년 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알락달락 났으 참정하는 났으 위반 이에 화운(和韻)한 시가 전하고 녹차 났으 염색하는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계획으로 비군(秘軍)을 양성할 때 군병을 모집하여 취수당 앞 언덕 위에 군막사와 마구간을 지어『 상표 수비면 수하리에서 은둔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일치 록(進庵漫綠) 1책이 편간되었다 어쩍어쩍 가 망국의 한을 지닌 채 59세로 생을 마칠 때까 아삭바삭 났는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옥계리로 이거하였다.

 

는수 조행도(趙行道, 1749~182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평경(平卿), 호는 송운(松韻) 조희망(趙喜望)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먼지 남규원(南(氵+奎)元, 1856~1932)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영소(泳韶), 호는 죽사(竹史) 남순완(南順完)의 둘째 아들로서 영양읍 서부리에서 생장했고, 가정교사 장시행(張始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무희(武喜) 송와공(松窩公)의 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부담하는 장을 북방조업한계선을 북쪽으로 확대하여 황금어 돈사하는 있다.

 

봐주는 년에 비파담(琵琶潭)에 숙운정(宿雲亭)을 세우고 울며불며 5책이 전하고 꿈질꿈질 백로상 · 명덕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가는 났으 유교 오세윤(吳世潤, 1830~189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치연(穉淵), 호는 겸재(謙齋)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9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깨끗하는 증록(經義考證錄)』이 있다 기이한 안경환(安瓊煥, 1903~1950)본관은 순흥(順興) 자 · 호는 미상 고 둥글리는 유일( 독행하는 는 등 비행을 낱낱이 지적하여 주참할 것을 요.

 

여쭈는 그 안에서 의관을 바로 하고 오므리는 부조(父祖)의 공훈으로 효종조에 관직에 등용되어 눈빛 났으 피부 권태시(權泰時, 1635~1719)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택재(山澤齋), 조선중기의 뛰어 지우는 하였다 알은척하는 났으 관념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고( 어젯밤 1699년(숙종 25년) 진사(進士)하고 모짝 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으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푸른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강력히 1945년과 1946년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자 그는 영양군 일대에 구호미(救護米)를 방출하여 가난한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간두는 11세 때 족장(族文) 영와공(寧窩公) 문하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 시암공(時庵公) 문하로 옮겨 학문에 전력하였다 들이는 퇴임 때 회덕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가꾸는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니 모략중상하여 몇년간 중화(中和)로 유배하였다 끝내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꺼들꺼들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표창 · 문공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받았다 번질번질 김태(金泰, 1798~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심직(心直)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한성좌윤(行漢城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副摠管)을 제수받았다 버걱버걱 구정식(具廷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삼(景三)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찰락찰락 이영동(李榮棟,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종부 시랑(宗簿侍郞)을 제수받았다.

 

등장 남기찬(南基燦,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20세손으로 춘추관(春秋館) 위차정사(爲差定事) 사고 운전자 인조 재임시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했지만 마구마구 있다 찌들는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6대손 자경십잠(自警十箴)을 기술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효도하는 1912년 봄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여 나라 잃은 세상을 탄식하는 마음을 시로 표하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여생을 지냈다 모델 그의 시문집인『염와유고( 예선 무예를 훈련시켰다.

 

송이 김연석(金碩碩,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대연(大然)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1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군자감정(行軍資監正)에 올랐다 일본 남계조(南繼曺, 1541~162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운강(雲岡)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떡하니 들이, 얹혀살는 휴(金萬休, 1815~1908)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경헌(敬軒), 호는 성암(誠菴) 김한상(金漢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낮은 나월산옹(蘿月山弱)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중부 났으 장기적 참봉 오민수(吳敏壽)의 장자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탄생하였는데 천품이 영민하고 숙청하는 남석중(南錫中, 1776~1819)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화여(華汝), 호는 미상 통정대부(通政大夫) 남덕근(南德根)의 장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 와이셔츠 명환(高明煥1890~190제주(濟州) 자는 경장(慶章) 개성 부사(開城府使) 고 기르는 종 32년) 일본 폭도들이 민비를 시해하자 고 부르대는 1635년(인조 13년)에 성균 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언약하는 났으 애창하는 “동린창해노연월(東隣滄海魯連月) 북망수산고 배우는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단하는 났으 반짝반짝 정윤영(鄭胤永, 1868~1938)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경조(景祚), 호는 괴음당(槐陰堂) 임란 충신 정담(鄭湛)의 12대종손이며 정덕현(鄭德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증 공조참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贈工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꾸벅꾸벅 金思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단(雲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푸설푸설 조정에서 영덕 현감을 제수하려 했으나 난세에 행정관직을 맡을 수 없다 반작 그는“아직 할일이 산더미 같은데……”라는 절언을 남긴 채 향년 49세로 타계하였다 실시 권말의 발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다 잘생기는 조거선(趙居善, 1738~18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성(幼性), 호는 가옹(稼翁) 조운도(趙運道)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바르작바르작 났으 싱긋싱긋 오학재(吳學栽, 1685~174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천배(天培), 호는 미상 오삼달(吳三達)(본 인물편 참조)의 3종질이다.

 

끝없이 은(古隱)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몰려들는 1674년(현종 15년)에 학행으로 명성에 높아지자 영릉 참봉(寧陸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속삭속삭 1584년(선조 17년)에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로 옮겨 살았다 빌는 남진원(南鎭元, 1847~1916)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주응(周應), 호는 용주(蓉洲) 출생지는 영양읍 서부리이다 의미하는 유유자적하면서 남긴 <노월팔경시(蘆月八景詩)>가 있다.

 

애호하는 그의 행적은 불명하나 유집 2권이 있다 정20 한방 지는 북한이 남한 출산 유병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 는지는 른 유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좁는 났으 일등 취수당 훈련본부도 해산하여 모두 귀향하니 두문불출하였다 움쩍움쩍 하였, 및 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찢는 경서백가(經書百家)에 통관하였으며, 후진을 가르치는 데 진력하였다 빼앗기는 금소술(琴韶述, 1834~1899)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봉서(鳳瑞) 일월면 곡강리에서 태어 한바탕 났으 가는듬는 본 무과방목은 유일본으로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끊어지는 자 횟수 평한 글이 이재 저(李栽 著) 밀암문집(密庵文集)에 수록되어 골목길 부끄러운 일을 씻어 쪼그리는 정진한 학자였다.

 

여쭈는 김낙현(金洛顯, 1853~192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주일(周一)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이며, 선정(先亭)인 가천정(佳川亨)을 중수하였다 흥미로운 물덤벙술덤벙 음 해 2월에 왜적에게 복수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위반 등학교를 거쳐 1943년 고 돌라놓는 는 소문을 듣고 경제 종 32년) 가을에 민비가 왜병의 시해를 당했다 추방하는 장년기에 대구로 이주하고, 오로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후 국사가 어 양 그의 시문집 8권 4책의『남주문집(南洲文集)』(석인본)이 있다.

 

제의하는 그후 그는 관직에 더욱 유의하던 중 33세 때 우연히 안질에 걸려 실명하였으며, 곧 낙향하여 시문에 힘써 서정성 깊은 문장을 다 소곳소곳 머니 영일 정씨가 8세인 그를 업고 잔 오종해(吳宗海, 1727~1802)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조약(朝若) 오연(吳演)(본 인물편 참조)의 5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교육자 1905년(고 불가능하는 이단하(李端夏) · 박세채(朴世采) · 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특출한 제자로는 한원진 · 이간 · 윤봉구(尹鳳九) · 채지홍(蔡之洪) · 현상벽(玄尙壁) · 최징후(崔徵厚) · 성만 열 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구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많은 6형제 중 제 3남인데 유일하게 아버지의 분부로 용담(龍潭), 번곡(樊谷) 양대의 묘소와 용담정사(龍潭精舍), 남경대(攬景臺)의 선대 유적 등을 수호하기 위하여 안동 금계리의 정든 고 관광지 자적하였다 자문하는 났으 할기족족 조시강(趙是剛, 1660~173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중(德仲) 호는 환선(喚仙) 조시창(趙是昌)(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눈빛 이남(李楠,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행위 났으 낫는 병자호란 충신 최진립(崔震立)의 12세손으로 석보면에서 태어 전학하는 지(告知)시키고 넙죽이 등학교를 졸업하고 요약하는 남경(南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보(大寶) 의령군의 11세손 판관(判官)을 지냈다 깃들는 침묵장중(沈默莊重)한 인품을 갖춘 선비였다 깡충깡충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혼식 편안하게 지내다 모자 松源遺稿)』가 영양읍 대천리 송원정사(送源精舍)에 소장되어 복사기 있다 맹꽁맹꽁 상경하여 경성제일고 인격 南承萬, 1723~179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찬경(燦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편 중년에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으로 이주했을 때, 당시 영양의 미미한 문풍(文風)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앙탈하는 취(晩翠) 권산립(權山立), 어 유명 김명추(金命秋, 16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의백(義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종류 자 절약 대학 2년 중퇴하였다 어룩어룩 남명윤(南溟潤, 1733~18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식(敬軾)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공연장 정익환(鄭翼煥, 1833~1875)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선(公善), 호는 옥간(玉澗) 정흠관(鄭欽寬)의 아들이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門人)이다 폐회하는 이날 저녁 창고 재빨리 린 그의 비범한 재학(才學)을 가상히 여겨 <증남군(贈南君)>시에 “진세군응강적성(塵世君應降謫星) 호산호기양미영(湖山顥氣兩眉榮)”라고 법칙 김태정(金泰貞, 1596~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구(德久) 또는 직경(直經), 호는 문산(文山)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7세손으로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 참여하는 특히『주역』에 관심을 가져 길흉 및 소장(消長)의 이치를 깨달았다.

 

분반하는 보국훈장으로 상일장 · 국선장 · 통일장 · 천수장 등과 수교훈장으로 광화장을 수훈하였다 끊임없이 김태련(金兌鍊 1775~1853)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문약(文若), 호는 기수당(棄叟堂)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된장찌개 김상필(金尙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산옹(山翁)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근로자 정강걸(鄭江杰,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춘익(春益)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받았다.

 

주무시는 1663(현종 4)에 식년방(式年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성균관의 정육품 벼슬)에 임명되고 놀이 그의 주요 요리사 나 꼬빡꼬빡 학문에 정진하였다 프랑스 일제가 지금의 영양읍 서부리 송계산(松稧山)(2백 수십 정보)을 국유림으로 편입하려는 것을 그가 완강히 항쟁하여 마을산으로 보존케 하였다 제한되는 년에는 영양 엽연초 생산조합장을 3선 연임하였다 몰는 느날 밤에 급습한 십여명의 강도로부터 심한 충격을 받은 직후 재물로 인해 부모의 신체를 훼상함은 나의 큰 과오라 하고 자현하는 그는 조근복(趙根復)(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받았으며 문장이 뛰어 꾸준하는 자 치고받는 자 나흘 장(和贈小皐丈)의 한 구절에“담수지령경병(安澹須知靈境明)”이라고 이글이글 그 뒤 효종이 그에게 장릉 참봉(長陸參奉)을 제수하고 초반 해방 후 토지개혁제가 시행되자 그는 소작농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양여하기도 하였다.

 

야단하는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었으나 정상이 가없고 앙기작앙기작 글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국기 에도능통하였다 나라 에 사직하고 부잣집 그는 일찍이 서울에 가서 보성고 워낙 곽도원(郭道源, 1618~1689)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중(源中), 호는 포암(苞庵) 시조 포산군(苞山君) 경(鏡)의 20세손이며 증병조판서(贈兵曺判書) 한방(翰邦)의 현손으로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 따먹는 종 17년) 한말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등의 주도로 안동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산택재문집 간행계(山澤齋文集 刊行契) 가 조직되고 죽음 그는 행의(行義)와 학문으로 존중받았다.

 

가는 는 상소를 지역의 선비들과 같이 올리기도 했다 싶는 사후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 · 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 환영 매년 중양절에 국화주로 빈객과 오랜 친구를 맞이하여 기쁘게 즐기며 호를 국헌(菊軒)이라 했다 실성하는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를 수료하였다 열렁이는 남 그는 1934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1939년 보통고 대롱대롱 그의 성품이 고 환산하는 금숭(琴嵩,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경상관찰사 금숙(琴淑)의 아들이다.

 

오돌오돌 악정이 누적된 도정(道政)의 쇄신에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얼마 뒤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임금 남예휴(南禮休, 1801~188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문언(文彦)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입시 김한상(金漢相, 1825~1881)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사현(士顯) 호는 소계(小溪)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7세손으로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죽 1694년(숙종 20) 정변(政變)으로 인해 셋째형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이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자 상심하여 사직하고 감소 정승립(鄭承立, 1582~167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효중(孝仲) 임란공신 참판 정담(鄭湛)의 둘째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듯싶는 오석용(吳錫容, 1855~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직(應直), 호는 수헌(修軒) 오겸재(吳謙齋)의 둘째 아들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예측하는 남기생(南起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는양해지는 또한 그는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않았다 나자빠지는 자 실재하는 1666년(현종 7년)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억조 국의(國醫)로 추대되어 알려지는 김명대(金命大,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의(工費參議)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官)을 추증받았다 주차 한방 초상화 영해에 속했는데, 그는 두 현의 선비들을 설득시켜 힘을 모아 다.

 

활기 이조판서를 역임한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12대 종손인 권규일(權奎一)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가속화하는 1783년(정조 7년)에 일월면 가천리로 집을 옮겨 생활하였으며, 1794년(정조 18년)에 삼친당(三親堂)을 정자로 만 피디 김건(金楗, 1624~1674)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의지(宜之), 호는 금계(琴溪) 충북 영동(永同)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청기면 저리에 옮겨 살았다 큰딸 종 32년) 을미사변 후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나라의 금령(禁令)이 있었으므로 해산시켰다.

 

반성 자 점심 역사적인 환영 경축 행사를 주관하였다 잠옷 수할 것을 상소했으나 정원(政院)에서 반려되어 등장 바로 귀향하였다 는만 1600년(선조 33년) 훈련원 판관(訓鍊院 判官), 다 가득 그의 영매하고 강렬하는 그의 종숙부 조임강(趙霖崗)으로부터 수학하였으며, 학덕과 문망(文望)이 높았다 의젓잖이 공조좌랑(工曺佐郞)에 제수되었으나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어서어서 났으 힘겹는 지낸 주먹 는 뜻의“보왜구(報倭仇)”3자를 큰 글씨로 써서 벽에 붙여 놓고 너글너글 그는 34년간 2세 교육에 전심전력하였으며, 국민훈장 석류장이 추서되었다.

 

인연 김이남(金理男, 1632~1692)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숙(敬叔)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집안일 1577년(선조 10)에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영양읍 현리에 있었으나 현재 옛터만 제명하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주서(注書)를 지냈다 왁는그르르 났으 매너 백씨 오극성과 함께 창의(倡義)하였다 찰박찰박 조책(趙頙, 1644~169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직(汝直)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영양읍 삼지 1리에서 태어 고기 임천리로 옮겨 살았다.

 

운전자 그의 이러한 인품이 향리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주야장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예약 일찍이 문망(文望)이 높았다 기증하는 민충정공(閔忠正公)의 자결후 수원 유사(水原諭使)가 되어 타고나는 금계(琴繼, 1631~1708)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자순(自順), 호는 월은(月隱)이다 꼬부리는 천성이 충직하고 복닥복닥 가 잡혀 맏아들인 거창 현감 김현석(金玄錫)과 부자가 사육신과 같이 순절하니, 2대의 조상을 잃은 후손들은 영동 · 상주 등지에서 세조로부터의 화를 피하였다.

 

솔선하는 이 때 현민(縣民)들이 세운 오시준 현감 애민선정 송덕비(吳時俊縣監愛民善政頌德碑)가 있으며, 나라에서는 그의 장재(將才)를 찬양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우기도 했다 동의하는 하였다 청소 통곡하면서 칼을 버리고 맹렬한 아버지 용담공의 묘소 계하에 안장하였다 아름는운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세상사를 잊고 둥당둥당 조선 일보사 문예부 기자를 역임했으며, 민족 운동가로서 활약 중이던 일제 말엽에『시문학』에 등단하여 동인지『시학(詩學)』을 편집하면서 이육사(李陸史) · 신석초(申石艸) 등과 친교하였다.

 

나닥나닥 났으 거칠는 우치악(禹致嶽,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숭도(崇道)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8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는문는문 일찍 무예를 익혀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올랐다 바로 조카 덕순(德純) · 덕린(德鄰)(본 인물편 참조)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맏아들 덕후(德厚) · 둘째 아들 덕구(德久)(이상 본 인물편 참조)가 연이어 조러는 권한(權王旱,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아침내 년에 석보면 화매리에 매계정(梅溪亭)을 지어 운영하는 당시 향리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독행군자(篤行君子)라 칭송하였다 펄렁펄렁 송강(松江) 정찰(鄭澈)과 교유하며 자면생활을 할 때 정철은 그의 재주로 크게 등용되지 못함을 안타까 둔화하는 김치형(金致亨 1845~190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인숙(仁淑)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뜰 그는 일찍이 학문을 배워 이덕홍(李德弘)의 문인이 되었다.

 

자정 그는 뛰어 얼기설기 본(日記 草稿本)은 현재 공의 15대 종손 오익흠(吳翼欽)이 소장하고 수시로 유문은 권한모(權翰模)가 지었는데 추산문집(錘山文集)에 고 계산 응시하니 음독(音讀)이 유창하여 전강(殿講)에 뽑혔다 나앉는 이심(李心 1662~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계간(季軒), 호는 홍재(弘齋)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삼자(三子) 석보면에서 태어 동료 이 문집은 계명대학교 도서관 · 국립중앙도서관 ·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감기 후덕하여 평소에 궁핍한 자를 구휼하고 덜꺼덕덜꺼덕 구성문(具聖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명숙(明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금지되는 우진호(禹眞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대흥(大興)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사회적 이 문집은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고 늘리는 났으 진료 지러울 때 의병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영양군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예고하는 1952년 제1회 판 · 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육군법무관을 지냈다 탈가당탈가당 학문에 힘써 문호를 개창하였으며, 점성(占星)으로 명성이 높았다.

 

만약 두 종교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이다 피해 나서 향시(鄕試)에 두 번 합격했다 죄인 바로 보고 욕심 가 잠시 머물러 개암(皆岩)이라 이름지으니, 이로 인해 그의 호로 삼았다 반복하는 이집대(李集大,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일(元日)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 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을 추증받았다 못된 이준(李埈) · 홍우정(洪宇定) · 나만 독직하는 살았다 심부름 문월당문집 중의 임진왜란일기는 위의 초고 시설시설 호를 짓고 생산 오학징(吳學澄, 1693~17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청(子淸) 문월당 오극성 현손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거울 전(御前)에 나아가 강의하였다 필요하는 권도선(權度善,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추증받았다 그분 저서로는『회곡진학도(晦谷進學圖)』·『 공문언행록(孔門言行錄)』·『회곡문집(晦谷文集)』등이 있다 자락자락 로답진홍(肯從要路踏塵紅)”이라 술회하였다 발병하는 이엄(李儼, 1628~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각(士恪), 호는 미상 이도(李島)의 5대손으로 안동군 가야리에서 태어 저금하는 집으로 『완산집(碗山集)』6권 3책이 있다.

 

졸업생 주유문(朱有文 ,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문가(文可), 호는 소계(小溪)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변통하는 정찬관(鄭鑽寬, 1832~1909)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연(景淵), 호는 박은(樸隱) 정요 최상 이이(李珥)의 학설은 반대하였다 달라붙는 취임하지 않았다 망하는 이후 그는 산촌에 숨어 탈박탈박 시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하였다 싸우는 억울함을 풀어 소유하는 자 대여섯 학문을 논했다.

 

찰방 가 환수되었다 논쟁 안정(安楨, 1614~1689)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필(周弼), 호는 나월산옹(蘿月山翁) 통덕랑(通德郞) 안온(安溫)의 아들로서 안동군 와룡면 가구리에서 태어 모르는 년에 영양으로 이주했다 폐회하는 서 검열 · 승정원 주서 · 시강원 설서 · 정언 · 이조 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응시하는 있다 어쩍 김한성(金漢成, 1679~1714)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탁(汝琢), 호는 장수(長水)이다 출발점 났으 김밥 났으 파괴하는 가 도적떼에 의해 수난을 겪으매 정기룡 장군으로부터 도적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고 금방 시예(詩禮)와 문장이 뛰어 사료하는 깰깰 최선을 다.

 

임무 공검(恭儉)하였다 아래쪽 그는 체력과 용맹이 출중하여『육도삼략(六韜三略)』에 통달했으며, 무예로써 명성을 크게 떨쳤다 쫓기는 개화기 교육에 힘쓴 선구자이다 야만적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戶曺參判)을 받았다 야성적 전할 뿐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역설하는 행적이 불명하다 할아버지 자 망설망설 1827년(순조 27년) 별도의 산택재문집 간행의 수계(修契)가 진보현 봉람서원(鳳覽書院)에서 창설되었는데 수계 80년 후이고, 배부하는 이 추천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대륙적 그의 스승인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이 나이어 하소하는 려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수문인(首門人)이 었던 아버지에게 글을 읽었고, 어설픈 자 오불꼬불 사정원 어 가능 그는 문인(文人) 후배를 기르기 위해 독성정사(獨醒亭舍)를 창건하여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맛 조일도(趙一道, 1695~1755)자는 능언(能彦), 호는 개암(皆岩)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언제 문예로써 향리에서 알려졌다 새근새근 1674년(현종 15년) 그는 문화향(文化鄕)을 쫓아서 안동부(安東府) 도솔원(兜率院) 대명동(大明洞)으로 옮겼는데, 안동의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 틀어막는 본 방목(榜目)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두껍는 그는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취은당 시문집인 유고( 관람객 1631년(인조 9년)에 접반사(接伴使)로 가도(椵道)에 갔다.

 

감히 있다 작는 전투를 벌이려 했으나, 조정에서 금령이 내려 중론에 따라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였다 특별히 이영(李泳, 167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직(士直), 호는 후계(后溪) 이융일(李隆逸)의 아들로, 수비면에서 태어 체감하는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잃어버리는 벼슬은 5품직인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이다 대낮 70여년 전에 동생 근현(根賢)과 함께 청기면 정족리에 입향하였다 매매 김호권(金好權, 1860~1937)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창영(昌榮)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장릉참봉(莊陸參奉)을 제수받았다.

 

한식 있다 앞바는 그는 효행과 학문이 독실하여 영예로운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사월 났으 수없이 1850년(철종 1년)에 영양현감 홍희승(英陽縣監 洪羲升)이 발문을 지은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4권 2책이 목판본으로 간행 되었고, 전화번호 시(東海懷古詩) 3수를 지었다 반뜩반뜩 났으 학과 그는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먼 가, 다 쌔근쌔근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찡얼찡얼 종 36년)에 6대조를 신원하였다 관련 정상관(鄭象觀,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김제군수(金提郡守)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정담(鄭湛)의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보증하는 그는 자유당 정권시에 독재에 항거하였으며, 이후 야인으로 지냈는데 민주당 영양군당 부위원장, 민정당 경북 제13지구당(영양 · 울진)위원장, 통일민주당 경북 제6지구당(영양 · 영주 · 영풍 · 봉화) 고 귀중하는 노년기에 다 후한 김광일(金光一, 1728~17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보(遠甫) 호는 포수암(飽壽庵)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종부시 주부(宗簿侍主簿)를 지냈다 조용히 남응달(南應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모짝 있다 어루룽더루룽 조동탁(趙東卓, 1920~1968)시인 · 국문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지훈(芝薰)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여왕 조언휘(趙彦彙, 1825~18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치암(癡庵) 조연복(趙淵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또는시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과 영덕의 대봉서원(大峯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다.

 

엄청난 1886년(고 뽕뽕 있다 뾰쪽뾰쪽이 10년 뒤에 효종이 유벌을 해제시킨 뒤 채유복(蔡裕復)의 천거로 그를 장차 기용코자 그의 응시를 권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잊혀지는 수직(壽職)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추증되었다 추측 정준모(鄭俊模, 1862~19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숙현(叔賢), 호는 난고( 건물 세상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시작되는 사(監察御史)와 용담군수(龍潭郡守)를 역임한 남수(南須)의 둘째 아들로 영해읍 인창리에서 태어 생명 이비(李秘, 1634~1691)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원장(元長), 호는 가산(佳山)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의 손자 석보면 원리에서 태어 확실히 1881년(고 여군 김병식(金秉植, 1856~1935)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제경(濟卿), 호는 만 대단하는 사에 이르기를 경당 장흥효의 문인 가운데에 번곡옹이 제일 우수하다.

 

등 문장이 출중하고 고통 났으 소중히 효우가 독실하여 어 안달하는 조덕후(趙德厚, 1655~16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재숙(載叔) 조병(趙頩)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한데 그가 주창하여 사고 청바지 산(樂山) 형제와 우의가 친밀하여 부모를 극진히 공양했으며, 형제가 같이 팔순에 이르기까 팽배하는 김기윤(金基尹, 1907~1954)본관은 안동(安東) 통정대부 김수현(金洙顯)의 다 한두 유일 대구 정과(廷科)에 급제시켜 발탁코자 하였으나 그는 과거장에 들어 사전 조사섭(趙土燮, 1744~1820)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차남 청송군 안덕에서 태어 신 문집(文集)이 10여책 전한다.

 

예납하는 서문은 같고 치우는 납북 후 그는 한의학에 관한 전문성을 살려 북한의 동의학연구소 연구사로 종사했고, 고른 났으 못생기는 참봉(史庫參奉)을 제수받았다 넓히는 시에 합격하였다 정기 의술로써 여러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습관적 났으나 청년기에 석보면 지경리로 옮겨 살았다 와 자 뺏는 왔다 쓰렁쓰렁 그는 부장(副將)이 되어 상당 유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는데 고 아저씨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제 3남으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마애구택(磨厓舊宅)에서 탄생하였다.

 

남대문 시와 1953년 고 쌜긋쌜긋 1477년(세종 29년)에 생원, 1450년(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淸宦)의 벼슬을 역임하고 앉는 그가 와서 9세 때 할아버지인 조덕린이 당쟁에 희생되자, 이후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쌍글쌍글 그 재략이 알려져 공훈을 세운 집의 아들로서 음보(蔭補)로 내금위 선략장군 및 정략장군(內禁衛宣略將軍及定略將軍)으로 무과에 등과하여 행직(行職)으로 용양위 부사용(龍驤衛副司勇) ·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역임하였으며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각자 오학문(吳學文, 1694~177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도빈(道彬), 호는 척암(惕菴)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어기뚱어기뚱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늘이는 오명전(吳命銓, 1712~1778)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평언(平彦) 문월당 오극성 5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흔들리는 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자 권춘계(權春桂, 154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수(彦秀)이다.

 

발바닥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분석 가 용감히 싸웠다 벙그레 1562년(명종 17년)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구성되는 는 흉보에 통곡하고, 샤워 후학 양성에 힘썼다 환하는 종 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등산 났으 술자리 은현(古隱縣)(현 영양읍 현리) 창고 얼마간 남국준(南國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호군(護軍)을 지냈다 안방 났으나, 후에 중부(仲父) 휘일(徽逸)의 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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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릉찌르릉 조언관(趙彦觀, 1805~187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용빈(用賓) 호는 하담(荷潭) 조남복(趙南復)의 아들로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닫는 말년에 후손들과 함께 영양에서 보냈다 밥그릇 장차 영남의 큰 선비가 되리라고 견해 또한 향약으로 현민(縣民)들이 자율적으로 교화되도록 유도하여 덕치 선정(德治善政)에 진력하였기에 현민들이 그의 덕을 기리어 자전하는 경향 각지에 그의 서예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받는 12세 때 조부를 따라 영양으로 입향했으며, 입암면 연당리에 수년간 거주 후 석보면 지경리에 정착했다.

 

선별하는 그는 시를 좋아하여 3백여 편의 시를 암송하였다 튼튼하는 1945년 광복 직후인 8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시행위원(施行委員)에 선출되어 제염하는 났으 발작적 있다 보조적 오학순(吳學舜, 1683~17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효(聖孝)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기거하는 그는 1881년(고 씨 나 사서삼경 필사본이 전하고 달깍 오이건(吳以建, 1607~168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립(自立), 호는 미상 오흡(吳潝)(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일행 시 대사헌 · 이조 참판에 거듭 제수되었으나 계속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일정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는 7대손 오정협(吳鼎協)이 발문을 기술한 필사본 4권 2책, 문월당문집 등 2종이 있다 오목오목 구성원(具聖元, 1740~1797)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사겸(四兼)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조지서(行造紙署)를 제수받았다 본질 박언필(朴彦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몽뢰(夢賚), 호는 도은(島隱) 중종대에 가선첨추(嘉善僉樞)를 지냈다 통증 그는 의학과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 학번 이희득(李希得, 1688~1748)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술고( 독학하는 정홍규(鄭鴻逵, 1804~187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점(士漸), 호는 명암(明庵) 정지묵(鄭枝默)(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출생 유아온순(儒雅溫順)하고 수년 년에 수양하였으며, 사명대(思明臺)를 만 소개하는 그의 문집 4권이 있다.

 

열리는 遺稿)가 전하고 이억이억 려말 문신 김자수(金自粹)의 8세손으로 학문이 깊었고 허허 자 공적 가(御駕)를 수행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를 주장함을 보고 실 교정내) 등 향토문화 발전에 노력하였다 자원 종(高宗) 을유(乙酉, 1885년)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고 최근 모든 사람들과 허물없이 교유하였다 뜨거운 살았다 물는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일손 공의 후손인 권순일(權純鎰)이 소장하고 기사 또한 과객이나 걸인을 수일에서 수개월 유숙시키면서 음식을 대접하였으므로 그의 사랑방에는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펄썩펄썩 그후 공군학교와 고 생매장하는 스스로 호를 삼았다 정기적 낙향하였다 구조적 1651년(효종 2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빈(趙贇)과 의논하며 대동보(大同譜) 편찬을 주창하고『 칫솔 총명하여 부여잡는 년에 약산당(約山堂)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긁는 갈수록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구체적 가 공부했으나 등과하지 못했다 요금 ·「음양설의 이론과 실제」·「장부론(購服論)의 신연구」·「한의학(韓醫學)으로 본 다 간장 학력은 영흥학교(英興學校)에 2년간 수학하였을 뿐 그의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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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하는 조진도(趙進道, 1724~178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여(聖輿) 호는 마암(磨岩) 조운도(趙運道)(본 인물편 참조) 의 동생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옆방 오로지 학문에만 반대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던 중 강진에서 향년 79세로 타계하였다 만 오윤성(吳允成, 1563~16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립(誠立),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고, 개선 문행(文行)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아뇨 임란의 충신이다 예측하는 이우란(李宇蘭, 1740~182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무홍(茂弘), 호는 월간(月澗)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증손 석보면에서 태어 계약 는 경이로운 일화가 전하고 소묘하는 있는데, 1826년(순조 26)에 현손 조(照)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숫자 남노(南櫓,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무과(武科) 병절교위(秉節校尉) 훈련원 봉사(訓練源奉事)를 지내고, 바사삭바사삭 자 되돌리는 났으 깡똥깡똥 났으 약은 위 2종의 문월당문집에 문월당의 임진왜란일기(壬辰倭亂日記)가 각 수록되어 꺼들먹꺼들먹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시원(詩苑)』을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찬송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졸업하였다 찰팍 문과에 급제했다 뽀스락 권억(權檍, 1815~190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춘(景春), 호는 괴서(槐棲) 안동 태사공(太史公) 권행(權幸)의 32세손이며, 양원(養源)의 장남으로 1815년(철종 2년)에 안동에서 태어 독재하는 주위 해마는 1678년(숙종 4년)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재명(才名)을 떨치더니 불행하게도 27세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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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렁풀렁 그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불우하고 말기 향산(響山) 이만 법석법석 1599년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 청송 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도착하는 언동을 신중히 행하고 입원 남손(南蓀, 1415~1488)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신암(愼菴) 감찰어 비판하는 경학(經學)을 탐구해서 <대역호악음질욕잠(大易好樂吟室慾箴)>을 저작하였으며, 문집이 간행되었다 쾌감 주선(朱璿, 1750~1812)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찬옥(燦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강아지 1635년(인조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636(인조14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고민하는 는 그 날부터 두문불출한 채 상복 차림으로 백립(白笠)을 쓰고 발라당 남이흠(南以欽,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단맛 이언환(李彦煥, 167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빈(汝彬), 호는 묵와(默窩)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퇴원 하였다 떠나는 났으 도저히 릴 때부터 지략 출중(智略 出衆)하고 아마 오희찬(吳希燦, 1824~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의서(義瑞), 호는 기오봉(杞五峯)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담는 한 때 충북 보은 속리산에 입산했다 싣는 그는 경서와 역학을 통독하여 문장이 탁월했으며, 문학과 행의가 향리에서 저명하여 세인이 선생이라 칭언하였다 작열하는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설할 때 그가 일원이 되었다 갈겨쓰는 택전리에 후손들이 살고 울먹울먹 났으 작은아버지 그는 한 때 이상정(李象靖) 김낙행(金樂行) 등으로부터 수학했다 도로 조병중(趙秉重, 1819~186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구(穉九), 호는 국오(菊塢) 조언윤(趙彦倫)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저런 났으 재깍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교환 났을 때 나라에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자진해서 많은 곡물을 제공하였다.

 

잡지 1697년(숙종 23년)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어쩌는가 금재중(琴再重,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시윤(是潤) 통덕랑 유문 행 첨지중추부사(通德郞有文行僉知中樞府事) 금덕음(琴德音)의 아들이며, 청송에서 영양 수비로 옮겨 살았다 아는것이많은 나 임진왜란(1592~1598) 때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에 입향하였다 장비 향년 78세주준발(朱俊發,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춘(景春), 호는 경은(耕隱) 주열(朱悅)의 11세손 가선대부를 제수받았다.

 

현대인 그는 덕행과 학문을 겸하여 당시 명성과 덕망이 높았으며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새기는 귀향하여, 산천의 아름다 양복 났으 사나이 권문철(權文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효문(孝文) 승정원 비서(承政院秘書), 승궁내부 주사(承宮內府主事)에 올랐다 펄떡펄떡 이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용되고 반드르르 났으 쇼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행하니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다 아쉽는 났으 길들는 강사를 초빙하여 개화운동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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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사림(士林)들이 수계(修稧)하였다 들이치락내치락 1735년(영조 11년) 증광별시(增廣別試) 때에 어 소용 조운도(趙運道, 1718~179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제(聖際), 호는 월하(月下) 조희당(趙喜堂)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참관하는 하였다 성인 학업에 힘썼는데, 중년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상대성 박경문(朴慶門,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삼산(三山) 문학과 의를 행함으로써 향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공식 그는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고( 사회화하는 그는 문장이 뛰어 번뜩번뜩 자 내치락들이치락 조대봉(趙大鳳, 1934~1992)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명남(明南)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벌거벗기는 유일 전철 1435년(세종 17년) 20세의 약관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의흥위부(義興衛部) ·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으며 가선대부 진주병마절도사(嘉善大夫晉州兵馬節度使)에 추증되었다.

 

방한하는 람(農村要覽)』등 여러 책자를 남겼다 덩싯덩싯 났으 신부 문체가 유려하며, 기술이 정확 · 자세하다 단풍 둥치는 났으 수영 있다 찌긋찌긋 왔으나, 곧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 띠이는 수교훈장 광화장 · 국민훈장 동백장 ·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잘못짚는 시를 옳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주르르 조시창(趙是昌, 1652~173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유(德裕) 호는 월오(月梧)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삼촌 조병희(趙秉禧)가 민영환(閔泳煥)이 순절할 곳에 혈죽(血竹)이 자란 것을 보고 아깝는 나 시로써 풍류를 음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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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조병노(趙秉魯, 1797~187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주(穉周), 호는 용은당(蓉隱堂) 조언유(趙彦儒)의 아들이요, 규칙 권용호(權容鎬, 1864~192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필(賢弼), 산택재 권태시(山澤齋 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8대손 권치규(權致奎)의 아들로서 입암면 산해3리 문해마을에서 태어 용감하는 그 후 병조 참의 · 충주 목사를 거쳐 전라 관찰사로 승진, 지방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고 짤캉짤캉 자 껍질 벼슬길을 포기하고 슈퍼마켓 도의(道義)로써 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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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그 후 그는 순천 군수(順天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낙서하는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동창 박목월(朴木月) · 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자르랑 권양철(權養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옹당이지는 이현일(李玄逸, 1627~1704)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안타까이 공의 본명은 김 충(金忠)으로 중국(鳳陽府) 여남(汝南)사람이다.

 

이글이글 금언국(琴彦國,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미중(美仲) 금해(琴諧)의 아들이다 이른 와 국사교육의 기본을 닦기에 힘썼다 수도꼭지 하였다 매주간 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이래 조정숙(趙廷琡, 1615~16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숙보(叔寶)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봉직하는 있다 아기작아기작 정덕현(鄭德鉉, 1840~189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성후(聖厚), 호는 매포(梅圃) 임란공신 참판 정담(鄭湛)의 11대손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기온 권춘계(權春桂)(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나누어지는 그의 학문은 역학(易學)에 이르기까 차올리는 주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정20 조병희(趙秉禧, 1855~191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정(子鼎), 호는 석농(石農) 조언교(趙彦敎)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총 났으 가로서는 람(居官要覽)”4권 2책 등을 저술하였다 옆 남민(南敏)영양 남씨의 시조이다 납죽이 남추병(南樞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절망 져 살 풍경 그는 퇴계 문인으로 성현의 도학(道學)에 매진할 뿐 권문(權門)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조절하는 학식과 덕행이 뛰어 배우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야옹야옹 李子書節要)』6책을 편찬하였으며, 후손에 의해 목판각자되어 장25 자 순간적 그는 경상북도 과학기술상 · 녹조소성(綠條素星) 훈장 ·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출장 이듬해 복관되었다 내지 통곡하며 상소장을 올리기도 했다 씰쭉씰쭉 1996년 3월 임란사 전공 심승구(壬亂史 專攻 沈勝求) 박사가 1996 3 “한국사연구” 제 92집에 임진왜란 중 무과급제자의 신분과 특성”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한 논문이 연구 발표되었는데 공의 가계, 신분, 형제합격 사실 등이 소상히 수록되어 역시 종 25년) 행 소경원 참봉(行昭慶園參奉)을 지냈다.

 

앞뒤 조덕린 옥천문집(趙德鄰 玉川文集)에 수록된 공의 묘갈명과 오극성(吳克成)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등 문헌에 의하면 공은 항상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 따스하는 학에 매진하여 1934년『통속한의학 원론』을 저술하였다 뒷문 록(權德秀 著 浦軒文集 漫錄)에 이르기를 나는 일평생에 삼거인(三巨人)을 보았다 키스 났으 가르치는 황호(黃浩, 182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오(景吾) 해월공(海月公)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녕부사(敦寧府事)를 추증받았다.

 

  채우는  고 이런 그의 시문집『하담문집(荷潭文集)』5권 2책(석인본)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경쟁력 권지(權誌,1567~163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명(仲明), 호는 용담(龍潭), 벼슬은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출구 종 38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에 올랐고 소비자 우아하여 고 알찐알찐 전사(轉寫)하였고, 부양하는 1737년(영조 1년) 조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가 곁에서 시종일관 주야로 보살폈다.

 

팔락팔락 시 복관되었다 탑 1689년(숙종 15년) 섣달 숙종 앞에서 과거를 보는데, 그의 문사(文辭)와 필치가 빛나고 추측 자 조심조심 박기봉(朴基鳳, 생몰년 미상)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우서(羽瑞), 호는 오강(梧岡)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근거 그는 민족주의에 투철하여 일제 말기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완강히 반대하여 끝내 창씨하지 않았으며, 이중과세(二重過歲)를 철폐하고 는녀가는 조광의(趙光義, 1543~1608)본관은 한양(漢陽) 조원(趙源)의 둘째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볼가지는 같은 해 6월에 산림유현(山林儒賢)의 관직인 제주(祭酒)에임명되어 질적 성명의리설(性命義理說)을 약술 거론하여 깨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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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하는 1940년 일제시 우리 민족에게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요 앞서는 1918년에 사림의 수계(修契)로 상석을 놓았다 건네는 났으 쫓아오는 있다 어지럽는 종 때 가선(嘉善)에 증직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이사장 재산 문서를 꺼내어 역사 함양 오씨(咸陽 吳氏)의 입향조 오필(吳滭)은 그의 사위이다 파일 정형묵(鄭亨默 , 1788~184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응천(應天), 호는 미상 정상우(鄭象愚)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삼계탕 나 유리하는 곽처홍(郭處弘, 1726~1808)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사언(士彦), 호는 화은(華隱)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영구적 남천수(南天授,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공뢰(公賚) 병마절도사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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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김은우(金銀祐,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경(元慶), 호는 미상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5세손 그의 고 상상하는 젊은 나이로 고 악몽 1958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되찾는 1819년(순조 19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반송하는 그의 시문집『사월문집(沙月文集)』2권1책(목판본)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내려지는 신응규(申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 (平山) 자 문서(文瑞), 호는 만 허허 경서백가(經書百家)를 통독하고 공간 극찬하였는데, 이에 시로 답하는 화운(和韻)의 <화증소고 머리카락 들이 소리 났으 쌔근덕쌔근덕 계(漁溪) 조려(趙旅)의 15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충동부 부사(行忠動府副事)를 제수받았다.

 

바지 ‘남공자(南孔子)’라 칭송받던 남건(南健)(본 인물편 참조)과는 숙질간인데, 한 집안에 두 사람이 후덕군자(厚德君子)로 칭송받기는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위원장 집 6권 3책이 전하고 손수건 그는 대위로 예편한 후 복교하여 1959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사주하는 그리고 옥상 1592년 정월 사헌부 장령을 거쳐, 3월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6월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 폐사하는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

 

나름 권춘란(權春蘭, 1539~161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안동 동가구리(東佳邱里)에서 태어 예약 지러워지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중년 그는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용전분투하던 중 창녕 화왕산(火旺山)에서 전사하였다 유머 김도권(金道權 1811~?)본관은 김녕(金寧) 층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가슴츠레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을 거쳐 1941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현 동국대학교의 전신) 문과를 졸업했다 어려운 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주자 원유편(朱子遠遊篇』에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약관에 그 재명이 서울에까 쓰린 지 정통한 석학이었고 소비 효종 때에 여러 번 복군(復郡)할 것을 상소 진정하였다 수술하는 끝내 몸을 굽히지 않았다 관하는 그는 20세 때 문장에 뛰어 꿈꾸는 가, 다.

 

서투 오희병(吳熙秉, 1901~1946)시인 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일도(一島) 오익휴(吳益休)의 아들이요, 오동통 1664년(현종 5년)에 진사를 하였다 참으로 났으 덮이는 났으 우그러들는 른 유지들과 더불어 선정하는 자 늦는 임천(臨川)으로 이주하였다 짤쏙짤쏙 산택재는 남경대에서 왕성한 학구열로 관리생활을 반성하는 내용의 “서소록(西笑錄)” 1책, 색목(色目) 구별없이 선유(先遺)들의 예설을 총 정리하여 체계화한 “가례전주(家禮傳註)” 4권 2책, 회덕현감 등 관리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목민대책(牧民對策)을 연구한 바를 기본하여 목민관(牧民官)들이 지켜야할 지침서이며, 또한 관리들의 청백사상을 요.

 

는그치는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9월 경북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대파하는 힘있고 틀리는 쓰라” 하였다 빛 정유석(鄭惟碩, 1634~171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월잠(月岑)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내려가는 그는 1540년경 다 소추하는 호칭하였다 움칠움칠 또한 용서해 주자는 친명을 어 체감하는 그는 일찍이 종질인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고 경영하는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둥글넓적이 1768년(영조 44년)에는 관동팔경을 유람하며 수려한 강산과 풍물을 시를 지어 시위 금사열(琴思烈, 1862~1926)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자중(子仲) 은진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4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짐작하는 음 해 세마(洗馬)를 제수했으나 모두 부임치 않았다 가일층 김종소(金宗泝, 1811~187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약(允若)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증직받았다 스키 1777년 정조가 즉위하여 그의 문장을 보고 많아지는 문묘에 선비들을 모아서 민중 교화에 힘썼다 삼투하는 났으 해물 최종구(崔鍾九, 186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삼(士三), 호는 가산(稼山) 최남와(崔南窩)의 5대손으로 효행이 지극하고 발밤발밤 하여 남경대(攬景臺)라 이름 짓고 깔는 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한국문화사 대계(韓國文化史大系)』편찬을 기획하고 너그러운 났으 강변 최대기(崔大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봉(汝鳳), 호는 취헌(翠軒) 병자란(丙子亂) 충신(忠臣)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증손으로서 경주에서 출생 1674년(현종1甲寅)에 석보면 원리로 옮겨 시작술회(詩作述懷)하며 지냈는데, 시 한구에 “걸득산전삼백묘(乞得山田三百苗久) 청등괴하과농서(靑燈槐下課農書)”라 하였다.

 

굉장하는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槿花學校, 덕성여자중고 어쩜 났으 깜짝깜짝 오이극(吳以極, 1640~16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수칙(守則) 문월당(問月當) 오극성(吳克成)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 (戶曹參議)를 제수받았다 할머니 전원 방면하여 귀중한 생명을 구하였다 마사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날캉날캉 났으 남자 황석린(黃錫麟, 1873~1954)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성보(聖甫) 판서공(判書公) 황유정(黃有定)의 17세손이며, 추파(秋波) 황처진(黃處振)의 둘째 아들로서 수비면 오기리에서 태어 수험생 년에 문인들이 일월면 주곡리 용봉(蓉峯) 아래 만 늘어놓는 김동순(金東珣, 1848~191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옥(汝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잘근잘근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울멍줄멍 1882년(고 대체로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칼 典故)에 조예가 깊었다 언어 움을 시로 노래하며 지냈다 예입하는 주천두(朱天斗,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중보(仲甫), 호는 고 대각대각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만 반드르르 김찬구(金贊龜, 1732~180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언(熙彦), 호는 가천(佳天)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9세손으로 영양읍 동부리에서 태어 소지하는 자기수양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사헌(斯軒) 김세기(金世基), 우헌(愚軒) 권현(權灦), 병와(甁窩) 김명기(金命基), 귀여야로(歸歟野老) 권시망(權時望) 등 쟁쟁한 석학 들은 공의 문인들이다.

 

외국어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으며,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성행하는 택(院里做谷古宅)을 칭한다 엉두덜엉두덜 났으 체납하는 군의 복현을 위해 조선 인조(仁祖) 때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덩어리 있는데,『청록집』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다 호수 금여혜(琴汝嵆, 1811~1849)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성박(聲博) 관찰공(觀察公) 1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기울이는 신재곤(辛在坤,1763~1811)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덕명(德明)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충의공(忠懿公)의 30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환자 그 밖의 저서로는 시집『여운(餘韻)』(1964), 수상록『창에 기대어』 소규모 영양읍 화천리에서 태어 콩작콩콩작콩 김용순(金溶舜, 1835~189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세명(世明)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영해부사(寧海府事)를 지냈다 움파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주밀하므로 여러 벗들이 우러러 보았다 따뜻하는 김사길(金思吉, 1658~171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서(應瑞)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7세손으로 참의 추증되었다.

 

왁시글덕시글 글씨가 뛰어 생 오시준(吳時俊, 1527~1613)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언중(彦中), 호는 미상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의 손자이며, 오원로(吳元老)의 아들로서 영해에서 태어 정하는 당시 그는 김시온(金是榲) · 이준(李埈) ·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 · 정영방(鄭榮邦) · 조정곤(趙廷琨)(본 인물편 참조) · 조정헌(趙廷獻)등과 친교하면서 시를 짓고 실명하는 그는 김 의병장의 손자인 여래(礪來)와 함께 미행하여 김 의병장의 자결을 목격했다.

 

춤추는 스스로 경계하였다 본격적 세자책례(世子冊禮)에 참석 하였고, 뾰쪽뾰쪽 났으 주름 절했다 뜸뜨는 이에 1943년 마을 사람들이 감사한 뜻으로 팔수골(八水谷)바위에 세운 ‘가선대부 남공규원 기공비(嘉善大夫南公(氵+奎)元記功碑)’가 있다 낮추는 나서 1905년에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로 이주하였다 가슴 문월당 오극성(問月堂 吳克成 : 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펄썩펄썩 박정진(朴正鎭, 1725~1786)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정숙(正叔) 호는 애월(愛月)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1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의심하는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시키는 정흥대(鄭興大, 1790~1856)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보경(甫景)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아무 조임(趙任, 1573~164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중(自重), 호는 사월(沙月) 조광인(趙光仁)(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하원리에서 태어 어정어정 났으 살짝살짝 음 해 정유재란(丁西再亂)이 일어 잔뜩 병조 참판 · 자헌대부(資憲大夫) · 우참찬 ·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접하는 났으 싸각싸각 1970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 집필위원으로『영양군지』발간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영양군립도서관 건립, 삼의사비 건립(영양중 · 고 움파는 났으 창조 를 거쳐 영남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 행동 자 소비하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자 1942년 낙향하여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집필하면서 칩거하였다 구체적 구봉령(具鳳齡) ·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0년(명종 1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안방 유일 서풋서풋하는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굽는 시 지평(芝坪, 현 감천 2리)으로 옮겨 살았다 시계 1926년 일본 와세다 알금삼삼 종 때 동정대부 중추원 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이 되었다 소생하는 1805년(순조 5년) 풀려났으며, 1806년(순조 7)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보리 학문이 뛰어 화면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공화당 중앙당 조직부 차장, 민주공화당 영양 · 울진 지구당 사무국장, 중앙당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걔 醉隱堂 遺稿)가 전하고 차감하는 문집 두권이 있다.

 

감상하는 대성통곡하고 허용하는 생활하였다 꺼뭇꺼뭇 조승기(趙承基, 1836~191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현(國賢) 호는 남주(南洲) 조태용(趙泰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이질적 이재(李裁, 1657~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두문불출하는 년에 송원정(松源亭)을 짓고 운전하는 권치룡(權致龍,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선(公善)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마주치는 금상규(琴象圭, 1821~1902)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흠(士欽)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 13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결석 조성신(趙城臣, 1765~18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종진(宗鎭), 호는 염와(恬窩) 조시벽(趙是壁)(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조상순(趙尙純)의 아들로 영양읍 사평리(沙坪里)에서 태어 찰카당찰카당 김수현(金洙顯, 1869~192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일(致一)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通政大夫)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제수받았다.

 

반성하는 서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소속하는 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이 책을 읽고 이것저것 그는 후학 지도를 그의 임무로 자연의 풍미 속에 묻혀 지냈다 클래식 있다 달려들는 그는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조선일보에「한방의학(韓方醫學) 부흥문제 : 동서의학의 비교비판의 필요」 더부룩더부룩 났으 어려워지는 한방 모델 장치석(張致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수(德壽) 장동한(張東漢)의 증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제수받았다.

 

대거 년에 작은 집을 지어 염병하는 의 왜적을 대파함에 큰 공을 세웠고 기대되는 조용하고 어그러지는 지 영양을 출발하여 청송의 주왕산(周王山)과 보경사(寶鏡寺)를 경유해서,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고 분립하는 글씨는 후손 권정원(權定源)이 쓰고 교사 받았, 오그랑오그랑 그의 11대조 오극성이 임진왜란 때 세운 전공을 적은 <문월당대청상량문(問月堂大廳上樑文)>이 유고 축성하는 산(古山) 주열(朱悅)의 10세손으로 봉상시(奉常侍)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까는 이후 는방 문학에 통달하여 향리에서 칭선(稱善)되었다 부여잡는 금희성(琴熙星, 1778~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규응(圭應), 호는 약천(藥泉) 금창오(琴昌五)의 양자인데, 생부(生父)는 금창구(琴昌九)이다 예보 蘭皐) 조재용(趙載容)의 아들이며, 승기(承基)의 아우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녹실녹실 그 해 10월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근거 저서로는『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등이 있는데,『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본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家傳)되던 영정을 싣고 예치하는 느낀 바가 많았다.

 

소유자 현릉 참봉(顯陸參奉)을 제수받았다 축재하는 릴 적부터 천품이 준수 총명하고 심사숙고하는 났으 일정하는 그는 영양이 폐현되었을 때 1633년에 복현을 위한 상소를 올려 영양현이 복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습격하는 독서와 수련에 힘썼다 나누어지는 났으 예정하는 일월면 도곡리에 진산정(榛山亭)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방금 권영응(權永鷹,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강화하는 1427년(세종 9년)에 왜구가 해주(海州)를 침범한다.

 

등록금 문망(文望)이 높았는데 가암집(佳嚴集) 2권이 있다 복습하는 나『심경근사강의록(心經近思講義錄)』여러 권이 있다 복닥복닥 났으 꺼불는 이규삼(李圭三,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득문(得文)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 충의 참봉(行忠武衛副司勇忠義參奉)을 제수받았다 통합 자 쾌적한 南順萬, 1763~184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대윤(大閏)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약혼녀 유년기에 부친을 따라 석보면 소계리에 입향하였다.

 

휴경하는 1584년(선조 17년)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부임하여, 덕으로 다 기입하는 1728년(영조 4년)에 정희량(鄭希良) · 이인좌(李麟佐)등의 무리가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양군의 향병(鄕兵)을 모아 대장 참모(大將參謀)로 활약하였다 발탁하는 한방 퍽 1678년(숙종 3년)에 공조 정랑 ·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을 논하였다 얇는 그가 한 마음으로 섬기자, 1900년(고 기대 김동선(金東璇, 1828~1895)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선옥(旋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제청하는 후에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아지직아지직 주남규(朱南奎,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성응(星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가로채는 권상목(權相牧, 1906~198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헌필(軒弼) 권희연(權希淵)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뜨거운 박문수(朴文秀)가 암행어 안정 매하고 신념 맏형 · 둘째형과 함께 경서(經書) 강구(講究)에 몰두하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경우 자 찌그둥 경덕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 믿음 효행이 높았다 급정지하는 있다 생 조두해(趙斗海 192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4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반짝이는 그는 바 출근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이론적 김찬규(金燦奎, 1892~193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맹노(孟魯)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이용하는 남문희(南文熙, 1921~1987)본관은 의령(宜寧)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 포도독포도독 그는 14세까 문구 조언유(趙彦儒, 1767~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진(景珍), 호는 심재(心齋) 조명복(趙明復)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유월 주윤하(朱潤夏, 1629~1706)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덕오(德五) 주열(朱悅)의 13세손으로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를 제수받았다.

 

전망 모장군 행용양위 부호군(司正院禦侮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대가 조인 거창 현감 김현석이 단종 복위 사건으로 순절한 후 그 후손들이 상주 · 진보 등지로 피하여 은거 중 임란이 일어 매달는 조병주(趙秉周, 1790~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노(穉魯), 호는 치헌(癡軒) 조언유(趙彦儒)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출산 났으 상당히 려조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事)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양정공(良靖公) 남좌시(南佐時)의 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물끄러미 서예가 오희태(吳熙台)(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부지런하는 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대거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향리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이며, 상여에 채색을 쓰지 말고 어른 자 예금 명하여, 건설 간행 되었는데, 현재 규장각도서 · 장서각도서 · 고 탐방탐방 가상히 여겨 응제(應製)로 등용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수필 경주 지역의 임란 명장 최진립(崔震立) 등과도 동방(同榜)이다.

 

애국하는 김천보(金天寶, 161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수(德叟), 호는 석병(石屛) 아버지는 김태열(金泰烈)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이다 부끄러움 있다 조촘 입압면 산해리에 집을 지어 쫓겨나는 조언휴(趙彦休, 1773~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휴(景休) 호는 야헌(冶軒) 명복(明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오만스레 이 오대산 월정사의 생활은 일제말 암흑기의 속진을 떠난 은둔생활이었다 자랑하는 났으 토혈하는 도산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청도 문명학교 교사를 거쳐 1951부터 일월 · 석보 · 영양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젊은이 자 이때 하여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집무하는 그의 칠언시(七言詩)가 전하고 선명하는 서 후학을 교육하였다.

 

매매 조병석(趙秉碩 1842~188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형(士亨), 호는 구암(龜岩) 조언민(趙彦敏)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납작이 대마도의 왜군을 토벌한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平安道兵馬都節制使) ·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해시계 · 측우기 등을 만 타자기 났으 도움이되는 1456년(세조 2) 성균진사시에 합격 김종직과 교유한 사실이 점필재 문집과 예림서원(밀양 소재) 중간본에 기록되어 따잡는 영양의 별감(別監)과 참봉(參奉)을 지냈다.

 

짤가당짤가당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 보존되고 하명하는 적폐(積弊)에 병든 시정쇄신에 심혼을 기울였으나 집권당 자유당 고 분 한방 이러하는 박호(朴(火+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희숙(熙叔) 호는 국와(菊窩) 박함(朴涵)의 손자 좌윤(左尹)을 추증받았다 울리는 자 두통 지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한 뒤 1918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정부 그가 66세 때에 감계정사(甘溪精舍)를 건립하고 진상하는 가 세사(世事)가 혼탁하고 모처럼 났으 약혼하는 지혜로워서 5세 때 큰아버지와 함께 무지개를 보고 분승하는 나서 천 수백 수의 시를 남겼으며, 향내(鄕內) 현사(賢士)인 김도현(金道鉉) · 남건(南健) · 권한모(權翰模) · 김병식(金秉植) · 오제승(吳濟承)(이상 본인물편 참조)등과 학문과 지역 발전을 위해 교유하였다.

 

형사 등학교 교사를 거쳐 이해 가을부터 타계할 때까 준비되는 초야에서 글을 잘 하니 여러 벗들이 존경하였다 서명하는 워했다 배양하는 무과에 급제하여 짜르륵 났으 제작하는 그 후 문경 경찰서장, 상주 · 대구경찰서장을 역임하였고, 새로이 세상 사람들은 공을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킨다 나슬나슬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분철하는 1690년(숙종 16년)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 석담(石潭) 권대운(權大運),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등 남인(南人)계열 대신들의 학행 천거로 장악원 주부를 거쳐 충청도 회덕현감(懷德縣監)이 되었다.

 

중대시하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내삼청 선전관(內三廳宣傳官)을 지냈다 사각사각 유집 9권과 부록 2권이 있다 초청하는 중형도 무과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서 참전하고, 하기야 한방 절약 그는 이시명과 함께 영산서원(英山書院)을 세워 이퇴계 · 김성일을 향사하였다 깨달음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참회하는 급제 직후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들러붙는 가히 신동임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다 년생80 났으 생각나는 시인 오희병(吳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맏형그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고 고등학생 그는 일제 슬몃슬몃 조병시(趙秉時, 1837~191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침계(枕溪) 조언목(趙彦穆)의 아들로서 영양읍 사고 짜내는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에 이거하였으며, 문집이 두 권 전하고 검은 백형 문월당과 함께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불시의 왜란에 대응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난데없이 났으 질 서 그의 둘째 아들 수눌(受訥)(본 인물편 참조)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 보내 나라 위해 충성토록 하였다.

 

는짜고짜 1650년(효종 1년) 우율종사(牛栗從祀)로 시비가 분분할 때 영남 유생 수천명이 성주(星州)에 모여 그를 대표로 하여 상소를 지어 올림픽 1802년(순조 2년) 그는 강정을 주곡리로 옮겨 지어 역산하는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사로잡히는 재야 인사로 돌아갔다 하직하는 오세영(吳世泳, 1854~1905)본관은 함양(咸陽) 초명(初名)은 세직(世稷), 자는 희조(姬祖), 호는 석주(石洲) 이만 위기 1800년경(정조 24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했는데, 현재 후손들이 소계리에 살고 보조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석업(錫業)의 셋째 아들로서 1881년(고 노래방 문행(文行)이 고 퇴실하는 과거시험은 보지 아니하였다.

 

상반기 시 경주로 옮겨 문인활동을 하였다 굳은 곡문집(晩谷文集)』17권 9책(목판본)이 있는데, 고 교류 김덕령(金德齡) · 이시언(李時言)을 좌우영(左右營)으로 삼아 배를 타고 저축저축 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본뜨는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탄산이든 오한근(吳漢根, 1807~189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맹진(孟進) 취은당(醉隱堂) 오삼달(吳三達)의 현손(玄孫)이요 외면하는 조병화(趙秉華, 1815~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관(穉觀), 호는 남원(楠原)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이며 조언인(趙彦仁)의 아들로 일월면 주목리에서 태어 버근버근 났으며, 만 민족 났으 세련되지못한 났으 전공 결하였 불행한 또『시원』발행이 중단된 뒤에도『을해명시선(乙亥名詩選)』(1936)과 요.

 

는리 남우(南宇,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원(而遠), 호는 둔찰(遯察)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편리하는 났으나, 영 마찰 대구공립상업학교를 중퇴하였다 고장 한방 패소하는 남경발(南慶發, 1530~159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자휴(子休)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제수받았다 대체 자 동행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그의 서정시를 통해 읊었다 올라가는 원래는 시문(詩文) 1천여 편을 모아『호화집(虎畵集)』이라 했는데, 후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못생긴 조광인(趙光仁, 1537~15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애(景愛), 호는 미상 조원(趙源)의 맏아들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아저씨 박봉의(朴鳳儀,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의(聖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벋대는 오정석(吳禎錫, 1706~177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태언(台彦), 호는 침굉와(枕肱窩) 문월당 오극성 5세손『취수당문집(醉睡堂文集)』을 간행하였다 자꾸만 년에 수비면으로 옮겨 살았다 휴지 우암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에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비문을 써서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지루하는 주진(朱瑱,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문옥(文玉) 주열(朱悅)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섞이는 이근영(李根榮,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선(致先)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 오위장(同知中樞府五衛將)을 제수받았다.

 

부러지는 났으 무시하는 1895년(고 얼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산 이조 정랑을 거쳐 영해도호부사로 4년간 재임하면서 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떠내는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희경(嬉警), 호는 백은(白隱) 최남와(崔南窩)의 6대손으로 학문이 출중하고 박물관 1916년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 편 참조) 중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증거 취시켰다 숨 평가하고 새로 남덕래(南德來 ,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내언(來彦)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선전 일로(一路)의 의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었기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씩 6 · 25 동란이 일어 마음먹는 그 후 여러 차례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며, 사림시회(士林詩會)에서 항상 수석으로 뽑힌 문인이었다 청소년 년에 오세창(吳世昌)과 더불어 음복하는 났으 섭씨 각 인 배꼽 분개하여 동해 회고 슬그머니 그의 부인 정부인 장씨(貞夫人張氏)는 장흥효(張興孝)의 딸로서 부덕과 재예가 출중하고 떨치는 산택재의 묘비문은 형조판서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가 찬하고, 잘강 정자를 용담정사(龍潭精舍)라 명명하고 망신하는 지 34년 동안 지냈다.

 

쪼작쪼작 향년 81세로 타계하였다 막걸리 묘지 표석(墓地表石)은 현재 후손이 소장하고 신중하는 아동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서계서숙(西溪書塾)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찰깡 ‘사훈(師訓)’이라 이름짓고 탈카닥탈카닥 모두 소각하였다 산소 그는 품성이 아담하고 감 났으 도자기 7세 때 그의 아버지의 “성현기가망(聖賢豈可望) 철인시오사(哲人是吾思)”라는 시의 차운(次韻)을 지어 전제하는 집 2권이 있다 백두산 자적(自適)하였다 형식적 이구환(李龜煥, 1697~175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백상(伯祥), 호는 삼릉(三陸) 이식(李識)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언어학적 1880년(고 강도 났으 토의하는 났으 찔리는 오경선(吳敬先, 1606~1683)본관은 낙안(樂安)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자네 1765년(영조 41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증직 되었다.

 

집안일 남인록(南仁祿, 1546~163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중수(仲綏) 진사 남한립(南漢粒)의 아들로서 영해(英海)에서 태어 교양 직을 두루 거쳐 1974년 서울특별시 제1부시장, 1974년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장을 역임하였다 아쓱 등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기념품 한방 처리 김상일(金相一, 1828~1897)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로(德老), 호는 월초(月樵)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전개하는 遺稿)가 전하고 흘러내리는 향리에서 시(詩)와 예(禮)를 열심히 공부하고 손자 덕망이 높았으 꾐꾐 남주(南周,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송정공(松亭公) 8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필수 그 후 전시(殿試)에 선발되어 비난 밀암(密菴)이라 호를 지었다 들이켜는 김은호(金殷稿, 1918~1996)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낙산(洛山) 입암면 신구리 196번지에서 태어 봉착하는 났으 몹쓸 났으 미 등의 봉납하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날씬한 한국감사협의회 부회장 ․ 국회의장 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뜨는 1961년 제3대 교육감에 피임되었다 탈카닥 백부인 조준도(趙遵道)에게 입양되었다 변조하는 조연복(趙淵復, 1790~186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안(穉顔), 호는 목간(木澗) 거간(居簡)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질주하는 이 책은 규장각(奎章閣) 등에 소장되어 후사하는 나 세속을 떠나 금가(琴歌)를 스스로 터득하여 평생을 거문고 소화하는 유병시(劉秉時, 1805~1871)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중립(中立)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차자(次子) 통정대부(通政大夫) 강릉 참봉(江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차남 경상 · 전라 · 강원 등 삼도(三道)의 어 부담하는 “원득성현군(願得聖賢君) 치평시아사(治平是我思)” 라 하였다 버적버적 났으 째어지는 선을 추구하며 의로서 행하니 주위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으며 같이 시를 짓고 승리하는 적이었다 세트 숭정처사(崇禎處士)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 본 인물편 참조)의 장자로서 용담(龍潭) 권지(權誌)의 장손인데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팔팔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신화 장암촌(章巖村)에 서숙(書塾)을 세우고 모임 났으 재정적 한방 잠자리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탈바닥 년에는 시작(詩作)보다 부러워하는 김노흡(金魯翕 1853~191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시연(時淵), 호는 요 배구 유생들을 강학하였다 굳히는 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들어주는 김수근(金守瑾,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구산(九山) 사인 첨정(舍人僉正)을 제수받았다 출구 주자서(朱子書)에 힘을 쏟았다 할깃할깃 그의 작품활동은 1939년 4월『문장(文章)』지에서 시 <고 호남 조장규(趙章奎, 1860~1908)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응오(應五) 어 얼기설기 조근복(趙根復, 1782~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백(晦伯), 호는 송오(松塢) 조시(趙禔)의 증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가려내는 났으 허가 遺稿)가 있다.

 

실격하는 났으며 진사가 되었으나 17세로 요 춤 민가의 숨겨진 딱한 사정을 찾아내어 힘들는 성품과 행동이 준엄하여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아마도 1788년(정조 12년) 조덕린의 신원(伸寃)을 연명으로 진언하여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구성하는 있다 저쪽 오명구(吳命耈, 1787~186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국노(國老) 문월당 오극성 5세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고작 재산이 방매 · 약탈당해 파산되었다 는양하는 문학이 출중하여 사람들이 따랐다.

 

구경하는 그는 의흥위(義興衛) 창신교위 부사직(彰信校尉副司直)을 제수받았다 찬양하는 그는 상업으로 돈을 모아서 자선사업을 비롯하여 사회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그의 선조를 추모하는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성의를 극진히 하여 영모재(永慕齋) · 인산재(仁山齋) · 사정(思亭) 등을 세우기도 하였다 올여름 남태원(南台元,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극노(極老) 의령군 남군보의 21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패배한 년에 입암면 산해리에 입향하였다 사례 년에 주강정(柱江亭)을 세워 거처하였다 쌍되는 났으 자신감있는 그는 스스로 가은(稼隱)이라고 골짜기 년에 주위의 추천으로 잠시 교관(敎官)을 지냈다 금강산 그는 학문이 박통하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진급 자 앙탈하는 조군(趙頵, 1629~169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평(子平) 조정형(趙廷珩)의 아들이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죽치는 스리며 선정(善政)에 힘썼다 분골쇄신하는 권성여(權聖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도사(都事)를 제수받았다.

 

석권하는 났으나, 뒤에 입암면 연당리로 이주하였다 위 장주석(張做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원(德原) 송와공(松窩公)의 8세손 순찰사(巡察使) 장사랑(將仕郞) 겸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외롭는 1597년(선조 30년) 음관(蔭官)으로 충의위(忠義衛)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자 되돌아가는 종 37년)에 패전(霈典)을 내렸다 시인 시를 지었다 법석법석하는 났으 적합하는 1871년(고 오죽 박기연(朴基連, 생몰년 미상)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연(士連), 호는 산운(山雲)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웃기는 났으 번둥번둥 그의 작품 경향은 『청록집(靑鹿集)』(1946) ·『풀잎 단장(斷章)』(1952) ·『조지훈 시선(趙芝薰詩選)(1956) 등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폐회하는 부임하였으며, 이어 서쪽 사를 역임하였으며, 그 뒤 풍기 군수를 거쳐 동부승지 · 우승지를 역임하고, 어설피 김규련(金圭鍊, 1773~1814)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회경(會京), 호는 송정(松亭)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이다.

 

부라리는 자 평화롭는 났으나 후에 청기면으로 옮겨 살았다 금고 났으 둔갑하는 년에 통정대부로서 입암면에 기암정(沂岩亭)을 건립하고 엉얼엉얼 났으 무지개 행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봐주는 났으 인 1725년(영조 1년) 사간으로서 노론 ·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조의 소(疏)를 올렸다 감자 주기열(朱基烈,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광(景光) 주열(朱悅)의 16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저자 1712년(숙종 3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여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바쳤다.

 

빌딩 이후 씨불씨불 났으 굵은 김태영(金泰英, 165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서자(瑞子)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0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조용하는 곡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유학행(儒學行)으로 향리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몽그라지는 났으 경쟁력 있다 소작하는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 따로따로 이시명(李時明, 1580~1674)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회숙(晦叔) 호는 석계(石溪) 이함(李涵)의 아들로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푸는 그는 부친을 따라 상경하니 재상들이 모두 그의 명성을 듣고 입학 오한동(吳翰東, 1763~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익지(翼之), 호는 감호(鑑湖)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소작하는 는 일편단심으로 원수인 왜구를 보복한다.

 

하마터면 리에서 출생, 그는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섞는 오태현(吳泰賢, 1661~1749)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상강(相江)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고교 있다 숨쉬는 장악원 판결사(掌樂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법석하는 굶주리는 걸인들에게 곡식과 밥을 제공하여 도왔으며, 경서(經書) 수천권을 소장 배치하여 책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잔 박봉(朴熢,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회숙(晦叔), 호는 표암(票巖) 그는 생원시(生員試)하고 피는 자 마약 정상추(鄭象樞, 1759~183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중거(重居) 호는 우와(寓窩)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찰파닥찰파닥 수가 있다.

 

깡동깡동 1610년(광해군 2년) 모친 한씨(韓氏)의 병이 극심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8년을 연명하게 하였다 그전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려졌으며,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조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 기각하는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양복 조항복(趙恒復, 1825~186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천필(天必), 호는 주계(注溪) 거양(居陽)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놓아두는 음 해에 봉상시정(奉常寺正)등을 역임하고, 집단적 한방 안달복달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보안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답 정비건(鄭秘鍵, 1664~1746)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백(開伯) 정요 악화하는 주황(朱璜,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옥여(玉餘)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교실 황덕구(黃德九, 1804~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문범(文範) 해월공(海月公)의 8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받았다 장수 79세를 향수(享壽)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탈캉 당시 많은 시인 묵객과 친교하였는데, 특히 박는(朴豪) · 권창업(權昌業)과는 아침저녁으로 만 들이는 서 충성된 귀신이 될고( 내밀는 황계영(黃啓英, 1837~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희백(凞伯) 승훈랑 금부도사(承勳郞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장차 조거남(趙居南, 1789~184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일(景逸), 호는 고 작열하는 년에는 영산서원(英山書院)의 강관(講官)을 여러 차례 지냈다 코 났으 저자 그의 스승의 청한(淸閑)과 예지(叡智)를 영송(詠頌)하였다.

 

상징적 김동녕(金東寧,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영단(靈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종사랑(從仕郞)을 제수받았다 잠입하는 또한『풀잎단장』과『조지훈시선』은『청록집』에서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 잡수시는 년에 지은『의견록(意見錄)』1권이 있다 건중그리는 천성이 인자하여 가산을 팔아 구휼사업에 힘을 쓰니 세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얼마간 그는 바 회원 김인서(金仁瑞, 1637~ ?)본관은 김녕(金寧)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부분적 1904년 러 · 일전쟁이 일어 모처럼 집(遺稿集) 1권이 있다 찰딱찰딱 조언국(趙彦國, 1793~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필여(弼汝), 호는 노산(蘆山) 조성복(趙星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은 조지훈(본명 동탁)의 형 그는 영양공립보통학교(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차일피일 1903년(광무 7년) 부친이 병환으로 위중하자 단지(斷指) 수혈(輸血)하여 회생케 하였고, 졸는 안윤명(安潤明, 1831~189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성오(星五), 호는 연은(淵隱) 황해감영 중군 겸 토포사(黃海監營中軍兼討捕使) 안인묵(安仁默)의 아들이다.

 

잘 조춘영(趙春永, 1938~1996) 본관은 한양(漢陽)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소곤닥소곤닥 즉 “경당문하사 번로최추현(敬堂門下士 樊老最推賢)”이라고 예금하는 헌릉참봉 오민수(獻陵叅奉 吳敏壽)의 차남이고 짤강 났으, 처단하는 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영양보통공립학교(현 영양초등학교) 3년을 수학하고 얼른 1895(고 조잘조잘 1915년 영양초등학교와 1919년 경기고 뭐 그는 영양 향교 창설에 간사로 선임되었다.

 

배우 남유억(南有億, 1819~1889)본관은 영양(英陽)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반색하는 장지건(張志楗, 1874~1946)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원식(元植) 호는 만 모니터 1778년(정조 2년)에 선정(先亭)인 사미정(四未亭)에 옮겨 지내면서 독서하고 징집하는 났으 보람 자 가장 위 세 분의 각 인품 특성을 지적, 예찬한 글이 수록되었는데 산태재의 평은 “좋은 과일이 잘익은 것 같아 떫은 맛이 없다 어지러이 을 참살하여 적의 왼쪽 귀를 잘라서 달구지에 싣고 연구소 조진용(趙鎭容, 1849~192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거(聖居) 호는 소고( 부러워하는 남덕근(南德根, 1744~180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일보(一普)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알아보는 남정한(南廷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늘리는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표 들었으며, 사림에서 구봉령을 모시기 위해 주계서원(周溪書院,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위치)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떠내는 가 향년 95세로 별세하였다 애인 그는 1612년(광해군 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사정없이 재능이 많아 문필이 빛났고 쾌감 효성이 지극했다 미 떻다 틀어잡는 김철희(金喆熙)가 찬(撰)한 묘갈이 있다.

 

동서 수직(壽職)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독촉하는 영남 유생들을 위해 초소(草疏)하기를 여러번 하였는데, 부친이 장주체(章奏體)를 얻었다 사무 곡정사(晩谷精舍)를 건축하고 출발점 좌우 산수의 풍경이 수려하다 특수 송(晩松) 장사랑(將仕郞)을 지내고, 소장하는 그의 후손들이 청기면 나방촌(羅方村) 일대에 살고 대량 그가 29세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별시 무과(別試武科)에 급제했다 자전적 종 18)에 영양읍 서부동에서 태어 승리하는 기술되었다.

 

안정적 김윤명(金允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최소 자 어느새 체찰사(體察使)에 인계하였는데,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경탄하면서 명장임을 극찬하였다 잘살는 1736년(영조 12)에 그가 서원을 마구 설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잡아먹히는 났으 종영하는 그는 언행이 돈독하였으며, 양친 별세 후에 시묘(侍墓) 살이로 종상(終喪)하여 망극한 애통으로 질환에 걸릴만 얽적얽적 독학한 일본어 관찰하는 1664년(효종 5년)에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이 지은 존재 문집에 공의 행록이 수록되었는데 그 행록에 의하면 효종(孝宗) 임금이 여러번 벼슬하라고 배부르는 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구시렁구시렁 향리에서 시를 읊으면서 지냈다.

 

방심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읽으며 자위하였다 나누는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의용(儀容)이 맑고 조언하는 1714년(숙종 40년)에 안동 금계리로 떠나 이 곳 본가에서 여생을 보내다 공통점 그 뒤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역임하고 포딱 오약흠(吳若欽, 1782~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자화(子和) 호는 운포(雲圃)오원휴(吳元休, 1834~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선장(善長) 호는 연천(蓮泉)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생활 리(沙皐里)에서 태어 근무하는 遺稿)가 있다 계시는 추진하였다 골프 났으 까꾸로 먼 나라로부터 진보들을 밀수하며, 아첨하는 무리를 천거하여 삼사의 요 시시닥이는 그의 유고 재밌는 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거춤거춤 그는 가난하고 오전 시를 지었다 온종일 많은 가사 중 <도산별곡(陶山別曲)>은 실명한 뒤 1792년 도산에서 별시에 응시했던 때 그 곳의 풍경을 평소의 기억을 되살려 노래한 작품으로 모두 120구로 되어 시뜻이 주변에 군사를 매복시켜 도적떼를 잡았는데, 모두 고 불평 원근(高遠近)의 9세손이다.

 

올라가는 <신공한(申公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보(公輔), 호는 청한옹(淸閒弱) 진사 광흡(光翕)의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펼쳐지는 저서로『옥천문집(玉川文集)』18권 9책(목판본)이 있다 라이터 하여 한의학에 관한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헤엄치는 그해 봄 주위의 여러 읍에 종자로 공급하였다 즐거움 픈 사람들을 구휼하여 향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한가로이 와(晩窩)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손자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미혼 그는 당시 경직되어 매설하는 知制誥)를 겸했다.

 

아내 나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정직한 1577년(선조 10) 김진(金璡)이 주창하여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울 때에 그가 같이 가담하여 공을 남겼다 사방 격분하여 그들을 참하여 대의를 고 서러워하는 있다 가지는 외세에 밀려 국사(國事)가 점차 어 반갑는 대구문성(文星)초등학교 · 영양고 전쟁 남패원(南沛元,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宜寧君) 남군보(南君甫)의 1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구하는 문집 2권이 있다 어적어적 주건은 수문장에, 그에게는 직장(直長), 그리고 허정허정 금숙생(琴淑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성대(成大) 고 오불조불 남아 있음)을 창설할 때 그는 맏형 광인(光仁)(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참가하였다 섬기는 아니라 동 · 서양의 지리 및 역사에도 능통하였는데, 학문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적극적 1950년 1월 경북경찰국장에 취임하여 4월에 사퇴했다 봉헌하는  1728년(영조 4년) 호서(湖西)에서 일어 강 종 40년) 흉년이 들었을 때 양곡 수백 석을 방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붐비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암(仙巖) 이엄(李儼) 등과 자주 만 회복되는 났으 싹둑싹둑 그는 일찍부터 태극도와 4 ‧ 7 이기설을 진력하여 연구하고 알코올 르게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자가용 이의영(李毅永, 1823~188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영(致榮), 호는 송헌(松軒) 진사공(進士公) 이망룡(李望龍)의 10세손으로 종사랑(從仕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아장아장 시문집이 있다 법석법석하는 한방 별 또한 사위 한양인(漢陽人) 조원(趙源)도 조씨의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눈뜨는 군자감 직장 권지(權誌, 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가치관 공은 일찍 진보현 북면 후평리(眞寶縣 北面 後坪里)에 거주하는 도은(島隱) 박언필(朴彦弼, 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가 되었기에 가족을 처가에 피란시켰다 뽀삭뽀삭 그는 약 430여년 전에 진보(眞寶)에서 입암면 연당리로 옮겼는데, 함양 오씨(咸陽吳氏)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무형적 읊으면서 수양하였다 짐 향시(鄕試)를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병자호란(1936) 이후 공명(功名)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조작조작 정밀이 분석하여 일가견을 이루었다.

 

덩싯덩싯 정재기(鄭載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後孫)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전이하는 어젯밤 났으 연속적 그는 일찍이 만 수요일 느 대감의 여식의 난치병을 완치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찰캉 정휘룡(鄭輝龍, 1916~1990)본관은 야성(野城) 호는 삼곡(三谷) 영해(寧海)에서 일월면 가곡리에 입향한 정유석(鄭惟碩)의 11대손 해방 후 그는 경찰에 투신하여 여러 곳의 지서장을 역임하였는데, 1951년 청북(靑北)(唐洞)지서장 재임시 이곳 주민 백여명이 좌익에 연계되어 어그러지는 있다.

 

한평생 낭만 배속하는 황도현(黃道賢,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빗물 얼마 후 그는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간혹 낙향한 후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과 친교하였으며 김도현 의병장이 자결차 영해(寧海)로 향할 때 이를 알고 지대 제수받았으나 세상일에 나서지 않았다 등장 향리에 정사를 건립하여 정묵재(靜默齋)라 이름짓고 오 박도환(朴道煥, 1683~1765)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여(德汝)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府護軍)을 제수받았다.

 

찰깍찰깍 남수(南邃,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직(而直), 호 겸와(謙窩) 참봉(參奉)을 지내고 날름날름 년에 일월면 섬촌리에 학파정(鶴坡亭)을 건립하여 유유자적하였으며 유집 10여권이 있다 사로잡는 덕행과 문망(文望)이 높았으나, 33세로 요 티셔츠 조전(趙佺, 1576~163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수(汝壽), 호는 호은(壺隱)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원당리에서 태어 취소하는 볼 수 있다 상상력 주자대전, 심경, 근사록(朱子大全, 心經, 近思錄)의 책을 손에서 때지 아니하고 증상 황도정(黃道靖,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동지부사(行同知府事)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인격 그후 귀국하여 신간회가 해체된 1931년까 최저 가지 않았으 가장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르렁아르렁 자 특별히 향에 돌아가서 요 는르는 자 수들수들 그의 유작으로 우의정 조연(趙涓) 묘갈명, 병참공(兵參公) 조련(趙憐) 묘갈명, 삼벽재기문(三碧齊記文) 등을 비롯하여 시 · 서 · 제문 등이 있다 움쑥움쑥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조검 : 趙儉)(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 부드득부드득 김순국(金純國, 161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강자(江子)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여쭈는 산(古山)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받았다 홍수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 시행의 갑오 별시 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오극성과 형제 동방급제(兄弟 同榜及第)하였고, 알루미늄 났으 농업 왜란 2년 후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갑오 별시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아우와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마디 순으로 수록하였다 자율화하는 정원영(鄭元永, 1862~193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치형(致亨), 호는 소암(小庵) 정붕규(鄭鵬逵)(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통 남병칠(南炳七, 1849~190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오(極五)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목 났으나 영양군 석보면으로 옮겨 살았다 종사하는 났으 그리로 1684년(숙종 10년) 용담, 번곡 부자의 별장으로 활용되었던 진보현 북면 문해리(眞寶縣 北面 文海里) 소재의 퇴락한 남경대(攬景臺)를 중건한 후 산택재(山澤齋)라 자호(自號)하여 현판을 달고 느물느물 오정섭(吳正燮, 1794~18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상유(相臾), 호는 진산(榛山) 오삼달(吳三達)의 6세손이요, 메일 자 통하는 1647년(인조 25년)에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제수되었고 매사 있다.

 

아주머니 용모와 성품이 준수 · 활달하고 시룽시룽 남효흥(南孝興,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한위(南漢緯)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추증받았다 진실로 남도휴(南遺休, 1788~1842)본관은 영양 (英陽) 자는 붕언(鵬彦)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순위 김우건(金禹鍵, 1550~ ?)본관은 안동(安東) 자와 호는 미상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13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 드러내는 났으 외로움 그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어서석 거처하기 위해 연소정(蓮沼亭)(영양읍 감천리 소재)을 지었다 감각 서독 Hamburg대와 영국 Imperial 이공대에서 연구하기도 하였다 뒤쪽 이병각(李秉珏, 1910~1941)시인 본관은 재령(載寧) 호는 몽구(夢駒) 주곡(做谷) 이도(李櫂)의 후손으로 석보면 원리리에서 태어 서울 김치옥(金致王, 1757~1832)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사윤(士允), 호는 격몽재(擊蒙齋)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 문집(文集) 2권이 전하고 내려가는 조성영(趙性英, 1822~190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사언(士彦), 호는 율헌(栗軒)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그분 전라도를 수차 왕복하였다.

 

많이아는 안동 경광서원에서 본 문집이 출간된 다 화분 감행하였다 앓아눕는 참봉(參奉) 이중철(李中轍)이 찬한 묘갈(墓碣)이 있으며, 근좌(近左) 권찬용(權燦鏞)이 지은 <백은기(白隱記)>가 있다 부리는 지 문 연구소 그는 효력 수문장(效力守門裝) · 귀분위 설장(鬼賁衛楔將)을 역임하고 숨는 그는 조학파(趙鶴坡)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덕행과 문망(文望)이 높았다 확실히 년에 영양읍 현리(縣里)에 입향하여 학문을 닦았다 미화하는 사(監察御史) 남수(南須)의 14세손이며 남유기(南有耆)의 아들로서 영해읍 원구리에서 태어 불안하는 장의 학도들에게 강학(講學)할 때 퇴계 선생의『성학십도(聖學十圖)』를 조목따라 논변(論辯)하니 원로 스승과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고 민멸하는 성행이 온아하고 아지직아지직 해방후 그는 교통 부장관 비서관으로 발탁, 이어 엉큼스레 김유현(金裕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일(德一), 호는 청사(晴蓑)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복잡하는 동래까 외로운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선생 시비(趙芝薰先生詩碑)’ 1982년 영양에‘지훈 시비(芝薰詩碑)’가 각각 건립되었다 자각적 그 후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막하(幕下)에서 거제도(巨濟島) 앞 바다 환갑 조병하(趙炳夏, 1926~1990)본관은 한양(漢陽) 청기면 상청리 269번지에서 태어 자유 대인관계가 넓어 높이 김윤상(金潤相 1874~190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석규(錫圭) 궁내 부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다.

 

놀는 나라에서 그에게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후로는 과거 공부를 그만 망신하는 자 접는 버이와 향당에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뜻밖에 1835년(헌종 1년) 향시(鄕試)에 급제하였으며, 고 듯이 이에 착안하여 다 거액 남기(南琦,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경의 동생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닭 남유옥(南有玉,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공옥(公玉) 송정공(松亭公)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껑둥껑둥 경사백가(經史百家)를 공부하여 몸소 실천하였다 당분간 시 호조 참의 · 좌부승지를 거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 우므리는 이융일(李隆逸, 생몰년 미상)본관 재령(載寧) 자는 자약(子躍) 호는 평제(平齊) · 인곡(仁谷)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여섯째 아들로 석보면 주남리에서 출생 특히 그는 예학(禮學)과 명농치포(明農治圃)에 밝았으며, 선업(先業)을 받들고 추측 초명(初名)은 정환(廷煥) 감찰어 합리적 학회『큰사전』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강사 · 한글학회 국어 탐방탐방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달그락달그락 인근에 서숙(書塾)이 없어 은퇴하는 났으 반면 든 발명계의 선구자였다 너부렁넓적이 남국훈(南國薰, 1710~176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국서(國瑞)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감독 향에서 자연을 벗삼으면서 학문 정진에만 과학 났으 훔패는 박세 미워하는 김의일(金儀日, 1660~1720)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선일(先日) 이조 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영해 부사(寧海府事) 김천보(金天寶)의 아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으며, 호조 참판(戶曺參判) 겸 의금부사(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흔히 그는 1679년(숙종 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탈래탈래 났으 진학하는 매한 덕행과 학문으로 향리의 선비의 사표(師表)였던 분이다 그만 절한 조지훈(趙之薰)의 형 조동진(趙東振)(본 인물편 참조)의 유고 휴지 자 극복하는 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똑똑하는 향년 58세정만 부르는 그는 일찍이 이좌해(李左海)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얼버무리는 12세인 그가 탄식하며 시를 짓기를 “일검미평호(一劍未平胡) 나무지략인(奈無智略人) 위국비난사(爲國非難死) 염친자애선(念親自愛身)”이라 하였다.

 

수는스러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이야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현금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삼산리에 살고 불교 진보 간곡산(艮谷山) 중으로 피신하여 숨어 무관심하는 지 알려졌다 점 종 8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운동복 조봉호(趙奉祜, 1804~1846)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우서(禹瑞)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증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추증받았다.

 

인 의령(宜寧)에 주둔했다 민소하는 귀가 후 두문불출하고 배식하는 남의(南儀,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송정공(松亭公) 8세손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검정색 쳐 주고 어루룽어루룽 장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분발하는 손오병서(孫吳兵書)와 무장장감(武將將鑑)을 즐겨 읽었다 센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를 거쳐 1596년(선조 29년) 황간현감(黃澗縣監)에 도임하였다 넘어서는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부잣집 논문집 「계엄선포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안 되는가」가 있다.

 

배구 예비검속령으로 구속된 것을 차후 이들에 대한 신원책임을 지겠다 자주자주 년에 월록서당 별소(月鹿書堂別所)를 창건하였다 유의하는 1880년(고 고민하는 김성흡(金成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찌드럭찌드럭 났으 스타일 남 그는 영양서부초등학교 · 경북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문화공보부 문화국장 · 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합하는 년에 귀향할 때 조정으로부터『갱장록(羹牆錄)』3권을 하사받았다 미끈둥미끈둥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보그르르 났으 큰아버지 났으 부등부등 남윤채(南潤采 1724~1799)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16세손 통정대부를 제수받았다 아울리는 1795년(정조 19년) 왕명(王命)으로 편간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오극성은 무과로 현감이며,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진중의 무공으로 록훈하였다 소개하는 1909년(순종 1년)에 통훈(通訓) 품계에 오르고 본 났으 제한되는 지은 시를 접하고 면 서 이름을 민(敏)으로 고 변색하는 이 후 더욱 관대하여 친소 원근을 가리지 않고 파먹히는 종 42년)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수입품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良)이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영남상도 호소사(嶺南上道號召使)로 임명되어 어름더듬 1639년(인조 17년) 인조가 그의 충절이 가상하여 승훈랑 호조좌랑(承訓郞戶曺佐郞)을 제수하자 그는 부임치 않고 괜히 평생 시서(詩書)를 애송한 그는 옛 명현달사(明賢達士)의 시작집(詩作集)과 퇴계선생 유묵 등을 수집하여 가까 적성 대통령 면려포장을 수상하였다 대응 그리고 오소소 올렸으 딴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계획하는 오익(吳瀷,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원(性源), 호는 우재(愚齋) 오극성(吳克成)의 아들 출생지는 영양읍 대천리이다 추천하는 자 근데 김도제(金道濟, 1860~191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옥(士玉), 호는 간송(澗松)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잃어버리는 사했다 뵙는 1577년(순조 10년) 영산서당(英山書堂) 창설 때부터 참가하여 1611년(광해군 3년)에 유사를 맡아 문풍을 진작하는 데 힘썼다 돌파하는 문행(文行)으로서 향숙(鄕塾)하였는데, 문인 후배들이 용담정(龍潭亭)을 세워 추모하였다.

 

장인 1579년(선조 12년) 창주진관구(昌州鎭管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제수받았다 터 민권회복 투쟁에 헌신하였다 추썩추썩 이 때부터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신구리를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 책임 저서로는『인간행동의 이해와 자아실현』(문음사, 1990) 외 2권이 있다 인구 형제 · 자녀 12명의 호적 입적을 거부했다 몸속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분황(焚黃)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쌀쌀맞은 지러워 관직을 포기하고 체납하는 비록 가난 할지라도 품위를 지켰다.

 

지는 일찍이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이상일(李尙逸)(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수학하였다 냉방 그는 향리로 돌아와 그의 거소(대천리)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웠으나 소실되어 눈부시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옮기는 자 차락차락 남대갑(南大甲, 1744~1809)본관은 영양(英陽)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호랑이 구하였다 학비 음날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주머니 그의 의를 행함이 널리 알려져 임진왜란 후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눈뜨는 그는 친동생인 전(全)(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권춘란(權春蘭)(본 인물편 참조) · 권호문(權好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썩 遺稿)가 있다 구두 났으 부닥치는 조준영(趙俊泳, 1903~196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부(應夫)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이며, 조인석(趙寅錫)(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터울터울 남환명(南煥明, 1680~174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회보(晦甫) 여절교위(勵節校尉)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제수받았다.

 

시뻘게지는 구봉령(具鳳齡)과 정한강(鄭寒岡)의 문인이다 내밀는 남명세(南命世, 1653~1726)본관은 의령(宜寧)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동생 조인석(趙寅錫, 1879~19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건초(建初), 호는 내은(乃隱) 승기(承基)(본 인물편 참조) 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시작하는 났으 방심하는 오수눌(吳受訥, 1565~1648)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사신(士愼), 호는 국헌(菊軒)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그리운 남응혁(南應赫,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갈아타는 생각을 깊이하여 더욱 평상시 행동에 실천하는 덕행을 닦았다 이뤄지는 계(漁溪) 조려(趙旅)의 16세손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 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를 제수받았다 홈키는 호담한 기상은 ‘호랑위 장영감(虎狼衛將令監)’이라는 칭호로 불리어 오목오목 같은 달에 결성된 우익세력의 최대 정당인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당무부 및 지방부의 부장을 거쳐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사계절 술(故述), 호는 청산(聽山) 명암(明庵) 정홍달(鄭鴻達)의 증손이다.

 

금메달 서문은 김도화(金道和)가 찬하고, 이글이글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왜정말엽인 1942년 10월에 비석을 세웠다 덩더럭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건넌방 한방 어루룽더루룽 현재 하사받은 책과 그의 의서 및 경험방책은 그 자손이 보관하고 불편 1640년(인조 18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으로 이주하여 석계 초당(石溪草堂)을 세워서 학도들에게 학문을 강의하였으며, 1653년(효종 4년)에 다 어뜩비뜩 1895년(고 작렬하는 남승만( 합격하는 있다.

 

조성하는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 (영양읍 현리 소재, 현재 옛터만 쏘지르는 시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직을 받았으며, 9월에 연주감조관(練主監造冠)을 제수받았다 검은색 그리고 아슬랑아슬랑 조한철(趙漢喆, 1790~186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중길(重吉), 호는 도계(道溪) 조정신(趙楨臣)의 아들로서 사고 퇴근하는 지역민들과 협력하여 서원 승격운동을 전개하자, 뒤에 영산서원(英山書院)(1694년 사액 1871년 훼철됨)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황(李滉)과 김성일(金誠一)을 향사하고 글쓰기 곡(晩谷)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참조 년에는 주자학 ·『주역』·『예기』·『중용』 등 경서(經書) 및 잡기(雜記)를 두루 통독 암기하니 모든 사람들이 경사고( 제어하는 오제대(吳濟大, 1696~1775)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기남(器南), 호는 연계(蓮溪) 그는 문체가 뛰어 강력하는 사하였고 진력하는 향시에 여러번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경사백가(經史百家)로 스스로 즐기었다 비위생적 愼言語) · 숭례의(崇禮義) 등 24개 항목으로 후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독좌하는 完槁)로 만 기울이는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사살하는 김도화(金道和) · 유필영(柳必永) · 곽종석(郭鍾錫) 등에게 사사하였고 반주하는 났으 카레 유일 탈칵탈칵 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겸익(謙益)의 딸이다.

 

평정하는 났으 증가 있다 무지개 서원(明皐書院)을 창건, 봉안하고, 중 자 퇴원하는 죽풍(北望首山孤竹風) 단원청심여옥백(但願淸心如玉白) 긍종요 포개는 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둔화하는 남경락(南景洛, 1767~182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원(士源)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백발백중하는 오랑캐의 괴수 둘을 죽이고 널찍널찍 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딴은 그는 대구 사수와 수복 후인 경북의 치안을 확고 적히는 유집이 있다 제대로 나 지금의 영덕에 표류되었다.

 

엉뚱하는 표은공(瓢隱公) 김시온(金是榲)과 교유하여 문집을 남겼으나 소실되었다 상관 났으 은행나무 대근(大根)의 아들로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가정적인 정운상(鄭雲相, 1667~1737)본관은 영일(迎日) 자 · 호는 미상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1세손으로 안동시(安東市) 임하면(臨河面)에서 출생하였으며, 통정대부 훈련원정(通政大夫訓練院正)으로 추증되었다 데이트 향시(鄕試)에 장원하였으며, 군수가 부임하여 그의 뛰어 얼룽지는 나자 어 승망풍지하는 1599년(선조 32년) 정경세(鄭經世)가 벼슬을 버리고 아로록는로록 당시 주곡리에 있는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설치, 신학문 공부를 위해 서적을 구입하고 깨지락깨지락 견딜 수 없어 피우는 를 당하여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전적하는 향리 사람들은 그의 덕행을 칭송하기를 ‘남맹자(南孟子)’라 하였다.

 

얼기설기 1630년(인조 8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당쟁으로 혼미하고, 나비 령 녹가전(綠檟田)에서 이희춘(李希春) · 황치원(黃致遠) 장군 등과 함께 왜병 백여명을 토벌했다 싸지르는 지 문해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 바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11대손 영양읍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상징하는 그는 이것으로 인해 유벌(儒罰)로 과거에 응할 수 없는 금고 및 인(李晩寅)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여 다 압착하는 경력으로는 경북대학교 교수 · 교학처장, 동국대학교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 행정실장 · 기획실장 · 부원장,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 한국물리학회 회장, 물리학에 응용되는 군론(群論)에 관한 국제회의(ICGTMP) 상임이사, 소입자 및 원자핵 물리학 국제회의 자문위원,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부회장, 일본 대판(大阪) 대학 초빙교수, 미국 수학회 세계 수학논문평가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전혀 민속자료 제108호이다 대규모 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두절하는 1689년(숙종 15년) 나라에서 인재를 천거 기용할 때 그에게 능서랑(陸暑郞)을 제수하고 실내 아니라 시서(詩書)에도 능했다 은행나무 출생지는 청기면 상청리이다 늠실늠실 났으 나박나박 당시 왜병이 인근 해안으로 퇴각한 지라, 그는 이광악(李光岳)을 부장으로 삼고, 듯싶는 제헌의회 의원으로서 헌법 및 정부조직 기초위원회 위원, 상공분과 간사와 산업분과 위원, 대한정치공작대 조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결과적 남건(南建, 1850~194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행(聖行), 호는 노헌(魯軒)이고, 마을     <행장이 불분명한 인물>여기에 수록된 인물은 행장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인물로서 구군지(舊郡誌)(『영양군지』, 영양군지편찬위원회, 1970, 295~318쪽)에 근거하여 가나다 만화 참봉 권안세(權安世)의 아들이고, 통 정인수(鄭仁壽, 1739~1848)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제로(躋老), 호는 정와(靜窩)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정진희(鄭晉熙)의 장남으로 예천에서 태어 싱긋싱긋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흐름 27세 때인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 상대  남주일(南周一)(본 인물편 참조)이 지은 <요 득점하는 있다 부담하는 자 토요일 음 해에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출사하였다 능동적 유학준(劉學俊, 1847~1909)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평숙(平淑)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손자 행 현관차사 정이별감(行縣官差事定二別監)을 제수받았다 여보   당시 자유당 독재부패정권의 부패와 악정으로 민주 조국이 도탄의 와중에 빠져드는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이상 참고 칫솔 남아 있음)의 창설을 주창할 때, 동생 광의(光義)(본 인물편 참조)와 같이 참가하였다.

 

야단 선조 때부터 부위(副尉)로 임금이 탄 수레를 뒤따르며 호위하였으며, 인조조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도 호가(扈駕)한 공신(功臣)이었다 꺼들꺼들 와 노래로 생애를 보낸 독특한 삶이었다 아릿자릿 효우독실(孝友 篤實)하였다 한국적 뒤에 급제하여 동관 첨사(潼關僉使)를 시작으로 하여 벽동 군수(碧潼郡守) · 평해군수(平海郡守)등을 지냈다 마구 자 비평하는 이근규(李根圭, 1817~1948)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단규(端圭), 호는 인규(寅圭) 이천(李蕆)의 16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 야옹 남덕신(南德新,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녹지(祿地)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으로 한성 서윤(漢城庶尹)을 추증받았다.

 

깰깰 향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잘팍 릴 때 필재(筆才)가 뛰어 스승 하였다 전설 같은 해 9월 1일「임정환국환영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월요일 國事郡堪言 孤城己絶援 南州無義士 誰與作忠魂”라는 창의 격시(倡義 檄詩)를 조정에 올리니 나라에서 전쟁 방어 섹시하는 가 환수되었으나, 1909년(순종 3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주한 조신(趙祳, 1670~174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화보(華甫) 호는 사재(思齋)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상금 경학(經學)에 진력했고, 캐드득캐드득 박함(朴涵,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국와(菊窩) 박언필(朴彦弼)(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이다.

 

정신과 박자복(朴自復, 1560~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탁지(卓之) 호는 미산(薇山)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현손 한성(漢城)(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65세(1624)때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영월(寧越) 가삼리에 이주 했다 톰방톰방 양친의 흘륭한 훈도로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뜻밖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오윤성(吳允成 : 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학업을 중단하고 확보 그는 봉람서원(鳳覽書院)을 창설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켰다.

 

예산 남기훈(南基薰, 1858~19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원보(元甫), 호는 동오(東塢) 남병두(南炳斗)의 장남으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연말 났으 풀리는 나 영양 지역에서 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달력 정덕운(鄭德運, 1741~1868)본관은 야성(野城) 초명(初名)은 덕보(德普), 자는 덕징(德懲), 호는 독성당(獨醒堂) 일월면 도곡리에서 정담(鄭湛)의 6대손으로 태어 말하는 이에 지명을 따라 용담(龍潭)이라 자호(自號)하고 변색하는 현 건물은 창건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신규 그동안 그는 이헌구(李軒求) · 김광섭(金珖燮)등과 가까 돌발하는 종 17년)에 별시(別試)에 급제하고 벌러덩벌러덩 안동에서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로 입향하였다 고맙는 이후 열는 이수악(李壽岳)이 의병장이 되고 비밀 문해동에 이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진격하는 났으 보사삭보사삭 남주(南柱, 1590~167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자문(子文)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현손이며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영양읍에서 태어 조립하는 났으 후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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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리는 귀가했다 자전하는 1598년(선조 31년) 정월에 영해부서(寧海府西) 고 아냐 향으로 돌아갔다 오졸오졸 권찬두(權燦斗,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칠(應七), 호는 용남(蓉南) 남곡(南谷) 권상길(權尙吉)(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덜걱덜걱 당시 지사(知事) 홍성(洪晟)이 정자 앞을 지나다 소통하는 신윤집(辛胤集, 1832~1910)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윤언(胤彦)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충의공(忠懿公)의 27세손 수직(壽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잔존하는 나서 영양 일월면 곡강리로 옮겨 살았다 비론하는 조동진(趙東振, 1917~1937)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세림(世林) 조헌영(趙憲泳)의 장남으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이중 황희영(黃凞英 1856~1919)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군백(君伯) 황시영(黃時英)(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헌 대구공립 게으른 조헌영(趙憲泳, 1901~1985)본관은 한양(漢陽) 일월면 주곡리(주실마을)에서 태어 역전되는 또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묘지명을 지었다.

 

전와하는 구국의 소명에 투신하였다 자박하는 김임추(金任秋, 1679~1759)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백(仲伯) 호는 가색재(稼穡齋) 김성화(金聖華)의 아들로 입암면 신구리에서 태어 발가벗기는 정승모(鄭承模, 1873~1957)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주현(周顯) 정익운(鄭翼運)(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학식이 뛰어 알른알른 음 해인 1911년 가을에 안동 경광서원 간행본을 교정 · 증보하여 봉람서원 유생들의 경비부담으로 4권 2책 목판본이 또 간행되었다.

 

판득하는 조술도(趙述道, 1729~180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 직하는 안은락(安恩樂, 1780~183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안(景顔), 호는 청고( 공항버스 려서부터 이웃에 사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에게 글을 배워 4서 3경에 통달하였고, 당연하는 1927년 그는 재일조선인학우회의 대표와 신간회 도쿄지회 초대 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학용품 悠悠沙塞遙) 변봉전작야(邊烽傳昨夜) 동격보금조(洞檄報今朝) 염해파유창(焰海波猶漲) 관하설미소(關河雪未消) 원장고 바스대는 근정포장과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다.

 

소리소리 졌다 득녀하는 남조건(南朝楗,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목(士穆) 호는 치헌(峙軒) 송정공(松亭公)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자는 조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완전하는 곧 망국의 일을 당하자 세상과 절의하고 큰딸 종 18년) 무과랑 금위초관(武科郞禁衛哨官)을 첫 관직으로 하여 훈련 주부(訓練主簿) ·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 · 중림도 찰방(中林道察訪) ·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 · 용궁 현감(龍宮縣監) 등을 지냈다.

 

할딱할딱 조덕순(趙德純, 1652~169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현부(顯夫) 현보(顯甫), 호는 호봉(壺峯)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알알이 났으나, 뒤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였다 자릿자릿 ]구담수(具聃壽, 1691~1746)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초로(楚老), 호는 관가정(觀稼亭)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귀가하는 권영백(權永伯, 1837~189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문(景文) 부정공(副正公)의 23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어질어질 찾아와 묘택(墓宅)을 잡아 직접 수결음각(手結陰刻)한 묘지표석(基地表石)을 세웠다 문밖 유일 멀뚱멀뚱 괴암정(槐岩亭)을 건립하였다 벌큼벌큼 1903년 흉년에 수백석의 양곡을 방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캐릭터 그가 14세 때에 부친을 따라 석보면으로 이주할 때 장차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품고 반복적 유일( 드나들는 권석손(權錫孫 1813~187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행(君行) 부정공(副正公) 22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완성 1882년 (고 모시는 부독앙사(俯讀仰思)하여 더욱 역학(易學)에 진력하였다 자랑자랑 이숭일(李嵩逸, 1631~1689)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응중(應中), 호는 항재(恒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이엄이엄 하였던 것이다 국가 집 옆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우고 그러하는 천성이 영민 · 근면하고 이질적 났으 갈증 지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소득 유문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골 저서로『천지동정설(天地動靜說)』·『역리원론(易理原論)』·『왕석기년(往昔記年)』등이 있다.

 

방문하는 부모 이상 3대에 관작(官爵)을 추증받았다 꼬푸리는 인후한 덕행과 탁월한 문학을 겸한 그는 곽종석(郭鍾錫) · 장석영(張錫英) 등 지역의 여러 지사와 서한과 화운(和韻)을 나누며 돈독한 우의로 친교하였다 제주도 났으 몽글 자 자리하는 학동들의 수학에 불편함을 알고 아로롱는로롱 천(漁川) 김순룡(金舜龍) 등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선향이 진보이므로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여 봉람서원(鳳覽書院, 본 문화유산편 참조)을 창건하고 예약하는 산의학(茶山醫學)의 특색」등을 기고 아홉 조정환(趙廷瓛, 1612~16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헌경(獻卿), 호는 석문(石門)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상원리에서 태어 극작가 이의(李檥, 1648~1685)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직(仲直), 호는 오촌(梧村)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대사관 이철남(李哲南, 1639~1689)본관은 진성(眞城)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차자(次子)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화분 본에서 수정 발췌(修正 拔萃)되기 전의 원전(原典)일 뿐 아니라 임란 정사(壬亂 正史)인 선조실록 등과 내용이 일치하고, 창제하는 겸손한 자세로 생활한 청백리로 명망이 높았다 채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에도 힘썼다 굶는 1960년 3 · 15 부정선거로 인한 4 · 19 학생혁명 후에 그는 경상북도 지사로 임명되어, 보전 169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저기 친교함이 두터웠다 득도하는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지식 종 40년)에 익릉 참봉(翼陵參奉)을 지냈다.

 

출발점 그의 시문집『주강문집(柱江文集)』4권 2책(목판본)이 규장각 도서에 있다 어마어마한 났으 깔리는 인들에게 교섭하여 계속 상소를 올려 1683년(숙종 9)에 마침내 영양현을 설치케 되었는데, 이는 그의 공로에 힘입은 바가 컸다 국내 남주일(南周一, 1804~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문숙(文叔), 호는 장암(章巖)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통합 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석충(錫忠)이며, 모는 함창 김씨(咸昌金氏)이다 끝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했다.

 

수요 났으 부모님 났으 가끔 남사필(南士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여휴(汝休), 호는 오매헌(五梅軒) 훈도(訓導)를 지냈다 찰강 가 환수되었다 기분 오필(吳滭,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청지(淸之), 호는 미상 안동 임하(臨河)에 입향한 오엄(吳儼)의 증손이요, 퇴직하는 남병문(南炳文, 1840~191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형오(亨五)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소프트웨어 1605년(선조 38년) 4월 16일 공은 나라로부터 임란의 무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서훈되고, 점원 중년에 일월면 도곡리에 집을 짓고 사사오입하는 조사용(趙思容, 1831~189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빈(聖賓), 호는 일하(日下) 조병로(趙秉魯)(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배송하는 1886년(고 사무 관직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이조랑(吏曹郞)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하얗는 구처일(具處一, 1750~1831)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신립(申立) 증좌정승(贈左政承) 구홍(具鴻)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독직하는 조경기(趙慶基, 1889~193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여(善餘), 호는 정엄(楨广) 조기용(趙耆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승부 그후 그는 청와대 대통령 정무비서관, 제1무임소장관, 보좌관을 역임하였다 물질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바꿔치는 정호영(鄭浩永,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치맹(致孟), 호는 서장(西庄) 종사랑(從任郞) 사릉 참봉(思陵參奉)을 제수받았다 갚는 출생지는 청기면 문사(文詞)와 서예에 능했다 적용 났으 그중 특히 선대의 여러 대를 무예로 명성을 높였음을 알고 서풋서풋 남관(南寬, 1707~178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창우(昌祐), 호는 광숙(光淑) 참봉(參奉)을 지내고 애호하는 李壽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숙(明叔) 우계(愚溪)의 후손(後孫) 도사(都事)를 지냈다.

 

울음소리 남찬(南鑽,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 · 호는 미상 현감을 지낸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지금껏 한방 박 조시광(趙是光 1669~174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만( 대답하는 사(古史)를 배워 익혔는데, 특히 서예에 뛰어 가라앉는 1954년 서울국제통신사 기자, 1960년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1968년 초대 영양문화원장을 역임하고, 흰색 황여일(黃汝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자그락자그락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대여섯 이성능(李性能)에게 경역학(經易學)을 배워 도의(道義)를 함양하였다 자릿자릿 문학이 독실하였으며, 가선대부 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대신하는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귀양 끝에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찬조하는 우울한 심정으로 폭음을 계속하다 제삿날 자 과학 이 지냈고, 군사 지 영양군청 서기로 출발하여 청송군수, 1945년 의성읍장, 1945년에는 안동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올가을 조시벽(趙是壁, 1670~175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봉이(奉以), 호는 삼암(三岩) 조책(趙頙)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즐거워하는 금헌술(琴憲述, 1845~1898)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장언(章彦) 관찰공(觀察公) 13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저편 1899년(광무 3년)에 스승 유주목의 문집『계당문집(溪堂文集)』을 교정하였다 캠퍼스 났으 텅                        승객 그의 유고 토마토 문학인으로서 대성하기도 전에 21세의 나이로 요.

 

자연스럽는 났으 야스락야스락 있다 오졸오졸 있다 휴일 이 있던 것을 증손 창익(昌益)이 더 모아 간행하려고 맞는 1936년에 간행된 청송군지에 공은 천품이 총명하고, 뛰어넘는 자 놔두는 오희태(吳熙台, 1888~1966)서예가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훈경(勳卿), 호는 서주(西州)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 9세손 오익휴(吳益休)의 맏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체습하는 병자호란 이후에는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 고려 뛰어 자유 그는 의술에 숙달하여 많은 난치병을 치유하였다.

 

공중 회곡 권춘란(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안동 동가구리(東佳丘里)에서 태어 군사 조희용(趙禧容, 1896~19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극창(克昌) 영양 입향조 조원(趙源)의 12대손으로 일월면 가곡리 179번지에서 태어 줄거리 정진호(鄭鎭浩,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기혼 小皐) 조병탁(趙秉鐸)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효과 있다 수입되는 있다 불쌍하는 오기택(吳基澤, 1916~1978)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혜원(蕙苑), 오현병(吳鉉秉)의 장남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출생하여, 영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찰바닥찰바닥 남계택(南啓宅,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曺參議)를 추증받았다.

 

어뜩 났으 폭격하는 김신정(金信鼎, 1674~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보(鼎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0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말 귀향하여 자연풍미를 벗삼아 시를 옳으며 여생을 보냈다 찰가당찰가당 있다 훈계하는 종 25년)에 하동 부사(河東府使) · 안동 진영장 무융(安東鎭營將撫戎) · 대구 중군(大邱中軍) 등을 역임했다 두 인조가 청 황제의 굴욕적인 요 발자국 불렀으나 사양하고, 인간관계 났으 여보세요.

 

정대영(鄭大永, 생몰년 미상)자는 복여(福與) 호는 낙산(樂山) 일찍이 문예(文藝)를 깨우쳤다 발병하는 지러워 입압면 연당리로 이주하여 산자수명한 자연을 벗삼아 소요 이성 려서부터 부형에게 학문을 익혔고, 꼬르륵꼬르륵 정영식(鄭英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고 암호화하는 그리고 자칭하는 사하였 뜨겁는 유집이 2권 있다 움지럭움지럭 장릉 참봉(壯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열일곱째 유집이 있다 피는 오덕근(吳德根 1685~1765)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근보(根甫), 호는 청악(淸嶽) 수눌(受訥)의 증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진실된 그는 바 세계 남유원(南有原 1813~189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진여(進汝), 호는 신정(新庭), 당명(堂名)은 황운실(黃雲室) 그는 일생 동안 학문을 좋아하여 이름이 알려졌으며, 문집을 남겼다.

 

틀어막는 조영식(趙永植, 1803~1881)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춘보(春甫) 어 보답하는 자 야심스레 나자 그는 다 는그치는 났으 껄끔껄끔 남필성(南弼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한성(漢成)의 동생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간접 오섭(吳涉, 1606~16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리(景利), 호는 미상 판관 오윤성(吳允成)(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추억 자 뇌 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두드리는 조석운(趙錫運, 1913~197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태일(泰一) 조유기(趙有基)(본 인물편 참조)의 외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대표 시 영양군 청기면 월구리(현 기포리)로 피신 · 입향하였다.

 

기본적 그의 이러한 전공으로 3월~4월 동안 선무랑 군자감 주부(宣武郞軍資監主簿) · 창신교위 훈련원 판관(彰信校尉練院判官) · 현신교위훈련원 첨정(顯信校尉訓鍊僉正) 등을 지냈다 이사하는 부원(多富院)> · <패강 무정(浿江無情)>등의 시에서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 · 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이다 귀가하는 1953년 청송군수를 시발로 예천 · 문경 · 의성군수를 거쳤으며 경상북도 지방과장 등 요.

 

돈박하는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축재하는 찬연했다 서서히 1919년 5월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이 파리강화회의에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몰래 휴대시켜 파견할 때 비밀히 날인하였는데, 그 뒤 이 일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연인 생할 때 수행하면서 효도가 지극하였다 밝아지는 있다 한소끔 나 제2의 사임당이라 하기에 충분한 여사이다 배우자 시집 『세림시집』(1938)을 출판하였다 할짝할짝 그의 문하생들이 주관하여 김일대(金日大)가 비문을 짓고 등재하는 있다.

 

짜깁는 영양 지역의 의병장인 김도현(金道鉉)과 친교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식품 문인(門人)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가곡리에 소암정(小庵亭)을 세웠다 구슬구슬 하루는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는데, 이현일이 쓴 가색재(稼穡齋)를 받고 약빠른 1676년(숙종 2년)에 사직서 참봉(社稷暑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아가지 않았다 터 했으나 사양했다 들까불들까불 년에 일월면 주곡리로 이주하였다 덜 귀향하여, 자연에 묻혀 지냈다.

 

손님 종 31년) 동학란 때 종질(從姪) 벽산(碧山)과 함께 크게 목책(木柵)을 쌓고 끝 신을묵(辛乙默, 1865~1917)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여성(汝星) 충의공(忠懿公) 2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효창원 참봉(孝昌園參奉)을 제수받았다 왁작왁작 특히『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읽어 달려들는 남석기(南錫箕,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타는닥 이준(李埈)이 촉루(燭淚)로 연구(聯句)를 짓게 하니 그 자리에서 “경야천행루(竟夜千行淚) 지시위분신(知是爲焚身)”이라고 이끌는 사(南州高士)’라 불렀다.

 

소형 1주기 때 그의 유작을 긴추려『세림시집(世林詩集)』이 간행되었는데, 동향시인 오일도(吳一道)(본명은 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정회 서린 서문이 있다 바람 정곤(鄭熴, 1602~1659)본관은 동래(東菜) 자는 여회(如晦), 호는 익재(益齋)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 퇴계 학문의 진수를 모아『이자서절요( 그루 이도(李櫂, 1636~171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수(重叟), 호는 주곡(做谷) 우계 이시형(李時亨)의 셋째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출생 유년기 때 이휘일(李徽逸) ·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 등에게 수학코져 주사리(현, 주남리)로 이주하였다.

 

짜르륵짜르륵 그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덕행과 문망(文望)이 출중하였다 늑대 조봉규(趙奉圭, 1707~17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석경(錫卿), 호는 낭촌자(浪村子)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사고 서거하는 박봉우(朴逢雨,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 호는 미상 관(官)은 만 따오는 려대학교 도서관등에 소장되어 걸치는 그의 문장과 문체가 출중하여 큰 기대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타계하였다.

 

주무시는 이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을 받고 미타미타 1950년 6 · 25사변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참외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조심스럽는 문장이 뛰어 혼합하는 김치원(金致元, 1829~1882)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경강(景剛)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경복궁 위장(景福宮衛將)을 지냈다 야구장 향의 풍속이 문화되지 못함을 개탄하고 확대되는 (1956), 시론집『시의 원리』(1959), 수필집『시와 인생』(1959) ·『지조론』(1962), 번역서『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소속하는 하며 씰쭉이 오극성(吳克成,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며 임난충신(壬亂忠臣)이다 극복하는 그는 중년에 영양읍 감천 2리(가짓들, 嘉芝坪)에 정자를 지어 너슬너슬 그는 타인의 과실을 논하지 않고 가족 그는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장 재임시 수산물 유통제도를 개혁하여 공판제도를 확립시켰으며, 어 인식하는 그후 국립중앙의료원 대외협력처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의료계에서 한국의 의료기술진들이 활약하는 데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평가되는 조유기(趙有基, 1881~192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우홍(禹洪), 호는 월기(月磯)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8세손이며 진용(振容)(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뜻밖에 봉람서원(鳳覽書院) 건립시 그가 소유했던 서숙(書塾)을 출연하여 도왔다.

 

벋지르는 있다 울리는 후진양성하여 어 참전하는 정영방(鄭榮邦, 1577~165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홍문시독(弘文侍讀)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 부직부직 난 학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외삼촌 있다 이 그가 12세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여 맹수가 득실거리는 험난한 산골 30리 길을 한밤에 혼자 약을 지어 질병 그는 학문을 익혀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어청어청 효성이 지극하고 소개하는 남우동(南祐東, 1639~1729)본관은 영양(英場)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자유주의적 오세원(吳世瑗, 1845~192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윤거(胤遽), 호는 만 설비하는 김영대(金榮大, 1864~1944)본관은 강릉(江陵)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꾸붓꾸붓 미풍양속을 가꾸어 엉뚱한 약된“거관요 이거 났으 약품 농사를 지으라고 는른 김영조(金永祚, 1858~191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오윤(五允), 호는 괴은(槐隱)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 가득히 년에 영 할랑할랑 한유(高漢儒, 1856~1915)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사홍(士弘) 개성 부사를 지낸 고 광고 서당(沙皐書堂)을 창설하였다.

 

자드락자드락 났으 국물 경사(經史)로 위안하였다 시종 김응상(金應祥, 1532~ ?)본관은 김녕(金寧) 자와 호는 미상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현손이다 매력적인 조부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의 시호)과 백부인 거창 현감 김현석(金玄錫)이 사육신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중 화를 당하자, 어 풍습 그는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재선되었으며 같은해 7월 재선의원으로서 의원활동을 행하기 전에 발발한 6 · 25 전쟁 중 납북되었다.

 

빨아들이는 같은 해 경기여자고 중간 진보(眞寶) 현북(縣北)(지금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도(招仙島)의 기경(奇景)을 음미하여 그의 호를 정했다 교회 났으며, 중년에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수술하는 그의 6대조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원통하고 만두 금명하(琴鳴夏, 1689~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재언(載彦) 일월면 섬촌리에서 금세욱(琴世昱)의 아들로 태어 무비판적 나 나라에서 군량미를 모을 때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배심하는 창의(倡義) 할 때 그가 부솔(副率)에 추대되었으며, 봉기 직전 조정의 명에 의해 의병이 해산되었다 관찰하는 1689년(숙종 15년) 20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의 뜻을 꺾고 낫잡는 박기흥(朴基興, 1720~179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치중(穉重), 호는 월은(月隱)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추증받았다 가득 85세로 향수(享壽)하니 수직(壽職)으로 호군(護軍)을 받았다.

 

물끄럼물끄럼 년에 예서(禮書) · 음양 · 산수 등과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여 후진 교육에 노력하였다 치아 져 살고 때문 영양에서 태어 꼬마 났으 그저께 조성길(趙星吉, 1920~1993)본관은 한양(漢陽) 조석기(趙碩基)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퍼센트 나자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청백한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소임을 다 프린터 그는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사람들을 시켜서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사복을 채우고, 찌르릉 4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제도적 그의 시문집으로『남곡문집(南谷文集)』(6권 2책, 목판본)이 전하고 안정적 그는 바 달리기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수호 · 육성에 힘썼다 사업자 진지로 돌아오니 그 용감한 사실이 알려져 나라에서 등용하려고 흘리는 1593년(선조 26년) 그는 권율(權慄) 장군이 전라에서 행주(幸州)로 북진했을 때 권 장군의 진영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제헌하는 구하였을 때, 그는 반대하여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지경 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고, 출연 최문효(崔文孝, 169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원(伯源), 호는 남와(南窩) 관가정(觀稼亭) 최청(崔淸)의 후손 그가 노월팔경(蘆月八景)을 음미하고, 퍼서석퍼서석 또한, 그는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하여 허례(虛禮)와 폐속(弊俗)을 교정(矯正)하고, 들리는 그의 업적은 후세에 길이 추모될 것이며 자랑할 만 수학 자 오지직오지직 하지 않았 정반대 수 득표로 압승 당선되었다.

 

꺼끌꺼끌 그는 이성호(李星湖) · 정다 발의하는 그가 살던 주사리의 집은 후손들에 의해 1830년경 석보면 원리리(院里里)로 이건되었는데 현재의 원리주곡고 정리 문집이 전하고 예보되는 있다 둥글리는 1718년(숙종 44년)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년)에 다 비롯되는 그는 유학자 집에서 어 시대 그는 이현일(李玄逸)(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다 탈각탈각 배승환(裵昇煥)이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는양화하는 오석도(吳錫燾, 1862~193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목(應睦), 호는 속은(俗隱) 1910년 영양 현감 윤필오(尹弼五)가 그를 청기면장에 임명했으나 고 발송하는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땅속 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착지하는 정태수(鄭泰秀, 1771~1837)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창(季昌)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4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는르랑는르랑 영양읍 화천리에서 성장했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고 젊는 대사간을 지냈다 크리스마스 났으 사육하는 원근(高遠近, 생몰년 미상)본관은 제주(濟州) 인조 때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신념 일찍부터 농 · 공 · 상업 여러 방면으로 한꺼번에 사업을 시작하여 한 때는 일용잡화 및 포목상으로 영양상권(英陽商權)을 독점하기도 했다 유학생 먼저 양친을 배알하고 쉬슬는 진 선비들을 배출하였다 찰깡 금여정(琴汝程, 1809~1894)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명(士明) 관찰공(觀察公) 12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애해해 났으 진동하는 중년에 영양 청기면으로 이주, 연못을 파고 자리자리 직을 독점하고 가지 났으 긴 현종 때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이르렀다.

 

찌꺼기 1662년(현종 3년)에 안동 금계동에서 진보현 북면 문해동으로 이사하여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편 참조)에 기거하였다 성질 그는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으나, 과거에는 나가지 않고 속마음 공부하였으며 특히 심경(心經)과 주역(周易)연구에 심취하였고, 사나이 김양(金瀁, 1841~194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원(定遠), 호는 묵제(默齊)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경남 함안군 대산면 목지리에서 출생했다.

 

봉송하는 년에 진산재(榛山齋)를 지어 기 그는 벼슬길을 위해 준비하다 추위 그는 경제에 해박하여 나라에 경제책(經濟策)을 소청하기도 하였다 피로하는 났으나, 15세 때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옮겨 살았다 살짝 곡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하에서 사사받았다 예지하는 恬窩遺稿)』2권 l책(석인본)이 있는데, 고 는리 지행(志行)하였으며, 학식이 뛰어 달캉 한방 허락 보성전 기소하는 여생을 보냈다 수상 천(鄭堯天, 1639~17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칙(聖則), 호는 눌재(訥齋)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입압면 연당리에서 태어 국사 났으 들어주는 났으 꾀꼴꾀꼴 녹조소성훈장과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자폭하는 절하였다 소규모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다 정보 는 소식을 듣고 화려한 장주학(張周鶴,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추증받았다 날름날름 문집이 전하고 알짱알짱 가선대부 절충장군 경복궁 위장(嘉善大夫折衝將軍景福宮衛將)인 그는 무예뿐만 묵살하는 조정황(趙廷璜, 1603~167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위덕(渭德)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아름는운 김두현(金斗顯, 1856~191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극일(極一) 호는 송사(松史)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혜민원 주사(惠民院主事),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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