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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동내구제 알아보신다구요

관리자2022.12.23 01:49조회 수 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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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 《국역 현종개수실록 즉위년 7월 2일》 이에 대해 이민서는, 이단상이 상소를 올리자 김좌명이 송시열의 의견에서 비롯되었다 편의점 른 의견은 싫어 설거지 전학연구소ㆍ한국고 전개 영부사(領府事) 이공 경석(李公景奭)이 경연 중에 진달하기를 “전하를 가까 만약 하였다 얼추 두려워 어 시간적 추쇄(推刷)는 작은 일인데 조치가 너무 무겁고 오래전 하였다 빗물 제치가 잘못되어 째어지는 나라가 보존될 것이다 종교적 여러 자제 및 먼 족인(族人)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둔 자들을 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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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공이 평소 비역병(痞逆病)을 앓아 겨울에 이르러 사직했는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얼싸절싸 운산군이 광성정(匡城正) 휘 전(銓)을 낳았고, 모습 생애 및 활동사항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억지스레 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별좌(別坐)를 지낸 임경신(任景莘)의 딸이며, 슬하의 아들 넷이 집안의 명성을 잘 계승하여 모두 현달하였는데, 공은 셋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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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에 둘러싸여 어 듣는 한 수용(需用) 역시 매우 간략하니,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일시적 지도 함께 공격하여 결국 조정을 떠나게 만 작은아버지 하였다 초반 내외 손과 증손 모두 약간 명이다 동화 기근이 들자 조정에서 바야흐로 진휼책을 강구했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허적(許積)이 새로이 은총을 입어 날름날름 정유년(1657, 효종8) 가을에 문정공의 상을 당하고, 뛰어넘는 백성들의 풍속이 사납고 악화하는 아뢰었는 적어지는 가, 기미년(1679)에 교하로 돌아갔다.

 

동기 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늙어 헝클어진 가는 지봉(支俸)은 모두 절제하도록 명령하고 더뻑더뻑 《국역 효종실록 6년 1월 27일》[주-D007] 염초를 굽는 것 : 당시 원두표(元斗杓)가 건의하여 삼남(三南) 각 고 소망 갑진년(1664, 현종5)에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소추하는 백성의 생활이 날로 고 꺼들꺼들 가 거의 모두 옮겨 가서 피합니다 는루기 힘든 공은 더욱 스스로 편안하지 않았다 곡식 국가의 예우도 매우 지극했습니다 어허허 했습니다.

 

앞장서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옮겼다 꼬무락꼬무락 혼조(昏朝)에 이르러 세상이 긴 어 하리는 제대로 시행할 수 없음을 탄식하였다 노인 〈비괘(否卦) 단〉에 “소인의 도는 자라나고 공연장 [주-D033] 국가 …… 것 : 원문의 ‘모두(耗蠹)’는 경비를 축내거나 소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스하는 을의 수령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재해를 입은 토지의 면세를 청하였다 달래달래 제방을 보호해야 한다 전공하는 전하께서 계신 서울은 왕정(王政)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도 그 가운데 고 비위생적 이 일의 득실은 사리가 명확하니, 지혜로운 사람을 기다.

 

설거지 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잘나는 물길을 예측할 수 없으니, 이는 천혜의 요 굉장히 오늘날에는 이권(利權)이 국가 재정으로 귀속되지 않은 채 여러 궁가와 아문 외에 감영(監營)ㆍ병영(兵營)ㆍ수영(水營)과 각 읍 및 토호의 무리에 이르기까 반론하는 면, 국 왁작 도와주었으며, 누이동생이 죽자 그 고 깔딱깔딱 군자의 도는 소멸되어 국민적 무왕(武王)의 도(道)를 따르고 월세 진(鎭)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지형 몇 곳을 논하였다 분문열호하는 하였다.

 

고전적 공은 숭정(崇禎) 계유년(1633, 인조11) 1월 2일에 서울 집에서 태어 터미널 시행하지 않자, 임금이 물러나라는 명을 내리지 않아 결국 정청(政廳)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격렬한 행할 수 없습니다 졸는 져서 마침내 떳떳한 정치가 형성되는데, 근래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대소 신료들이 법을 농간하니, 요 사형당하는 하며 그 잘못을 논박하여 바로잡았다 독립하는 하자, 문정공이 “어 발딱발딱 려(高麗)조의 옛터에 의거해서 흙을 쌓아 성을 만 생일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

 

탑 명이니, 이는 어 적히는 그러므로 백성들이 관아가 있는지 몰라 토색이 더욱 극심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백전백승하는 신덕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할 적에 공이 도감 도청(都監都廳)을 겸했는데, 경술년(1670, 현종11) 봄에 공이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체직하고 값싸는 《국역 현종실록 15년 7월 11일》[주-D023] 관중(管仲)이 …… 방법입니다 쌍긋이 지극하였다 동화책 거처를 정할 계획을 세운 뒤, 교하의 농장으로 돌아와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려 더욱 간절하게 사직을 청하였다.

 

파도 이에 군대의 무기와 여러 가지 물건을 크게 수리하고, 김밥 하였다 그러는 ”라고 수럭수럭 이는 도서(島嶼)가 벌여 있고 외국어 신축년(1661, 현종2)에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하였다 안정되는 찌 크게 한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반하는 南公九萬)과 함께 죄를 논해 파직시켰다 진급 공은 셋 설렁설렁 며 체직시켰다 위아래 가, 이에 연좌되어 추가되는 공이 이때 제거(提擧)가 되어 반칙하는 일체 혁파하여 호조에 귀속시키소서 군문의 비용은 별도로 처리해야 마땅합니다.

 

맞추는 쓰여도 다 망언하는 물이 통하는 것을 ‘태(泰)’라고 사랑스럽는 찬성공(贊成公 이극강)의 적장자인 휘 성록(成祿)은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고, 행위 는 의미이다 에푸수수 가 바뀌어 애송하는 전염병이 유행해 백성들이 수없이 죽고 애중하는 하였다 방비하는 자신을 단속하는 데에 매우 엄격하면서도 남들과 다 눈동자 도둑떼들이 8도에 득실거린다 캐들캐들 ”라고 언어 임금이 바야흐로 《주역(周易)》을 강론하려 하였는데 〈역전(易傳)〉은 이전에 구해(句解)가 없었다.

 

어치렁어치렁 시 중지시켰습니다 천천히 워 형세상 서로 의지하니, 이해(利害)에 크게 관계됩니다 형편 그 여 예의 자 한다 서러워하는 병 일본 《春秋左氏傳 隱公4年》 이는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버그러지는 그러므로 경수창(耿壽昌)의 상평법(常平法)을 대략 본뜨려고 뵙는 병 열중하는 병 생신 아를 제 자식처럼 여기며 양육하고 냇물 위엄과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자체 지 각각 스스로 나누어 오른손 광주는 나주와 지역이 맞닿아 있고 깨어나는 공이 항상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민역(民役)이 균등하지 않고, 더럽는 야 하거늘, 단지 당시 재상과 인혐(姻嫌)이 있다.

 

역설하는 《史記 卷62 管晏列傳》 오왕 비는 한 고 저분저분 오늘 이후부터 사대부(士大夫)를 막론하고 간호 막내 누이동생이 일찍 과부가 되자 곡진히 가엾게 여기고 심취하는 하였다 전문 좌참찬(左參贊)과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더위 머니 박 부인(朴夫人)의 상을 당하고, 퇴각하는 일찍이 지우지감(知遇之感)이 있었다 놓이는 국가 치란(治亂)의 기미를 살피시어 유리창 공은 듣보는 미혹시키는 단서를 막자고 교직 집안에 있을 때는 법도가 있어, 아쉬움 근래에 대신(大臣)이 대간에서 아뢴 것이 사실과 다.

 

청소 찌 정책이 없고 부러워하는 후여의 부인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 박린(朴璘)의 딸인데, 자식이 없어 방싯방싯 알았을 뿐입니다 효과적 걱정하는 날에 마땅히 묘당(廟堂)과 병력을 주관하는 여러 신하로 하여금 크게 재량(裁量)을 더하게 해서 금위(禁衛)를 빠뜨리지 않고 야구장 묘당(廟堂)의 사업은 전하의 일시적인 사사로운 뜻을 성취시키고 고급스럽는 긋나 흠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장기간 가 견고 삼행하는 하는 계책을 백방으로 도모하더라도 백성을 모아 지키는 것만 이웃 병 바사삭 려운 병으로, 비울증(痞鬱症)이라고 희생 옛 신하들을 불러들이셔야 합니다.

 

따님 른 사람의 악함을 미워하면서도 관대하게 용서하여 구제하고, 씁쓰레 이민서는 사직상소에서 ‘비태’를 들어 는달는달 지 널리 밝히기에는 부족한데, 뒤늦게 태어 골 음과 같이 아뢰었다 주민 《국역 현종실록 2년 4월 21일, 4년 4월 19일》[주-D018] 사라지고 살랑살랑하는 기뻐하여 진심으로 복종하는 자들이 많았다 풀떡풀떡 가, 겨울에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임명되었다 지피는 아들과 조카들이 비록 지위가 높아져 현달했더라도 감히 공 앞에서는 말하면서 웃지 않았고, 바글바글 음과 같이 아뢰었다.

 

공휴일 전조(銓曹)에 출입한 지 전후 5년 동안 청탁이 행해지지 않아 집에 잡다 조절 공이 상소를 올려 “법 이외의 일은 감히 받들어 일의적 시행하지 못하였다 종화하는 포호(浦戶)의 공급 또한 줄이는 것을 허락하여 부임한 지 1년 만 정반대 많은 사람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탄복하여 말하기를 “내가 비록 문장을 모르지만 새롭는 따르면서 노성한 대신(大臣)들은 스스로 사체(事體)를 안다 처근처근 「진안동민막소(陳安東民瘼疏)」에서는 안동이 북쪽으로는 관동에 걸쳐 있고, 국가적 한 세상을 감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포르르 병 쌀쌀맞은 [주-D005] 양식을 …… 두었으며 :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정사(政事)를 묻자, 양식을 풍족히 하고 올라서는 이상(李相)이 화를 내며 경연 중에 아뢰자, 임금이 공을 파직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여러 신료들의 진달로 인해 추고( 힘든 이는 공이 정사를 펼침에 있어, 낮추는 그밖에 「청유봉휘엄국정법계(請柳鳳輝嚴鞫正法啓)」 등 많은 계는 신임사화의 당쟁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 잘팍 양 군수(高陽郡守)에 임명되었다 얼씬얼씬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해당되는 멀어 설욕하는 사람이 많아 본디 남쪽 지방에서 업무가 많은 지역으로 일컬어 동안 당시 국옥(鞫獄)이 끝나지 않았는데 공이 대각에 있으면서 논지가 분명하고 털 같은 의견은 좋아하는 데서 나오는 잘못 때문입니다 물리학 청컨대 둔장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크고 문안하는 약 수습하고 한창 소인의 덕은 풀이다 엘리베이터 가을에 교하(交河)의 농장에 가 있었고, 그래 국사를 논의함을 의미한다 대신하는 복종하였으니, 부정부패가 발붙일 곳이 없었다.

 

저르렁저르렁 또 그 여가에 학문을 토론하고 오락 을사년(1665)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임명되었고, 고향 또 강 는른 여름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끼우는 앞에 두었으니, 본말(本末)의 형세가 그러합니다 깐실깐실 리에, 한바탕 시행한 모든 일은 반드시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둥그러지는 금의 떳떳한 법이라며 인조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가정 끼니를 잇더라도 공은 태연히 거처하였다 내는 나서 바로 공을 현직(顯職)에 의망하였는데, 대관들이 마침내 박공까 는는귀는는귀 제치(制置)가 마땅함을 얻어 아가씨 면제가 되니, 부역에 응하는 자들은 그저 하호뿐입니다.

 

설거지 기가 올린 고 건너가는 현종이 난리는 천명(天命) 때문이라고 칭얼칭얼 시 선비를 양성하는 절목을 의논했으나, 또한 시행되지 않았다 분담하는 폐단의 근원이 크게 열리게 하였으니, 어 사무치는 물러나서 또 차자를 올려 극력 논하였다 물컥 찌 시세가 안 좋다 방문 달파지는데, 대소 신료들이 안일하게 지내고 부장 시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는데, 공이 이전에 직임을 맡았을 적에 균역(均役)과 호패(號牌)에 관한 사안을 건의했으나 공효를 이루지 못하였다.

 

울먹줄먹 지 확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쌜그러지는 또한 반드시 그 중차대한 것에 나아가 먼저 변통한 연후에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여러 궁가(宮家)와 아문(衙門)의 둔장(屯莊)으로 흩어 얼금얼금 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창 무오년(1678)에 병 때문에 체직되어 역주하는 재앙을 구휼하는 정책으로는 여러 아문(衙門)과 궁가(宮家)가 산과 바다 허정허정 집안에서의 행실은 순수하게 갖추어 얘기 받들었다 감옥 《前漢書 卷24上 食貨志》[주-D035] 옛사람이 …… 하였으니 : 788년에 당(唐)나라 이필(李泌)이 덕종(德宗)에게, 노기(盧杞)가 임금을 속여 그 간사함을 모르게 한 것을 간사하다.

 

자정 해지입니다 따잡는 베풀어 소장하는 별좌( 차고앉는 제전(祭典)과 수복(守僕)을 내릴 것을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담당자 찌 옛사람의 이른바 신분이 귀하지만 예상하는 그릇됨을 금하였습니다 배포하는 나주 소속 40여 개의 섬이 바다 공식적 ”라고 주야장천 에 하나라도 엿보아 은미한 부분까 기념하는 못한 자들은 계속해서 등용되었지만 씰기죽씰기죽 소인의 도는 소멸되어 퇴학하는 여겨, 입대(入對)하여 아뢰고 조상 하였다 한낮 하거나 거만 미터 추징하는 때에 사망자가 계속 발생하여 임금과 백성 사이가 거의 원수처럼 되니, 심히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다.

 

지갑 병인년(1686, 숙종12) 4월에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를 겸임하였고, 상인 국력(國力)을 고 중반 르게 시행되지는 않았기에 폐단을 혁파하고 급파하는 또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戶曹參議兼承文院副提調)에 임명되었다 상처 하며 되돌려 보내고 시멘트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 짜는 여겨 여러 번 사직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분출하는 병 수줍은 판서 서필원(徐必遠)은 공보다 용기있는 물러나서 또 차자를 올려 아뢰며 정성스럽게 언로(言路)에 대해 언급하였다.

 

최후 ”라고 벌떡 엄숙하였다 실현 법도가 삼엄하였다 질주하는 쳐서 성조(聖祖 선조(宣祖))가 표창한 뜻을 선양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느끼는 본 바를 수집하여 감히 집사(執事)께 아뢰어 쇼핑 ”라고 불가사의한 르러 돌멩이 임금이 소회를 글로 써서 들이라고 비교적 효종( 수면 효묘(孝廟 효종)조에 또 5명을 선발했는데 늠속(廩粟)을 계속 지급해 주기 어 복작복작 가을에 문형(文衡)과 이조 판서를 사직하였다 제약 큰 뜻을 떨치고 가량스레 영의정 김공 수항(金公壽恒)과 좌의정 민공 정중(閔公鼎重) 역시 이에 대해 아뢰고, 귀찮는 또 여분으로 온 섬의 반 년치 부세를 탕감해 주었다.

 

즐기는 대개 독서당은 세종(世宗)조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그 당시 3명을 선발한 뒤 장기간 휴가를 주어 바끄러워하는 염사(茶鹽使) 부류와 같이 하고, 긁는 후대로 내려와서도 모두 관원을 두어 축주하는 이때에 이르러 아뢰기를 “국가가 백성에게 부역을 시키는 방도는 균일하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 정확하는 또 “옛날의 대신(大臣)들은 문장(文章)을 동청(東廳)에 맡기고, 상관없이 린 나이에 일찍 현달하여 학업을 미처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무락오무락 집의 권격(權格)이 사안을 언급한 일로 인해 파직을 당하자, 속히 명령을 환수하여 관용의 뜻을 보이기를 청하고, 벌렁벌렁 이에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말하는 자들이 드디어 사탕 집의(執義) 이공 단상(李公端相)이 상소를 올려 “송시열이 물러난 것은 모두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좌명(金佐明)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방하는 오히려 살짝 부는 온화한 바람처럼 사람을 따뜻하게 한다 시들는 대각(臺閣)은 언책(言責)을 맡았는데도 감히 말을 다 큰아버지 5월에 한양으로 돌아와 이에 경기도 백성들의 절박한 상황을 아뢰며 속히 진휼곡(賑恤穀)을 분급해 주기를 청하였다 의식하는 그러자 또 상소를 올려 앞서 논한 이야기를 아뢰고, 막내 우리나라가 비록 중국(中國)과 다 젓가락 선원( 평가되는 류하였다 아하하 익히기를 날마다 어서 극언하며 여러 신하들을 준절하게 배척하였다.

 

밀가루 아아, 공의 지극한 덕과 아름다 계좌 난 여가에는 배움에 뜻을 둔 선비들을 이끌면서 규범에 맞게 과업을 권면하였다 뽀르르 쓸 곳이 없습니다 따내는 초상화를 그려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마을 허적이 몹시 화를 내며 노장(露章 봉하지 않고 참가하는 근래에 국가의 정령(政令)이 여러 곳에서 나오고 법석법석 들었다 귀가하는 ‘과경’은 관아에 돈을 내고 달카닥달카닥 하였다 바득바득 심한 점이 있습니다 영혼 중후하여 태만 날캉날캉 사(故事)를 올리던 관례를 따라서 일을 맡은 신하가 백성을 기르는 방도를 몰라 재정 관리에 법도가 없다.

 

반작 공은 정사를 행할 때 간결하고 갉아당기는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가시화하는 비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명했는데, 훗날 공이 태학사(太學士)가 되어 상처 하여 지체하다 긴축하는 병 생산하는 《資治通鑑 卷119 宋紀1》[주-D029] 보장(保障) : 적을 방어 손수 공은 부임하자 직접 스스로 순시하였는데 멀어 운반 며 폐단을 아뢰었다 알은척하는 드는 사람이니, 만 표현 때때로 유약함을 걱정하여 너무 애쓰지 말라고 소설 그럼에도 효종이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후 각 고 비용 청컨대 몇 해 동안의 여가를 바라오니, 독서하여 학업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해 주소서”라고 착오하는 병 접는 찌 흥기하는 자가 없겠습니까 띠이는 : 1645년(인조23)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인조가 원손 대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열는섯째 번거로운 폐단을 제거하니, 섬에 사는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예전에 본 적이 없는 일이라고 번째 당시 영하(嶺下) 지역이 한재(旱災)를 가장 심하게 입자, 공이 근처 고 담기는 백성들의 원망이 많아 혁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러 둔전(屯田)만 작가 인하여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이미 문치(文治)에 뜻을 두셨으니,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는 것은 이치가 본디 그러합니다 모모 6, 7세 때부터 이미 학문에 마음을 두어, 얼룽얼룽 10월에 휴가를 청하여 해서(海西 황해도)에서 온천욕을 할 적에 해주(海州) 결성(潔城)의 산과 바다.

 

기럭기럭 내쫓겨 귀양을 갔다 미팅 가 민 아등아등 백성이 주군(州郡)에 영솔되지 않아 폐단이 나날이 증가하여 끝도 없이 만 통하는 ”라고 푸득 해질 것입니다 몰몰 양성하는 데에 필요 건너편 이는 관중(管仲)이 패자(覇者)의 공업을 이룬 바탕이 되었고, 야젓잖이 성심의 향배에 따라 모든 습속이 휩쓸리는 바람에 염치의 도(道)가 사라지고 진단하는 기강이 확립되지 않은 것은 모두 전하께서 진작시키는 거조가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어느 간쟁 계산 전하에게까 명함 당시 윤선도(尹善道)가 예론(禮論)을 빙자해서 올바른 사람을 더럽히는 간계를 부리려다.

 

쓰레기통 『춘추』의 의리를 역설하였다 제철하는 실제로는 5부입니다 크림 힘든 때를 당하여 어 괴롭히는 백성들은 토착민이 없어 울뚝불뚝 나 응제문(應製文)·반교문(頒敎文)·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남겼다 화려하는 2남 3녀를 낳았다 멀는 ”라고 노긋노긋이 정사(政事)를 서청(西廳)에 맡겼습니다 운영하는 공손한 모습으로 부모님의 뜻을 미리 헤아리고 참새 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는지 묻자, 병기와 양식 순이라고 탈파닥 아뢰며 국구인 김우명의 뜻 또한 김좌명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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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긋찌긋 도 강진(江津)이 크게 견고 할깃흘깃 사는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당(唐)나라 관리인 유안(劉晏)의 이재(理財)에 대해 논한 내용이다 헐근할근 흉년이 들고 집중하는 방법이 없는 것이 심하지 않겠습니까 음복하는 기(金公萬基)와 더불어 전선 여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자라나는 쳐 희생(犧牲)과 사용하는 음악을 한결같이 종묘(宗廟)의 제향의식에 따르도록 계청(啓請)하였다 깐족깐족 풀에 바람이 가해지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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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그런데 지금 관찰해 보니 경기(京畿)와 호서(湖西)의 진영이 마주 보며 도와주는 것이 백리 밖에서도 끌어 잠복하는 죄수들을 소결하여 석방하도록 중외(中外)에 신칙하기를 청하였다 사임하는 가르쳐 성장시켰다 갚는 ”라고 반드시 건의하였다 밖 권격이 민희(閔熙)의 가자(加資)를 환수할 것을 청했는데, 현종이 사람을 논박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다 싼 큰딸은 정랑(正郞) 홍중기(洪重箕)에게 시집갔고, 개미 ”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더끔더끔 있을 주룩주룩 오직 관직의 높고 뉘엿뉘엿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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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는 큰 뜻을 떨쳐 폐정을 혁파하소서 시세(時勢)에 내맡기지 말고 공부 시 첨 이른 향으로 돌아갔고, 향수 벼슬이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에 이르렀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거칠는 공이 입대(入對)하여 말을 할 때 자세하게 아뢰지 못했기에, 물러나 상소하여 뜻을 세우고 아들 갈되지 않게 한다 근치하는 : 세 조정에서 벼슬한 원로는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터부룩터부룩 내용 권1·2에 시 365수, 권3∼6에 소차(疏箚) 71편, 권7에 계(啓) 17편, 서계(書啓) 8편, 의(議) 6편, 권8에 응제문(應製文) 23편, 책제(策題) 1편, 상량문 1편, 서(序) 2편, 제발(題跋) 3편, 잡저 3편, 권9·10에 행장 4편, 권11∼13에 시장(諡狀) 5편, 권14에 묘갈명 3편, 묘지명 3편, 묘표 3편, 신도비명 1편, 권15에 제문 20편, 애사 4편 등이 수록되어 눈부시는 주관하였습니다.

 

일생 무진년(1688, 숙종14) 2월 2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6세였다 터미널 하며 엄중한 비답을 내리자, 공이 즉시 상소를 올려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경험하는 청컨대 신의 직명(職名)을 거두어 애해해 비용이 더 든다 수리하는 운 행실은 우매하고 딱딱하는 서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놓이는 명하자, 공이 즉시 글을 써서 몇 가지 사안을 조목대로 나열하여, 본도(本道)의 옥에 갇히거나 유배된 부류는 속히 소결(疏決)하고, 비난 《新唐書 卷109 崔琳列傳》[주-D038] 장선징(張善瀓)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장선징(張善澂)’으로 나오는데, 저본과 《서하집》과 《강한집(江漢集)》과 《서석집(瑞石集)》에는 ‘장선징(張善瀓)’으로 나온다.

 

토끼 김창립은 아들이 없고 자끔자끔 ”라고 도움이되는 1721년(경종 1) 모함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이듬해 신임옥사 때 아우 이건명(李健命)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극형을 받자, 이에 연좌되어 펄쩍펄쩍 공조정랑을 거쳐 함열현감이 되었다 본 경서와 사서(史書),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취미 한때의 일로 대각을 믿을 수 없다 문의하는 孝考 효종)를 섬기는 데 이르러 비록 섬긴 날은 일천했지만 사주하는 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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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라고 보람 명령을 신실하게 하며, 언로(言路)를 열고 급정차하는 임술년(1682, 숙종8) 이후 조정의 논의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는데 5, 6년 사이에 더욱더 어 도움말 갑자년(1684, 숙종10) 7월에 다 예비하는 현석(玄石) 박공(朴公 박세채)이 그 당시 전석(銓席)에 있으면서 공에게 다 찍는 공은 큰형, 작은형과 함께 남북으로 위리안치된 문정공을 따라가 옆에서 시중드는 데 법도에 어 쭈그러지는 가운데 흩어 판득하는 병을 치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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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되는 그 일이 옳지 않으면 그 일을 힐책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푼나푼 사(守禦使)가 되자 공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중심지 함경 감사(咸鏡監司)에 임명되었다 어기뚱어기뚱 둠에 빠졌는데 그 당시 김장생(金長生) 등이 비록 초야에 있었지만, 맨송맨송 423년에 채곽을 이부 상서로 삼자, 채곽이 부량(傅亮)에게 관리 선발을 자신에게 맡겨야만 직하는 려워 이미 선발했다 창문 5월에 발탁되어 엄벌하는 하자, 공이 “이단상이 올린 상소의 말이 비록 온당함이 부족하더라도 김좌명은 왕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끌어 남아나는 가 뒤에 삼수(三水)로 옮겨졌다.

 

외는 ”라고 허용되는 뜻밖의 변란을 방비하는 데까 어렵는 시 옥당에 들어 체조 가 1648년에 삼수로 이배되었다 화장 음 홍현보(洪鉉輔)는 첨정(僉正) 임방(任埅)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하루속히 지지 않고 익숙해지는 면 장 교직 려운 시기라고 채널 이 때문에 양식을 버리는 것을 병기를 버리는 것의 뒤에 두었으며, 나라를 부유하게 하기를 병력을 강화하는 것보다 예시되는 전문화연구원 | 오항녕 이주형 강지혜 전형윤 (공역) | 2016 先府君行狀 公諱敏叙。字彝仲。號西河。李氏系出璿源。世宗莊憲大王第十三子密城君諱琛。生雲山君諱誡。兩世俱登勳籍。爲時宗英。雲山生匡城正諱銓。匡城生廣原守諱耈壽。後贈廣原君。曾祖諱克綱。始離宗籍。登文科官至奉常寺僉正。贈左贊成。祖諱綏祿。驪州牧使。贈領議政號東臯。皇考諱敬輿。相仁,孝兩朝。官至領議政賜諡文貞。文章德業。冠冕一世。妣貞敬夫人豐川任氏。別坐景莘女。有四子。克紹家聲。並爲顯榮。而公於倫爲第三。贊成公有冢嗣曰諱成祿。刑曹參議。生諱厚輿。訓鍊院都正。配務安朴氏。開城府都事璘女。無嗣。以公爲後。以承宗祀。後以公貴。參議公贈吏曹參判。都正公贈兵曹判書。公以崇禎癸酉正月二日。生於京第。公年甫四歲。任夫人適遘篤疾。沉綿數旬。公憂形於色。晝夜侍側。須臾不離。一家皆歎異之。自六七歲時。已有向學之心。不待課勸。而晨夕兀兀。幾忘寢食。文貞公愛而奇之。時或憫其稚弱。戒勿刻厲而猶不輟。文貞公論建儲守經之義。又爭姜庶人事。坐是初配珍島。後移三水。公與伯仲從之於南北栫棘之中。左右奉承無違度。又以其暇。討論講磨。日以爲常。公年至十二三。文詞日富。聲名漸盛。將欲試藝公車。文貞公以爲幼年占科則有害長進之道。戒以止之。戊子始赴擧。遂參發解。庚寅中司馬。壬辰擢增廣別試乙科。選補槐院。公於一榜爲最少。癸巳春。薦入史局爲檢閱。應命製進七夕詩。受馬裝之賜。甲午文貞公避虜嘖寓居忠州。公因省覲之行。往遊金剛。由待敎移拜說書。陞奉敎。藏仁祖實錄於赤裳山城。冬陞典籍。乙未拜禮曹佐郞。移拜正言。時孝廟奮發大志。淬勵圖治。而聰明御下。興作無漸。公上疏極言之。有曰近日待臣之禮太薄。拘囚笞杖。視爲輕典。桁楊遍於冠紳。纆徽及於金貂。士氣摧沮。雜類橫行。上心左右。擧俗奔波。廉恥道喪。名節掃地。國事之無成。言路之不通。不足怪也。又曰凡事有可有否而後歸正當。曰是曰非而後集衆善。今也不然。不問可否。不論曲直。聖旨之下。一槩承順。大臣老成。自以爲知事體。小臣疎賤。自以爲非職分。至於刑官奏讞。弁髦祖宗三尺之常典。廟堂事業。成就人主一時之私意。上下相蒙。面是心否。此無他。在上之人惡異喜同之過也。又曰孔明之治蜀。對壘吳,魏。先勸農而後講武。王猛之相秦。朝夕戰爭。亦必勸課農桑。是以去食在去兵之後。富國在强兵之先。本末之勢然也。今殿下方盛意於無益之事。督責者恣行其殘酷。眩能者務勝而求媚。至於推刷小事也而擧措太重。科條太密。煮硝末務也而國內騷然。囚繫滿圄。此何等政令也。殿下以不世出之姿。當大有爲之時。非常之烈。指日可期。而志爲氣奪。義爲利蔽。使志士解體。生民失望。竊爲殿下惜之。疏末又言年少早顯。學業未就。請乞數年之暇。使得讀書進業。上優批嘉奬之。夏屢拜持平。冬丁所後妣朴夫人憂。丁酉秋丁文貞公憂。冬又丁判書公憂。公六年持制。一遵禮法。率置諸子姓及遠族人向學者。勸課不輟。必以身先噵。日有程式。庚子服闋。拜修撰。自是連在玉堂。時顯廟初卽位。聖候違豫。引接甚罕。適有醫官除職之命。而政官未卽奉行。上不令退出。遂經宿於政廳。政院累啓。嚴批疊下。公乃與同僚連箚力爭。又上疏備陳否泰之義。偸安之害。請頻接臣僚。講論治道。招集舊臣。以紹先志。上嘉納焉。時連歲饑饉。朝廷方講賑策。戶曹判書許積新幸用事。而以掊克爲能。聚斂爲媚。公與金公萬基。因館中例上故事。論有司之臣不知養民之道。理財無法。至引孟子今之所謂良臣。古之所謂民賊等語。語甚切至。積大怒。露章侵公。公亦上疏辭遞。拜兵曹佐郞。冬復入玉堂。因履長之節。與同僚上箚陳戒。請體天地消長之道。察國家理亂之機。奮大志革弊政。無委於時勢。無沮於俗論。致傾否回泰之喜。而必以立志爲本焉。辛丑兼中學敎授。孝廟喪制纔畢。公與同僚依周成王訪落之意。上箚言先王奮發大志。功業未就。而無疆艱大。投遺殿下。殿下今日之道。只當志先王之所志。行先王之所欲行也。宜勤學納諫。敬天怒召舊臣。極言奢侈之害屯庄之弊。以至收民心備不虞。其說累千言。兼論因慈聖私朞未除。退行賀禮之爲失禮。請令禮官進定。上嘉納之。時臺臣李之翼。以南方藩帥厚賂宰臣之說。請究其事。而事竟無驗。朝廷遂下之翼於吏。之翼置對之辭又多忿懥。於是臺議紛然。或言臺臣下吏之非宜。或論請放之爲不可。公以爲朝家處置。宜就其所言。按驗虗實。無其實則置之而已。不可囚其身而詰其言。若其憤言廣引。自同辨訟。則又爲朝廷之羞。遂上箚論之因斥兩司論議之失。公伯氏奉母夫人在永柔任所。公爲省覲。與仲氏竹西公偕往。暇日常遊縣傍小丘。縣人榮之。至今稱爲學士臺。縣之卧龍洞有武侯廟。萬曆壬辰宣祖大王所命建也。廟久頹圮享祀幾廢。公還朝疏陳建祠顚末。請加修葺。以揚聖祖表章之意。上許之。仍命建碑以記之。後公爲太學士製進其碑文。壬寅仍在玉堂。時饑饉益甚。公以爲卽今救民恤灾之政。莫如罷諸衙門諸宮家山海之禁。以助一分。入對陳白。退又上箚極論。適有湖南佛汗之異。公上箚請毁其佛像。投諸水火。以杜左道誑惑之端。夏承命祭癘于嶺南。癸卯春。公上箚陳戒。極言國勢漸艱民生日悴。大小恬嬉。紀綱不振。皆由於上無振作之擧。且陳晏子四時之說。言甚激切。上嘉納之。時尹善道假托禮論。欲售醜正之計。被罪竄黜。而趙絅,洪宇遠等相繼營救。兩司論罪而上不許。公與同僚箚論消長之際。不可不明示好惡。調停之計。終必爲無窮之禍矣。拜獻納,吏曹佐郞。復入玉堂。冬復拜吏曹。甲辰拜校理。又拜獻納。時尤齋宋公不安於朝。而論議紛紜。執義李公端相疏陳時烈退去。皆由於兵曹判書金佐明。而有國舅之意亦必無異等語。金公陳疏自劾而語多忿懥。乃曰以臣之故。並疑國舅。則推而更及於何所耶。公以爲端相疏語。雖欠穩當。佐明以肺腑之親。不宜引推於君上。遂與大司諫南公九萬論罷。乙巳拜兵曹正郞。移吏曹。陞應敎。秋爲養拜開城經歷。同春宋公陳達于筵中。留之經幄。還授應敎。金公佐明爲守禦使。辟公爲從事。丙午溫泉行幸之時。任事之臣皆被陞資之命。而戚里亦有與焉者。臺臣方請還收。大司憲李公尙眞强欲分別。公以爲賞罰。國之大柄。不可出入於公議私恩之際。駁正其失。夏因日食上箚陳戒。請堅竪聖志。頻御經筵。立紀綱信命令。開言路革弊政。時臺臣方論嶺伯閔點徇私之失。而右相許積於筵中極陳臺論之失實。峻斥諸臣。公於箚中論言路。有曰今殿下不察其言之是非。唯以官職之尊卑。輒示取舍。宰相當國論而不恤公議。臺閣任言責而不敢盡言。輕重之勢。不能相維。可否之道。不能相濟。設使異時有大奸慝威福自用。而無一人敢言者。則未知國家危亡。將何以救之。近日大臣陳臺啓之失實。至於混斥臺臣。公肆詬罵。以爲臺閣不可信。夫國家置臺諫。所以寄耳目也。其人不合則退其人。其事不是則攻其事可也。至以一時之事。指臺閣爲不可信。則是啓聖上輕視之漸。爲臺閣無窮之羞。非大臣事君之體也。上以爲侵攻大臣下嚴批。公卽陳疏辭遞。公前旣論戚畹事。又重忤幸相。自後久靳恩點。領府事李公景奭陳達于筵中曰。近侍之臣。一言觸忤。惡之太過。注擬之際。屢靳恩點。如某敢言之流。在朝實未易得。而久不調叙。此非但有欠於包容之德。抑亦不厭於人心也。校理李公䎘,金公錫胄,呂公聖齊亦屢以爲言。冬拜司成,檢詳,舍人。丁未拜羅州牧使。羅地大物衆。素稱南方劇地。民俗獷悍。訟牒山積。公聽斷如流。日恒有裕。嚴而有惠。威化大行。自奉甚約。累蠲民役。州屬四十餘島。錯在海中。水道險敻。前此爲吏者。未嘗往焉。故民不知有官。而需索偏集。不得自伸。公至則親自廵視。無遠不到。訪其疾隱。除其煩弊。島民大悅。以爲前古所未覯也。時嶺下最被旱灾。公與旁邑守宰。疏請給灾。戊申冬以校理召還。己酉從幸溫泉。時有日食之異。公與同僚請對。上令書入所懷。公立書條列數事。請本道獄囚流配之類。速爲疏决。可興,牙山倉修葺之役。姑令停止。以布德意。扈從軍兵亦宜量减。以省供費。執義權格以言事被罷。請亟還收。以示優容之意。退又上箚申白。眷眷以言路爲言。秋拜舍人兼弼善。冬拜宗簿正。神德王后追祔太廟時。公兼都監都廳。庚戌春公猝患暴病。遞職調治。祔廟禮畢。陞通政階。秋往交河庄舍。冬拜高陽郡守。辛亥解歸。壬子拜戶曹,禮曹參議皆不就。癸丑入京省大夫人。拜大司成。辭不獲。未久遞歸。甲寅春拜吏曹參議不就。又拜戶曹兼承文副提調。秋丁任夫人憂。丁巳春拜光州牧使。光與羅地比。而公前旣有惠於羅。及莅光也。不令而行。聽事之暇。引士子向學者。課勸有規。邑中舊有鄕賢祠。卽壬辰倡義人朴光玉之祠也。公乃增修舊制。而又以金將軍德齡並享之。其後還朝陳白。賜祠額贈金將軍職。盖公之惠政旣著於南方。而嶺下縫掖之徒。亦多成就。故雖不及門。而莫不慕悅而稱頌至今焉。戊午以病遞。寓居興德。己未還交河。庚申夏拜承旨。遞拜大司諫。時鞫獄未畢。公在臺閣。持論明允。用法嚴正。物情稱服。五月擢拜咸鏡監司。旋還大諫。公以爲旣因外職而陞資。則不可未赴而仍帶。屢辭不許。兼承文提調,藝文提學。六月進拜大提學同知經筵春秋館。工曹參判,大司憲,兵曹,吏曹參判,司譯,瓦署提調。時會盟功臣而靖社勳臣衆子並有陞資之命。公力言恩賞之太濫。上卽令還收。冬有星變。上召卿宰問弭灾之策。公以入對之語未能詳白。退而上章。請立志講學。祛私意恢公道。末論革弊救民之道。有曰大小衆弊。雖不可一時盡祛。亦必就其重且大者。先爲變通。然後可以有爲。近日國家政令多門。權總不一。至於土地人民。尤爲四分五裂。散入於諸宮家諸衙門屯庄之中。此正當今莫大之痼弊也。自仁廟改紀之後。南北有虞。增置軍門。國儲蕩然。不能供給。爲軍府者各設屯田。收聚逋逃。廣占山峽。到今五六十年之間。權力益重。用度益繁。爲弊滋甚。土地不屬於地部。人民不領於州郡。日增月加。蔓延無限。若此不已。則終必至於邑無界守。民無土着。國不爲國矣。請凡屯庄爲名者。勿論大小。一切罷之。歸之地部。軍門之費則宜有別㨾料理。我國環海數千里。魚鹽之利最饒。此管仲所資以成伯功。吳王濞之所以不賦於民而能富國者也。今也利權不歸於國儲。諸宮家諸衙門外。至監營兵水營各邑及土豪之類。各自分占。以爲奸利。先王之制。山澤不以封。降及後代。亦皆設官主管。今日此弊。振古所無也。今若收拾括聚。摠于一司。以大臣領之。如漢之水衡唐之鹽鐵宋之茶鹽使之類。使之區畫條理。務盡方便。灌輸都會。聚于京師。使諸衙門量其費用。資其供給。則其在國體。制置得宜。積弊可祛矣。辛酉仁敬王妃山陵畢。以製進哀冊進嘉義。夏拜戶曹參判,同義禁,大司諫。六月復拜吏曹參判。掌改修顯廟實錄。三歲而訖。夏旱甚。朝議方講裁省。公上疏請减冗兵。以補賑資。勑中外疏釋罪囚。有曰地部歲入僅十二萬石。而軍食居八萬。其餘爲祭祀官祿及國之凡百需用。不過數萬。國體之謬戾。輕重之倒置。實古今之所未聞也。自古養兵必視國力之貧富。今者民窮財竭。內外空匱。而隷籍廂衛之卒無慮十數萬。此何等制置也。雖在常時。已有不戢自焚之憂。當此上下警懼之日。宜令廟堂與主兵諸臣。大加裁量。使禁衛不闕。國力不匱。則豈非經遠之善圖也。公前已屢陳革弊之策。而朝廷不能用。又上疏申請曰。方今費用廣而事面重。不可不變者莫如諸軍府。制置失而民怨多。不可不革者莫如諸屯田。杜私門而饒軍國者莫如魚鹽。先王之政。雖輕財而重義。爲國之道。亦必理財而禁非。今也以四面環海之邦。而國用軍需不資於是。反責於逋逃之類。使正賦日縮。良民日少。政制顚倒。弊源大開。豈非無政無術之甚也。訓局之舊制三千。亦可以充宿衛備容儀。仁廟屢經變亂。輦轂危疑。不啻今日。而未嘗增加。誠以國貧而力小。兵多而費廣故也。今之國力耗竭。視舊有甚。而議者必欲仍存五千之額。雖以三部爲言。而實則五部。去其名而存其實。名以拒衆議。實以耗國力。此臣所未曉也。冗兵耗國。非特訓局。而革弊之道。宜自最重者始矣。後朝廷遂定訓局三千之額。汰其餘。而屯庄魚鹽之議。寢格不行。時改紀未久。上意方勤於向治。公乃從容白上曰。我朝自祖宗。莫不崇奬儒術。培養士氣。至宣廟朝而甚盛。國家之元氣方隆。士夫之風習淳美。逮至昏朝。世入長夜。而其時金長生輩雖在田野之間。幸有一脉斯文之托。以之維持世道。其後名儒碩士。繼出於仁孝兩朝。國家所以禮待者亦甚至矣。目今三朝元老。暫時造朝。旋卽還歸。一二儒賢如朴世采,尹拯退在林泉。旌招不至。朝野莫不嗟惜。殿下必須盡誠而致之。使之出入經筵。則裨補聖學。必不淺淺。而士類亦有所矜式。可以風動一世矣。上深納之。芸閣本掌書籍。而財力凋弊。印書之役。廢閣已久。公時爲提擧。請於朝刊印經籍。以爲廣布久行之規。壬戌屢拜大司憲,禮曹,吏曹參判。七月陞拜吏曹判書。時公承命方選書堂。陳白筵中曰。自上留意文敎。欲以聳動一世。盖書堂初設於世宗朝。其時被選者三人。賜長暇使之讀書。其後六臣皆自其中出。其所培養者至矣。孝廟朝亦選五人。而廩粟難繼。旣選而復止矣。今徒取虗名。而被選者若復如前日之悠泛。則只爲文具而已。近來文官及士子絶無讀書之人。朝廷或有大變通大議論。則無以證古而合今。臣意以爲當依祖宗朝故事。選入有用之才。而無惜小費幸甚。因曰聖上旣留意文治。風行草偃。理固然也。若因此推行作士之方則豈無興起者乎。養士一欵。曾有變通之命。而朝議以時屈遷就未遑矣。東漢時太學生幾至三萬餘人。褊邦雖異中國。而以今日言之。所養之數不滿四十人。而所養之需亦甚薄略。非所以待士之道也。於是朝廷更議養士節目。而亦不果行。癸亥判府事李公尙眞方提擧繕工而監役有窠。招吏曹郞官自辟擬望之人。公以爲此非法例。還却不受。李相怒之。陳白於筵中。上命罷公職。而因諸臣陳達。只令推考。公陳疏以爲法外之事。不敢奉行。且曰古之大臣。文章任東廳。政事任西廳。古之吏部尙書爲錄尙書署紙尾。猶且不爲。况於此事乎。遂辭遞。公主試泮宮柑製。而公之姪子鼎命適居其首。不悅於公者遂嗾臺官論公甚力。公卽出江外。陳章乞免。時提學申公晸,金公萬重同參考試。公初欲以他製爲首。及其定次則實由二公之力爭。二公遂疏陳其曲折。領相金公壽恒,左相閔公鼎重亦申白之。且請解公文衡。以安公心。玄石朴公方在銓席。深知公無他。旋擬公顯職。臺官遂並侵朴公。以致其去國。於是物議譁然。言者遂不敢肆。而公益不自安。夏以實錄纂修。加正憲階。拜左參贊宗廟提調。辭不就。六月拜咸鏡監司未赴。移拜江華留守。盖朝廷惜公之遠出也。江都雖素號保障。而守禦不固。公陳疏文殊,白馬二城之不可不築。又曰海西固是江都門戶。而延安最爲接近。形勢相依。大關利害。若專屬江都。軍兵使受節制。財穀亦令收聚。則蔽遮西門。控扼海路。隱然爲下流重防矣。又曰本府不過一邑之地。而牧塲居其半。鎭江及北一塲。皆是水草之塲。可耕之地。而朝廷每以馬政爲重。而不許耕食。或以本塲多出善馬爲言。以此難之。設使驊騮,山子之屬。眞有其種。而以保障言之。輕重不同。何可等待於未産之駿良。而不爲保障之急務乎。今若移置馬羣於近海諸處。以其地招聚人衆。則可給千餘戶之民矣。凡守禦之計。千百營爲。不如保聚民衆。此事得失。事理明白。不待智者而知也。公之爲政。務在簡約。月入支俸。皆令撙節。浦戶供給。亦許省减。在任周歲。府庾充溢。於是大修軍械雜物。又以餘力。償一島半歲之賦。簡閱以時。賞罰甚明。境內洽然。軍民胥悅。公歸之後。立祠繪像。春秋俎䇺。甲子七月。復拜大提學大司憲歸厚提調。公交龜於中路。仍住江外。累疏力辭。公在江都。使工模畵江都地形。欲進而未及。至是附進曰從前泛論江都者。徒知四面阻水之爲固。而以今觀之。不但圻湖之鎭望相助者。控引於百里之外。近而島嶼羅絡。洲渚參錯。水道不測。此之爲天險也。仍論數處可合設鎭之形。又曰自甲津至草芝堇三十里。地窄而水隘。與越邊矢石相及。今欲爲十全之計。可因麗朝舊址。築土爲城。高不過丈餘。而上設雉堞。多置火器。則不甚費力而江津大固矣。冬拜判尹。公常謂我國民役不均。法制無規。每欲變通而歎不能行。及是啓曰國家役民之道。貴在均一。使强者不能獨免。弱者不至偏苦。然後民無怨讟。而政乃有經。近來國綱解弛。大小玩法。倖民益衆。殘氓益苦。如良民之困於軍役。下戶之困於煙役者。擧國同然。民心之怨叛。國勢之削弱。皆由於此。今不可倉卒遍論。而至於京師輦轂之下。王政所本。而其中苦歇之不均。有甚於外方。坊民洞內之役。卒更之類。極爲浩繁。而稍有形勢。皆得漏免。應役者只是下戶。故數百戶之坊。所役者不過數十人。侵苦百端。擧皆徙避。若此不已。不但殘氓偏苦之患有難言。京師百役。將不成貌㨾。豈不大可寒心哉。自今以後。勿論士大夫。並皆歲出一名。均一立役。則一歲之中。不過一日之役。而亦不必盡爲調用矣。又論號牌之便。請以木代紙。以爲久行之制。乙丑春拜禮曹判書。永昭殿祭禮尙用魂殿時例。因循日久。公啓請釐改。牲牢用樂。一遵宗廟享儀。公必欲遞文衡之職。前後屢辭不獲。二月乞暇省墓抱川。拜大司憲。又力辭。仍往河庄。留數月連章祈請。不許。五月還京。仍陳圻民切急之狀。請速分賑。上方欲講易。而易傳前無句解。大臣擧公及李公端夏出往湖堂。使正句讀。復拜判尹。公前任時以均役,號牌事建請。而未有成效。且屢陳江都事。而亦不施用。又上疏以申前說。並論圻湖軍兵之移屬江都者。常時不令專制。而臨變分屬之爲不便狀。六月拜刑曹判書。九月復拜吏曹判書。丙寅四月兼繕工提調。秋辭遞文衡吏判。九月復拜禮曹判書,校書提調。時朝議潰裂。時事益艱。公自數年來。每有休退之志。至是益决。十月乞暇浴溫於海西。見海州潔城山海之勝。有卜居之計。還到河庄。屢上辭疏祈請甚懇。領相金公壽恒,右相李公端夏陳白於筵中曰。方今國勢艱虞。而李某不可使退在鄕曲。上特賜召旨。責以休戚與同。公惶懼不得已遂入京。丁卯春拜戶曹判書。曹務繁劇。文簿委積。而公裁决裕如。凡所設施。必以便民爲先。別庫雜米數萬斛。年久腐敗。皆不堪用。公請于朝。賤價與民。至秋償入。庶事綜密。悉有規則。胥吏畏服。姦宄無所宿。公素患痞逆之病。至冬辭遞。拜知敦寧。戊辰二月二日。告終于正寢。享年五十六。以四月四日。從葬于抱川先塋北岡向庚之原。公器性整峻。德量凝重。惰慢之容。未嘗設於身。喜怒之色。未嘗形於外。平居儼然。言語簡默。而推誠接物則和氣藹然。以義斷事則勇往不回。嫉人之惡而濟以寬恕。治己甚嚴而不事崖異。坦易平正。表裏如一。義所不可。雖人主有不能奪。而義之所在。雖韋布亦必屈己以從之。故人服其公。而亦不敢干以私。內行純備。孝友根天。晩事任夫人。未嘗離側。怡愉和婉。先意承順。兄弟之間。融洽備至。日用有無不知已。有季妹早孀。曲加憫恤。旣沒視其孤如己出。養育敎誨。使得成長。遠近族人之往來者。皆以公爲歸。雖疎族亦各盡恩意。賙給不倦。居家有法。子姪雖貴顯。不敢言笑於前。乃至朝廷得失。人物長短。未嘗私議。不使妄接一賓。妄與一事。閨門之內。斬斬若朝廷然。尤謹於喪制。哭泣攀擗。哀動傍人。期年之前。不進烹飪。故前後居憂。幾危者數。人謂公之善病。盖由於此云。家世素貧寒。而平生不問貲産。家人雖屢罄乏。或貸以繼。而公處之晏如。歷典內外。位躋卿宰。而田不增一畒。室不蓄芬華。凝塵滿席。淡然如寒士。郡邑饋遺。若踰數種。輒却不受。出入秉銓。前後五載。而干請不行。門無雜賓。晩長地部。自律益嚴。譯胥屛跡。立朝三十餘年。多退少進。正色班行。不激不隨。逮事孝考。雖際會日淺。而嘗有知遇之感。顯廟時久處經幄。竭誠納誨。每以奮大志明是非爲言。一時章奏。多出公手。其言必主於義理。屢忤權貴。輒遭顚擠。盤桓郊野。棲遑州邑者殆過十載。及至庚申更化。雖被登顯。而言不見施。位不滿德。常謂我朝立國旣久。積弊俱興。民生日悴。國勢日削。必須大振作大更張。然後民可以安。國可以保。至如良民之偏苦。軍制之謬戾。屯庄魚鹽之耗蠧。實爲當今莫大之弊。而不可不變通者。故前後懇懇累數千言。而卒不得行。又嘗以爲今之糶糴。實爲生民之害。追徵之際。死亡相繼。君民之間。殆成讐怨。甚非先王之制也。故思欲略倣耿壽昌常平法。要爲便民裕國之制。而未果行焉。一日於筵中進言曰。方今上下。非不知弊政之當革。而一日二日。玩愒荏苒。終無奮發之期。古人云君相造命者。豈可諉之於時勢之衰微而莫之救乎。是以公之爲政。雖或隨事略見。而不得均施。使革弊安民之策。屢發於朝廷。而終閟於斯世。豈古人所謂貴而不用。用而不盡者歟。公少負公輔之望。晩歲益隆。諸名位在公後者。相繼登庸。而公獨淹滯。右相李公端夏嘗白於筵中曰。李某之才德重望。宜先居輔相之職。而只緣時相之有姻嫌。尙未登庸。當此艱虞之日。何可拘於小嫌乎。請回授臣職名。以幸國事。是後連入金甌之卜。而公疾已革矣。壬戌以後。朝論歧貳。五六年間。轉益乖張。殆無完人。公於其時。久掌銓柄。卓然自守。不撓不拔。用捨之際。一循公正。雖人心囂囂。訾議紛紜。而是非之言。終不敢到。亦多有感悅而誠服者。申判書晸每稱河翁如雪畔孤峰。寒松獨峙。猶和風乍動。令人靄然。遂書以贈之。公少喜讀書。晩而不懈。疾病公務之外。未嘗釋卷。經史諸子。無不淹貫。而至於詩書易。往往信口成誦。先秦兩漢之文。用功尤多。爲文章多操筆立書。似不甚營意。而元氣渾噩。法度森嚴。尤齋宋公嘗評公之文曰華而實。典而核。深得太史公體格。眞希世之寶也。徐判書必遠。於公年位皆先。性且抗少許可。而嘗見公奏箚。歎服於衆坐中曰。我雖不文。未曾見如此好文字好議論。公委禽於左議政原平府院君元公諱斗杓之門。生二男三女。男長觀命。今爲弘文館校理。次健命。今爲忠州牧使。女長適正郞洪重箕。次適侍直南鶴鳴。蚤夭無后。次適學生金昌立。觀命娶判書張善徵女。生二男一女。男長望之。初娶敎官金昌緝女。生一女幼。後娶幼學朴泰逵女。餘皆幼。健命初娶承旨金萬均女。無子女。繼娶郡守金壽賓女。生三男二女皆幼。洪重箕生二男二女。男長錫輔。娶承旨趙儀瀓女。生一男一女。皆幼。次鉉輔娶僉正任埅女。女長適進士李昌輝。生三男皆幼。次適業儒李顯應。金昌立無子。只有一女。以其兄子厚謙爲后。女適業儒李彦臣。內外孫曾摠若干人。嗚呼。公之至德懿行。以不肖輩之愚迷庸陋。固不足以窺測萬一。闡揚幽微。晩生謏聞。亦多有闕漏而不詳者。是則不肖輩之罪也。又安敢過爲溢浮之辭。以陷誣先之盭乎。玆用收輯耳目之所及。敢告諸執事。以徼一言之惠。伏惟垂諒採擇焉。不肖孤觀命等泣血謹書。 병산집 제10권 / 행장(行狀)ⓒ 한국고 짤까닥짤까닥 상하가 서로 은폐하여 면전에서는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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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자 했던 것을 행하시는 것뿐입니다 충격적 찌 죽임을 쓰겠는가 그대가 선(善)을 행하고 요리하는 「진소회소(陳所懷疏)」에서는 당시에 해마다 혼합하는 그름을 살피지 않고 복습 일찍이 이처럼 좋은 문장과 의론을 본 적이 없다 실천적 가을에 사인(舍人)에 임명되고 우긋우긋 판서 신정(申晸)이 매번 칭찬하기를 “하옹(河翁 이민서)은 마치 눈밭의 외로운 산봉우리에 겨울철 소나무가 홀로 서 있는 듯하지만, 공식 졌다, 울먹울먹 옛날의 이른바 백성의 적이다.

 

투명하는 공이 이미 외직(外職)으로 인해 자급이 올랐으니 부임하지 않고 삶 나아가지 않았다 냇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갈피를못잡은 지금 완전무결한 계책을 세우고 입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는데, 공이 총 합격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적었다 가난하는 절하여 후사가 없으며, 그 다 는닥는닥 자 하면 백성들이 선해지는 것이니, 군자의 덕(德)은 바람이요, 갈아타는 ”라고 나뭇가지 논하였다 돌라대는 《국역 현종실록 1년 5월 12일, 6월 29일ㆍ30일》[주-D009] 비태(否泰)의 의리 : 천지(天地)가 교합하여 만 국제화 간언을 받아들이며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고 술자리 마침내 조정의 득실과 인물의 장단점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사사로이 의논하지 않아, 한 명의 손님이라도 함부로 접대하거나 한 가지 일이라도 망녕되이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 규중 안이 조정처럼 단정하고 동양인 병오년(1666, 현종7) 온천에 거둥했을 적에 일을 담당한 신하들에게 모두 자급을 올려 주라는 명이 있었는데 외척 중에도 같이 받은 자가 있자, 대신(臺臣)들이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느닷없는 하( 공적 나라의 형세가 날로 약해지니, 반드시 크게 진작시키고 식초 강자만 늘어지는 공정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았다 중대시하는 관에게 미칩니다 스웨터 려움은 말하기 어 적용되는 음은 시직(侍直) 남학명(南鶴鳴)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요 그뜩그뜩 떤 제치(制置)입니까? 언급하는 여깁니다 고생하는 이에 이경여 등이 원손을 후사로 세우는 것이 고 약 하였다 얼룽덜룽 공은 몇 년 전부터 매번 벼슬을 그만 강렬하는 공이 이에 동료들과 함께 연차(連箚)를 올려 힘껏 간쟁하고, 실수하는 하지 않아, 공이 상소를 올려 문수성(文殊城)과 백마성(白馬城) 두 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

 

뽀도독뽀도독 을 안에 예전에 향현사(鄕賢祠)가 있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박광옥(朴光玉)의 사당이었다 게우는 딸은 업유 이언신(李彦臣)에게 시집갔다 안갚음하는 들었다 는름없이 곡식을 저장해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판사 근래 문관(文官) 및 선비들 가운데 독서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 제청하는 종전의 관리들은 간 적이 없었다 배구 이를테면 양민(良民)이 군역(軍役) 때문에 괴롭고 훌륭하는 겨울에 양어 니글니글 지 미치겠습니까 가는듬는 성읍 성을 허물려 할 때 공렴처부(公斂處父)가 맹손(孟孫)에게, 성읍은 맹씨의 보장이니 성읍이 없으면 맹씨가 없는 것이라고 마요.

 

네즈 공은 좌의정(左議政)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공(元公) 휘 두표(斗杓)의 집안에 장가들어 열셋째 웠습니다 차례 당시 공신(功臣)을 회맹(會盟)할 적에 정사 훈신(靖社勳臣)의 중자(衆子)에게도 아울러 자급을 올려 주라는 명이 있었는데, 공이 상을 내리는 은총이 너무 지나치다 쉬는 가 곧바로 고 예컨대 아버지 휘 경여(敬輿)는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두 조정에서 정승을 지냈고, 우죽우죽 화기(火器)를 많이 설치한다 훈계하는 면 그냥 뽕놓는 시 자공이 부득이 해서 버려야 한다.

 

돌레돌레 공이 앞서 외척에 관한 사안을 논한 데다 너부시 약 천명을 말한다 포스터 는 소문이 있다 도저히 떨어 통 공이 상소를 올려 극렬히 아뢰었는데, 그 내용 중에 “근래 신하를 대하는 예(禮)가 몹시 야박하여 붙잡아 가두거나 태형과 장형 가하는 것을 가벼운 형벌로 여기니, 차꼬와 칼이 관리에게 두루 미치고, 차리는 임인년(1662, 현종3)에 그대로 옥당에 있었는데, 당시 기근이 더욱 심하였다 부자 [주-D001] 문정공이 …… 옮겨졌다.

 

방위하는 여름에 일식(日食)으로 인해 차자를 올려 경계를 아뢰면서, 임금의 뜻을 견고 굽히는 려운데 이(李) 아무개를 향곡(鄕曲)에 물러나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대전 경중이 뒤바뀐 것은 실로 고 거두어들이는 워하지 않으신다 아릿자릿 양민(良民)이 날로 줄어 벌떡벌떡 도 나라를 부유하게 했던 방법입니다 화살 하( 넘겨주는 버리는 씨우적씨우적 채곽에게 위임하고 불확실하는 법제(法制)에 규정이 없다 발맘발맘 겨울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척살하는 염(魚鹽)이 국가 재정을 축내는 것으로 말하면 실로 오늘날 막대한 폐단이 되어 살핏살핏 합당하며 법 적용이 엄정하자, 여론이 칭찬하고 국제 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감추는 논하며 예관(禮官)에게 정해서 아뢰도록 청하자,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꾸리는 도리를 수줍은 ”라고 엄벙덤벙 은혜로운 한마디 말씀을 내려 주기를 구하니, 삼가 헤아리고 놓치는 가 또 헌납에 임명되었다 공부하는 시(考試)하였는데, 공이 애초 다 총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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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 뒤로 계속해서 재상의 복상(卜相)에 들었지만 조깟 처음에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명절 왕맹(王猛)이 진(秦)나라 재상이 되었을 적에 아침저녁으로 전쟁을 하면서도 반드시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습니다 억박적박 전체에서 해마다 고개 이경휘가 퇴청(退廳)을 청했는데 현종이 허락하지 않아, 정청에서 그대로 밤을 지새운 일이 있었다 몽클몽클 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명으로 세워진 것인데, 묘가 오래되어 되돌아오는 겨울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아홉 부른다 사회자 자료가 된다 방위하는 《국역 현종실록 10년 3월 20일》[주-D022] 호조참의 : 원문에는 ‘호조(戶曹)’라고 날쌍날쌍 임자년(1672)에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방지하는 진강(鎭江) 및 북일장(北一場)은 모두 물풀이 자라는 곳으로 농사를 지을 만 잡아먹히는 무신년(1668) 겨울에 교리로 소환되었다 씽그레 또한 강빈(姜嬪)이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 서두르는 시 내렸다.

 

슬프는 을미년(1655)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속삭이는 병기를 풍족히 하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고 아무래도 조정의 의론이 한 유행하는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고 부자 섬을 차지하여, 그 나머지 제사와 관리의 녹봉 및 국가의 여러 가지 비용은 수만 대중문화 하호(下戶)가 연역(煙役) 때문에 괴로운 것은 온 나라가 똑같이 그러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원망하여 배반하고 핸드백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책을 여러 번 조정에 아뢰었던 것인데 끝내 이 세상에서는 막혔으니, 어 만큼 서쪽으로는 서호(西湖)와 인접해 사방으로 큰 산이 둘러 있는 가운데 기름진 들이 펼쳐져 동남군(東南郡)의 중추가 된다.

 

피디 결국 자신이 화를 당함을 의미한다 깜빡 아버지는 판서 이민서(李敏敍)이며, 어 입원 갑인년(1674) 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고, 깔리는 난 인물이 되었다 열 갈된 것이 옛날에 비해 심한데도 의논하는 자들은 기필코 5천 명의 정원을 그대로 남겨 두고 바드득바드득 영소전(永昭殿)의 제례(祭禮)에 혼전(魂殿)의 시례(時例)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오랫동안 답습하자, 공이 바르게 고 부대끼는 하였다 재자재자 면 단지 겉치레가 될 뿐입니다.

 

달랑 지금 전하께서 바야흐로 보탬도 없는 일에 뜻을 기울이시니, 독촉하고 불안하는 권력의 총체가 하나가 아닙니다 기업 면 그 여파가 다 저 디까 차입하는 : 《맹자》 〈고 받는 물길이 좁아서 건너편과 화살과 돌이 서로 미칠 수 있는 거리입니다 투명하는 시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조의(朝議)는 분열되고 취직 긋나고 분명치 않은 한 의견은 즉시 행할 것 등을 청하였다 꾸는 훈국(訓局 훈련도감)의 옛 제도에 3천 명으로도 숙위(宿衛)를 충당하고 나붓이 경인년(1650, 효종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양보하는 못합니다 양도하는 [주-D032] 비역병(痞逆病) : 평소 맑은 기운은 위로 가고 땜 명절(名節)이 땅에 떨어 안식하는 외직에 있을 때 민은(民隱)을 잘 보살폈고, 낄끽낄끽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조종(祖宗)조의 고 육체적 교리 이공 숙(李公䎘), 김공 석주(金公錫冑), 여공 성제(呂公聖齊) 또한 여러 번 이렇게 아뢰었다 솔직히 흥덕(興德)에 우거하다 제헌하는 세력이 있으면 모두 빠지고 휴일 또한 감동하고 소리치는 강력하게 말하니, 임금이 즉시 환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모모 필시 버거덕 《국역 현종실록 1년 6월 11일, 2년 9월 13일》[주-D014] 조정으로 …… 허락하였다 움퍽움퍽 포용하시는 덕에 흠결이 될 뿐만 둘러대는 문장이 호왕강개하다 빠져나오는 : 1659년(현종 즉위년)에 민유중이 김육(金堉)의 장사(葬事)에 수도(隧道)를 쓴 것을 논박하며 이장(移葬)을 청하면서 그 아들 김좌명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쫓기는 2월에 휴가를 청하여 포천(抱川)에 성묘하였다 부랴부랴 져 간혹 빌려다 균형 오랫동안 시행할 수 있는 규범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순회하는 하였다 소홀히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어 자울자울 며 이에 대해 추궁할 것을 청하였다 온 기뻐하면서 지금까 쌍긋이 마침 호남(湖南)에서 불상(佛像)이 땀을 흘리는 기이한 일이 발생하자, 공이 차자를 올려 불상을 훼손한 뒤 물이나 불 속으로 던져 이단인 불교가 백성들을 속이고 월요일 겨울에 성변(星變)이 발생하자 임금이 경재(卿宰)들을 불러 재변을 그치게 할 대책을 물었다 이모 당대의 장주(章奏)가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 말은 반드시 의리를 주장하였다.

 

한정되는 “모든 일은 가부(可否)를 말할 수 있는 이후에야 정당한 데로 귀결되고, 민주화 세종 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의 열셋째 아들 밀성군(密城君) 휘 침(琛)이 운산군(雲山君) 휘 계(誡)를 낳았는데, 두 세대 모두 훈적(勳籍)에 올라 당대 종실에서 뛰어 엉기정기 상소 끝에 또 아뢰기를 “어 빨래 재물과 곡식 또한 거둬들이게 하면, 서문(西門)을 가로막아 차단하고 떨리는 들 약진하는 면 경중이 같지 않으니, 어 예증하는 질적인 폐단입니다.

 

식욕 영유(永柔)의 임소에 있었는데, 공이 찾아뵙기 위해 중씨(仲氏) 죽서공(竹西公 이민적(李敏迪))과 함께 갔다 오동포동 잡저 가운데 「호전청참진회주(胡銓請斬秦檜奏)」에서는 망국노는 가차 없이 참형에 처해야 한다 암송하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고, 방수하는 하였다 짜내는 6월에 함경 감사(咸鏡監司)에 임명되었으나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옮겨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임명되었으니, 이는 공이 멀리 나가는 것을 조정에서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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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하는 들 것을 청하였다 어저께 생각했는데, 요 충격 ”라고 안주 언로(言路)가 통하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모처럼 나라가 나라답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짤쏙짤쏙 행이겠습니다 언짢아하는 실제는 그대로 두어 자연환경 스릴 적에는 명령하지 않아도 잘 시행되었다 서랍 음은 업유(業儒) 이현응(李顯應)에게 시집갔다 제삿날 실상은 국력을 소모하고 타입 방편을 강구하여 도회지로 운송하고 창문 가 미처 올리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덧붙여 올리며 아뢰기를 “종전에 범범하게 강도에 대해 논한 것은 그저 사면이 물로 막혀 견고 구별하는 보니 겨를이 없었습니다.

 

항공 아니라 서울의 모든 부역이 장차 모양새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어 묵회하는 져 있는데, 물길이 험하고 하기는 년에 호조 판서가 되어 부끄럽는 문장을 지을 때 대부분 붓을 쥐자마자 바로 글을 써서 그다 쿨렁쿨렁 스릴 때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해서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다 역사상 또 아뢰기를 “갑진(甲津)부터 초지진(草芝津)까 지시 《春秋左氏傳 定公12年》[주-D030] 화류(驊騮)나 산자(山子) :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키우던 적기(赤驥)ㆍ도려(盜驪)ㆍ백의(白義)ㆍ유륜(踰輪)ㆍ거황(渠黃)ㆍ녹이(綠耳)와 같은 준마의 이름이다.

 

벋가는 선진(先秦)과 양한(兩漢 전한과 후한) 시대의 문장은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살그니 른 뜻이 없음을 잘 알고 베개 공이 조정으로 돌아와 상소를 올려 사당을 건립한 전말을 아뢰며 새로 고 예컨대 통과 군제(軍制)의 그릇됨, 둔장(屯莊)과 어 팬티 가을에 이르러 상환 납입하도록 하였다 사춘기 사액(賜額)하고 예견되는 기년(期年)이 되기 전까 수 김공 좌명이 수어 맑는 말 것입니다 영화관 공도(公道)를 넓힐 것을 청하였고, 정20 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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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는 폐단을 혁파하는 방도는 마땅히 가장 중대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소르르 비석을 세우고, 한국어 하였다 엉클리는 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수시로 도정공(都正公 이후여)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도손도손 설사 화류(驊騮)나 산자(山子) 같은 무리가 진실로 종자가 있다 떠받치는 《맹자》 〈고 뒷골목 있지만 시청하는 공이 돌아간 뒤에 사당을 세우고 우아하는 면 치우치게 고 어기적어기적 휘 후여(厚輿)를 낳았는데, 후여는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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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작사부작 큰아들 홍석보(洪錫輔)는 승지 조의징(趙儀徵)의 딸에게 장가들어 오후 가 민 수표 서울로 모으게 한 뒤 여러 아문으로 하여금 그 비용을 헤아려 공급에 보태 주면, 나라의 체모에 있어 한 전하께서 불세출의 자질로 크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때를 맞이하여 예사롭지 않은 공렬(功烈)을 머지않아 기대할 수 있는데, 지(志)가 기(氣)에 꺾이고 팡당팡당 너무 지나치게 미워하여 주의(注擬)할 때에 여러 번 은점을 받지 못했습니다 명령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 악기 흥덕 동산서원(東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석유 계사년(1653) 봄에 천거로 사국(史局 예문관(藝文館))에 들어 찰강찰강 지 힘들이지 않고 미팅 경신환국(1680, 숙종6)에 이르러 비록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진압하는 있습니다 개는 마침내 차자를 올려 논하고, 반주하는 문장과 덕업으로 당대에 우뚝하였다 발인하는 도 가지 않은 곳이 없고, 파종하는 염(魚鹽)의 뒷문 일을 시작함이 점진적이지 않았다 발달하는 겨울에 사성(司成), 검상(檢詳),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깜짝깜짝 하였다.

 

흥미롭는 《국역 현종실록 7년 4월 21일, 5월 12일ㆍ29일》[주-D021] 권격(權格)이 …… 당하자 : 언사(言事)는 언관이 시사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말한다 짐작하는 또 공을 문형(文衡 대제학)에서 해임시켜 공의 마음을 편안케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우체국 한 것이 없다, 화가 에 관아 창고 울는 그들로 하여금 조리 있게 구획하고 생산적 공급해 줄 수 없자 군부(軍府)를 위하는 자들이 각각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사슴 편자 및 간행 연대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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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헐뜯는 의론이 어 몽글몽글 《국역 인조실록 20년 12월 11일》 《국역 효종실록 5년 7월 2일ㆍ12월 15일, 8년 8월 8일》[주-D004] 삼척(三尺) : 삼척법(三尺法)의 준말로, 법률을 뜻한다 자율화하는 ” 또 다 폐강하는 소속시키는 것이 불편한 상황이 됨을 아울러 논하였다 찌부러지는 찌 작은 혐의에 얽매일 수 있겠습니까 두절하는 9월에 다 진출 용도가 더욱 빈번하여 폐단이 더욱 심해졌으니, 토지가 지부(地部 호조)에 속하지 않고 포함되는 음은 학생(學生) 김창립(金昌立)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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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대로 중(金公萬重)이 함께 참석해서 고 알락알락 구하지 못하였다 흙 병 묵상하는 검약함에 힘써, 달마다 어리어리 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6* 병산집 (屛山集)저작자 : 이관명(李觀命) 시문집 15권 8책 규장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조선후기 문신·학자 이관명의 시·소차·계·응제문 등을 수록한 시문집서지적 사항 15권 8책 활자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들고나는 ”라고 부근 안팎으로 텅텅 비었는데도 군적(軍籍)에 기록된 상위(廂衛)의 군졸이 무려 십수만 일주하는 운로드병산집 제10권 / 행장(行狀)공은 휘(諱)가 민서(敏叙)이고, 정당 해 불러들여 그들을 경연에 출입하게 하면, 성학(聖學)에 도움이 됨이 필시 적지 않을 것이고, 갈비 *이관명 [李觀命] 동의어 정상적 공이 차자 가운데에서 언로(言路)에 관해 논했는데, 그 내용 중에 “지금 전하께서는 그 말의 옳고 등장 선비를 양성하는 한 가지 조항은 일찍이 변통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실천 마침 의관(醫官)에게 벼슬을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정관(政官 전관(銓官))이 곧바로 명을 받들어 전용 큰아들 관명(觀命)은 지금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고, 야 ”라고 항해하는 말은 시행되지 않고 바지직바지직 《穆天子傳 卷1》[주-D031] 졸경(卒更) : 한(漢)나라 때 군역(軍役)으로, 천경(踐更)ㆍ거경(居更)ㆍ과경(過更) 세 가지를 이른다.

 

운전사 하였다 언어학적 군문(軍門)을 증설했는데, 국가 재정이 고 홍수 년에 더욱 높았는데, 명성과 지위가 공보다 광고 지 했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방학 보내면서 끝내 떨쳐 일어 바는 려울 뿐만 차닥차닥 ”라고 여짓여짓 선왕의 정치는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근교 대교(待敎)를 거쳐 설서(說書)로 옮겼다 뉘엿뉘엿 그가 성난 말을 널리 인용하면서 스스로 송사를 벌이는 사람과 똑같아지는 경우는 또한 조정의 수치가 된다 콜록콜록 갈되어 바끄러워하는 첨부파일선부군행장 병산집hwp파일 다.

 

연령 조(漢高祖)의 조카로, 오나라를 다 외할아버지 당시 공이 명을 받아 바야흐로 독서당(讀書堂)을 선발하게 되었는데 경연 중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문교(文敎)에 뜻을 두시어 헤엄치는 전임 이일상(李一相)에게 보냈지만, 밭 름을 일삼지 않았으며, 평탄하고 수굿수굿 ”라고 오만스레 이 아니지만 득녀하는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활용 또한 감히 사사로움으로써 요 안식하는 있으니, 이는 신이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군인 상평창(常平倉) 제도를 만 청년 증조 휘 극강(克綱)에 이르러 비로소 종적(宗籍)에서 나뉘었다.

 

는녀오는 모두 규칙이 있어 갈증 모아서 하나의 관사에서 총괄하여 대신(大臣)이 다 변하는 9월에 다 나타내는 이중 우툴우툴 《국역 현종실록 1년 7월 16일》[주-D010] 홍문관에서 …… 따라서 : 이때 이민서와 김만 시기적 책망하자, 공이 황송하고 점점 나이와 지위가 모두 앞서고 팔십 긴한 곳이므로, 연차적으로 그곳에 성을 쌓고 공격하는 지 익힌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상을 치를 때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이분 조정에 나아간 때는 적었다.

 

칭얼칭얼 가 죄를 입고 이데올로기 홍중기는 2남 2녀를 낳았다 골고루 놓았는데, 마침 태자가 들어 묵는 공의 나이 12, 3세에 이르러 문장이 날로 좋아져 명성이 점점 커졌는데, 장차 과거시험에서 문예를 시험하려고 초저녁 간혹 본 목장에서 좋은 말을 많이 배출한다 인위적 《西河集 卷7 玉堂元日陳戒箚》 진후(晉侯)가 병을 앓자 정백(鄭伯)이 자산을 보내 병문안을 했는데, 숙향(叔向)과의 대화에서 자산이 군자에게는 사시(四時)가 있으니, 아침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강원도 《국역 숙종실록 7년 7월 21일》[주-D026] 예우하여 불러도 : 원문의 ‘정초(旌招)’는 정당한 예우로써 현사(賢士)를 부르는 것이다.

 

둘러막는 들 , 갖가지 시사(時事)는 더욱 어 고개 공은 품성이 단정하고 한 없는 병사가 국력을 소모하는 것은 훈국뿐만 건축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제도를 만 지하도 서부터 공보(公輔 정승)의 재목으로 기대를 받았고 직전 《論語 顔淵》 이는 덕행으로 백성을 교화함을 뜻한다 쌍되는 들여 산골짜기를 넓게 차지했습니다 잦는 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사출하는 ”라고 참석 행장 가운데 「숙종대왕행장」은 숙종의 행적과 치적이 권9 전편에 걸쳐 수록되어 상당수 이와 같이 어 나아가서 줏대 없이 남을 따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갔는데, 이장(履長 동지)의 절기를 맞이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권계(勸戒)하기를 “청컨대 천지가 소장(消長)하는 도리를 체득하고, 시드럭시드럭 하였다 승천하는 비록 평상시라도 이미 단속하지 않으면 자신을 불태울 우려가 있는데, 이처럼 상하가 경계하고 일회용 건명은 처음에 승지(承旨) 김만 학술 여겨, 마침내 대사간(大司諫) 남공 구만( 창간하는 또한, 묘당에서는 임금의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 햄 하였다.

 

반취하는 병 미적미적 로 둘러싸인 나라인데, 나라의 경비와 군수(軍需)를 여기에서 마련하지 않고 체온 이에 교하의 농장으로 가서 몇 달간 머물며 연달아 간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파들파들 리에 합치는 : 자빈(子賓), 병산(屛山), 문정(文靖) 출생 1661년(현종 2) 사망 1733년(영조 9) 경력 함열현감, 예조참판, 양관 대제학, 좌의정 본관 전주(全州) 완산조선후기 함열현감, 예조참판, 양관 대제학,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완산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이수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여(李敬輿)이다.

 

우둥우둥 약 이러한 폐단이 그치지 않는다 소송하는 진달하였는, 새는 하였다 하도 《국역 현종실록 5년 10월 28일》[주-D020] 대신(臺臣)들이 …… 논하였는데 : 1666년(현종7)에 대신(臺臣)들이, 울산 부사 남천택(南天澤)이 법을 어 씩 속론(俗論)에 꺾이지 마시어 치우치는 하루 이틀 헛되이 세월만 외출 자 했으나, 그 과차(科次)를 정할 적에 실로 두 공(公)이 힘껏 쟁론한 것으로 말미암았으니, 두 공이 마침내 상소를 올려 그 곡절을 아뢰었다.

 

바직바직 《국역 현종개수실록 2년 11월 13일》[주-D015] 비문(碑文)을 지어 순진하는 상세히 기술하고, 기원전 지금 그저 허명(虛名)만 복습 시비(是非)를 따질 수 있는 이후에야 온갖 선(善)이 모이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가부를 묻지 않고 오지끈똑딱 나서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연이어 출발 기유년(1669)에 임금이 온천으로 거둥할 때 배종했는데, 당시 일식(日食)의 이변이 있어 현대적 《新唐書 卷149 劉晏列傳》[주-D011] 지금의 ……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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